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철 -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
열하일기가 태우려 했던 산여의 이야기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
남공철(南公轍)
亡友朴山如之祥祭, 余往與焉. 其親戚朋友來者言: “山如歿, 嗣子尙幼, 狀德之文未成, 然知山如者莫如子, 要一言識墓.” 嗚呼! 余常樂道人之善, 且余自弱冠治文詞, 所與交多知名士, 而山如最傑, 又遇余篤厚, 以余文銘之, 逝者必且莞爾于九原.
山如諱南壽, 早孤, 奉母李淑人以至孝, 淑人生長忠節故家, 賢而有見識, 旣寡, 爲山如收泣以生, 鬻簪珥具幣, 延名宿以敎之. 稍長, 喜與文人韻士游, 則又數具酒食甚設而無吝色, 由是山如詩文日進, 交遊益廣, 名聲遂大振. 世之忌山如者衆, 或相與爲謗言而枳之, 然山如性素剛, 欲一有爲於當世, 故終不自沮.
正宗七年, 奎章閣直學士沈公念祖掌國子試, 見山如文, 擢置高等, 公去而言於後至者, 竟得發解. 後二年成進士, 召見涵仁亭, 賜法醞, 爲太學掌議. 率諸生上疏討逆, 不報, 卽大成殿門外, 拜辭而去. 時有宰相當路者聞山如名, 擬除爲童蒙敎官, 有沮之者不果, 其後屢下第, 落拓不得志者久之.
余嘗從燕巖朴美仲, 會山如碧梧桐亭館, 靑莊李懋官ㆍ貞蕤朴次修皆在. 時夜月明, 燕巖曼聲讀其所自著『熱河記』, 懋官ㆍ次修環坐聽之. 山如謂燕巖曰: “先生文章雖工好, 稗官奇書, 恐自此古文不興.” 燕巖醉曰: “汝何知?” 復讀如故, 山如時亦醉, 欲執座傍燭焚其藁, 余急挽而止, 燕巖怒, 遂回身臥不起. 於是懋官畵蜘蛛一幅, 次修就屛風草書, 作「飮中八仙歌」, 紙立盡. 余稱書畵極玅, ‘燕巖宜有一跋爲三絶’, 欲以解其意, 而燕巖愈怒愈不起. 天且曙, 燕巖旣醒, 忽整衣跪坐曰: “山如來前. 吾窮於世久矣, 欲借文章, 一瀉出傀儡不平之氣, 恣其游戲爾. 豈樂爲哉? 山如ㆍ元平, 俱少年美姿質, 爲文愼勿學吾, 以興起正學爲己任, 爲他日, 王朝黼黻之臣也. 吾當爲諸君受罰.” 引一酌復飮, 又勸懋官ㆍ次修飮, 遂大醉懽呼.
余以是歎燕巖奇氣有虛己之量, 而益知山如議論之正也. 若使假之年而充其所學, 則必將有可觀者, 而不幸短命死矣. 雖然, 其可惜者, 豈獨此也哉?
山如世爲潘南大族, 其先有曰東亮封錦溪君, 祖諱道源司憲府大司憲, 考諱相冕司諫院正言. 山如娶韓山李氏參判海重女, 再娶平山申氏士人大顯女, 三娶某郡某氏士人某女, 有一子幼. 山如以丁未八月甲子卒, 年三十, 葬于開城府魚化山之原. 所著有寄所稿若干卷藏于家.
前五年, 余自山陰來京師, 與山如飮, 烹河豚. 客言: “桃花已落, 服河豚者當忌.” 山如喫一碗且盡曰: “唉士旣不能伏節死, 則寧食河豚死, 豈不愈於碌碌而生耶?” 余至今思其言似戲而甚有理, 悲夫!
銘曰: “山如生而愛吾之文, 其死也銘以吾之文. 人或毁而擠之, 天亦阨而促之. 其竟使山如不止於所欲止而止於斯.” 『金陵集』 卷之十七
해석
亡友朴山如之祥祭, 余往與焉.
죽은 친구 박산여(朴山女)의 상제(祥祭)【상제(祥祭): 죽은 후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기일인 소상과 대상에 지내는 제사】에 내가 갔다.
其親戚朋友來者言: “山如歿, 嗣子尙幼, 狀德之文未成, 然知山如者莫如子, 要一言識墓.”
그의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산여는 죽었고 자손은 아직 어려 덕을 형상한 문장은 완성되질 않았는데 산여를 아는 이는 그대만한 이도 없으니 한 마디로 말로 묘를 알게 하길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嗚呼! 余常樂道人之善, 且余自弱冠治文詞, 所與交多知名士, 而山如最傑, 又遇余篤厚, 以余文銘之, 逝者必且莞爾于九原.
아! 나는 항상 도인(道人)의 선함을 즐겼고 또한 나는 약관으로부터 문단을 다스림에 사귄 이들에 알던 명사들을 많이 알지만 산여가 가장 뛰어났고 또 나를 예우함에 독실하고 넉넉했기에 나의 문장으로 그걸 지으리니 떠난 자는 반드시 또한 저승에서 웃을 테다.
