연기란 무엇인가?
연기(緣起)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반드시 연(緣)하여 기(起)한다는 것이다. ‘연(緣)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한다’는 뜻이요, ‘기(起)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란, ‘A로 연하여 B가 기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A를 원인으로 하여 B라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뜻이다. 요새 말로 하며는 ‘연기’란 원인과 결과를 뜻하는 것이며 그것을 축약하여 인과(因果, causation) 또는 인과관계(causational relation)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연(緣)은 원인이요, 기(起)는 결과라 말해도 대차가 없다. 보통 인연(因緣)이라 말할때, 그것은 인(因)과 연(緣)의 합성어인데, 보통 인(hetu)은 직접적 원인을 지칭하고 연(pratyaya)은 그 직접적 원인을 형성하는 주변의 조건들이나, 보조적인 간접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초기불전에 있어서 대부분 인과 연의 그러한 엄격한 구분은 존재치 않는다. 결국 인과 연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것은 요새말로 인과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과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을 것이요, 결과가 없으면 원인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과를 원시경전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규정하고 있다. 『잡아함경』 권12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나는 그대들에게 인연법을 말하겠다. 무엇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그것은 곧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爾時世尊, 告諸比丘. 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 云何爲因緣法? 謂此有故彼有. 謂緣無明行, 緣行識, 乃至如是如是純大苦聚集. 『雜阿含經』 卷第十二, 296, 『大正』 2-84.
권15에 또 말했다【詣菩提樹下, 敷草爲座, 結跏趺坐. 端坐正念, 一坐七日, 於十二緣起, 逆順觀察, 所請此有故使有, 此起故彼起. 緣無明行, 乃至緣生有老死, 及純大苦聚集, 純大苦聚滅. 『華阿含經』 卷第十五, 369, 『大正』2-101. 『雜阿經』 卷第十二, 297, 『大正』 2-84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한글로 읽고자하는 사람은 고익진 선생이 편한 『한글 아함경』(서울 : 동국대출판부, 2000) 중 ‘십이연기설’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표현의 팔리어장경 경문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상응니까야』 인연편의 「인연상응」, 37번을 들 수 있다.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m uppajjati, imasmim assati idaṁ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도 멸한다.) 『南傳』13-96.】.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자 이는 저것이 일어난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아니, 결국 연기라는 게 이렇게 시시한 것인가?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말할 때,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이따위 정도의 말이 싯달타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 그 무시무시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전부란 말인가? 그렇다! 미안하지만 그렇다! 바로 그게 싯달타의 교설(巧舌)의 전부요, 불교(佛敎는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의 전부다. 불교는 이 한마디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다! 이 한마디를 벗어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요, 사기요 이단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논리를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놓치지 않고 따라온 많은 독자들의 실망감을 생각하면 나는 이 붓을 옮기기가 어렵다. 그러나 격려하고 싶다. 몇 호흡만 늦추고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차분하게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모든 지극한 지식이나 깨달음은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체험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상식적이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세간에 도통했다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엄청난 진리를 발견했다고 외치는 자들이, 전혀 새로운 비의적 진리를 깨우쳤다고 자신하는 자들이, 새벽별이 뜰 때 홀연히 정각을 얻었다고 선포하는 자들이, 새로운 종교를 펼칠려고 하고, 보살심으로 중생을 교화하겠다고 발심한다. 나는 그들에게 무릎꿇고 애원하고 싶다. 우리 인류에게 이미 종교는 만원이다. 제발 새로운 종교를 개창하려 하지 말라! 남이 다 해먹는다고 나도 또 해먹겠다고 덤비지 말라! 늠름한 총각들을, 아리따운 소녀들을 정욕의 번뇌로부터 구원해주겠다 하고 승가의 울타리에 가두는 그러한 가혹하고도 어리석은 짓들은 더 이상 범하지 말라!
▲ 싯달타가 고행한 시타림 주변의 광경. 매우 척박한 곳이었다. 맨발로 엄마 뒤를 졸랑졸랑 따라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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