山如諱南壽, 早孤, 奉母李淑人以至孝, 淑人生長忠節故家, 賢而有見識, 旣寡, 爲山如收泣以生, 鬻簪珥具幣, 延名宿以敎之.
산여의 휘는 남수(南壽)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어머니 이씨 숙인(淑人)【숙인(淑人):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당하관(堂下官) 정삼품(正三品)ㆍ종삼품(從三品)인 문무관(文武官)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封爵).】을 지극한 효로 봉양했는데 숙인은 충절한 옛 집에서 자랄 적에 어질고 식견이 있어 머잖아 과부가 되어서 산여를 위해서 눈물을 거두고 낳아서 비녀나 귀걸이 장신구를 팔아서 명사[名宿]를 불러 그를 가르쳤다.
稍長, 喜與文人韻士游, 則又數具酒食甚設而無吝色, 由是山如詩文日進, 交遊益廣, 名聲遂大振.
조금 자라 기쁘게 문인과 시인들과 교유하며 또한 자주 술과 밥을 차리길 매우 푸짐하여 인색함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산여의 시와 문장을 날로 나아졌고 교유함은 더욱 넓어져 명성이 마침내 크게 전해졌다.
世之忌山如者衆, 或相與爲謗言而枳之, 然山如性素剛, 欲一有爲於當世, 故終不自沮.
세상엔 산여를 싫어하는 이들이 많아 혹은 서로 비방의 말을 하여 그를 해쳤지만 산여의 성품은 맑고도 굳세서 한결같이 당대에 하고자 함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기가 꺾이지 않았다.
正宗七年, 奎章閣直學士沈公念祖掌國子試, 見山如文, 擢置高等, 公去而言於後至者, 竟得發解.
정조 7년(1783)에 규장각 직학사(直學士) 심염조(沈念祖, 1734~1783)가 국자감시(國子監試)를 맡았는데 산여의 문장을 보고서 발탁하여 높은 등수에 두며 심염조가 떠나며 뒷에 오는 이에게 말하여 마침내 초시에 합격할【발해(發解): 과거의 초시(初試)에 합격하는 것.】 수 있었다.
後二年成進士, 召見涵仁亭, 賜法醞, 爲太學掌議.
2년이 흘러 진사가 되자 함인정(涵仁亭)【창경궁의 정자 중 하나인 '함인정'[涵仁亭] 영조께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한 곳이라고 합니다.】으로 초대되었고 법온(法醞)【법온(法醞):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下賜)해 주는 술】을 하사하시며 태학장의(太學掌議)【태학장의(太學掌議): 성균관(成均館)의 장의(掌議). 유생(儒生) 중에서 선출하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각각 1명씩 두었다.】를 삼으셨다.
率諸生上疏討逆, 不報, 卽大成殿門外, 拜辭而去.
성균관 제생을 데리고 역적을 토벌함을 상소했지만 처형되지 않았고 곧 대성전(大成殿) 문 밖에서 공손히 사양하며 떠났다.
時有宰相當路者聞山如名, 擬除爲童蒙敎官, 有沮之者不果, 其後屢下第, 落拓不得志者久之.
당시 재상이나 요직에 있던 이들은 산여의 이름을 듣고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천하여 제수했고 그를 막으려는 이들은 과연하지 못했으며 훗날엔 자주 낙방하여 불우하게 뜻을 얻지 못한 지 오래였다.
余嘗從燕巖朴美仲, 會山如碧梧桐亭館, 靑莊李懋官ㆍ貞蕤朴次修皆在.
내가 일찍이 연암(燕巖) 박미중(朴美仲)을 따라 산여(박남수)의 벽오동정관(碧梧桐亭館)에 모였을 때에 청장(靑莊) 이덕무(李懋官)와 정유(貞蕤) 박차수(朴次修)가 모두 그곳에 있었다.
時夜月明, 燕巖曼聲讀其所自著『熱河記』, 懋官ㆍ次修環坐聽之.
그날 밤은 달 밝은 밤이었고 연암은 느리게 그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어나가니, 무관과 차수도 삥 둘러앉아 그것을 들었다.
山如謂燕巖曰: “先生文章雖工好, 稗官奇書, 恐自此古文不興.”
산여가 연암에게 “선생님의 문장은 비록 기교가 있고 좋지만, 패관기서이기에 『열하일기』로 인해 고문이 진흥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라고 말했고,
燕巖醉曰: “汝何知?” 復讀如故, 山如時亦醉, 欲執座傍燭焚其藁, 余急挽而止, 燕巖怒, 遂回身臥不起.
연암은 취하여 “네 놈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하며, 다시 아까처럼 읽어나가자 산여도 그때에 또한 취했기에 앉은 곳에 있던 촛불을 잡고 그 원고를 태우려 해서 나는 급히 만류하며 그만두게 하니, 연암은 화를 내며 마침내 몸을 돌려 눕고서는 일어나질 않았다.
於是懋官畵蜘蛛一幅, 次修就屛風草書, 作「飮中八仙歌」, 紙立盡.
이때에 무관은 한 폭의 거미를 그렸고 차수는 병풍으로 다가가 초서로 두보의 시인 「음중팔선가」를 지으니, 종이는 곧 동났다.
余稱書畵極玅, ‘燕巖宜有一跋爲三絶’, 欲以解其意, 而燕巖愈怒愈不起.
내가 글과 그림이 극히 오묘함을 칭찬하며 “연암이 마땅히 하나의 발문을 써서 삼절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하며, 연암의 마음을 풀어주려 했으나 연암은 더욱 화를 내면서 더욱 일어나려하질 않았다.
天且曙, 燕巖旣醒, 忽整衣跪坐曰: “山如來前. 吾窮於世久矣, 欲借文章, 一瀉出傀儡不平之氣, 恣其游戲爾. 豈樂爲哉?
날이 점차 밝아오자 연암은 이미 술에서 깼고 갑자기 옷매무새 고치며 무릎 꿇고 앉아서 말했다. “산여야, 앞으로 나오라! 내가 세상에서 궁핍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문장을 빌려 한 번 꽉 막힌 불평한 기운을 내뿜으며 방자히 놀았던 것뿐이다.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山如ㆍ元平, 俱少年美姿質, 爲文愼勿學吾, 以興起正學爲己任, 爲他日, 王朝黼黻之臣也. 吾當爲諸君受罰.”
산여와 원평(남공철)은 모두 어리고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으니 글을 쓸 적에 삼가 나를 배우지 말고 정학을 흥기함으로 자기의 임무로 삼으며 훗날엔 왕조와 조정의 신하가 되어라. 나는 마땅히 제군들을 위해 벌을 받겠네”
引一酌復飮, 又勸懋官ㆍ次修飮, 遂大醉懽呼.
한 술잔을 끌어 다시 마시기 시작했고 또한 무관과 차수에게 권하며 마셨고, 마침내 크게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余以是歎燕巖奇氣有虛己之量, 而益知山如議論之正也. 若使假之年而充其所學, 則必將有可觀者, 而不幸短命死矣.
나는 이 사건으로 연암의 기이한 기운과 자기를 비우는 도량이 있음에 탄색했고 더욱 산여의 의론이 바르다는 걸 알았으니 만약 몇 년을 빌려줘 배운 것을 확충했다면 반드시 장차 볼 만한 게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 단명하여 죽었다.
雖然, 其可惜者, 豈獨此也哉?
비록 그렇다 해도 아까운 것이 어찌 유독 이것 만이겠는가?
山如世爲潘南大族, 其先有曰東亮封錦溪君, 祖諱道源司憲府大司憲, 考諱相冕司諫院正言.
산여는 대대로 반남(潘南)의 큰 가문이 되었으니 선조는 동량(東亮, 1569~1635)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고 할아버지는 휘가 도원(道源)으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었으며 아버지는 휘가 상면(相冕)으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었다.
山如娶韓山李氏參判海重女, 再娶平山申氏士人大顯女, 三娶某郡某氏士人某女, 有一子幼.
산여는 한산 이씨 참판 해중(海重)의 딸에게 첫 장가들었고 평산 신씨 선비인 대현(大顯)의 딸에게 두 번째 장가들었고 아무개 군의 아무개 씨 선비인 아무개 딸에게 세 번째 장가들어 한 명의 어린 자식을 두었다.
山如以丁未八月甲子卒, 年三十, 葬于開城府魚化山之原. 所著有寄所稿若干卷藏于家.
산여는 정미(1787)년 8월 갑자에 죽었으니 나이 30살이고 개성부 어화산(魚化山) 언덕에서 장사지냈고 저술하거나 부친 원고 몇 권은 집에 소장되어 있다.
前五年, 余自山陰來京師, 與山如飮, 烹河豚.
5년 전에 내가 산음(山陰)에서 서울로 와 산여와 마시는데 복어[河豚]를 삶아왔다.
客言: “桃花已落, 服河豚者當忌.”
손님이 “복사꽃이 이미 져 복어를 먹는 건 꺼리기에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山如喫一碗且盡曰: “唉士旣不能伏節死, 則寧食河豚死, 豈不愈於碌碌而生耶?”
산여는 한 사발을 다 먹고서 “아! 선비가 이미 절개에 복종하여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복어를 먹고 죽는 것이 아마도 보잘 것이 사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余至今思其言似戲而甚有理, 悲夫!
나는 지금에 이르도록 그 말이 생각나니 농담인 듯하지만 매우 이치가 있으니 슬프구나!
銘曰: “山如生而愛吾之文, 其死也銘以吾之文. 人或毁而擠之, 天亦阨而促之. 其竟使山如不止於所欲止而止於斯.” 『金陵集』 卷之十七
명(銘)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山如生而愛吾之文 | 산여가 살았을 땐 내 문장을 아껴줬는데 |
其死也銘以吾之文 | 그가 죽자 나의 문장으로 명을 짓네. |
人或毁而擠之 | 사람은 혹 훼손시키고 배척하며 |
天亦阨而促之 | 하늘 또한 재앙 내리고 재촉해대지. |
其竟使山如不止於所欲止而止於斯 | 마침내 산여에게 그치고자 한 곳에서 마치지 못하고 여기에서 마치게 했구나.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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