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의 거부권
비록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어도 조선에서 새로운 학풍이 만개할 무렵 때마침 중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문적 발전이 있었다. 그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강희제의 시대에 시작된 백과사전 프로젝트가 오랜 작업 끝에 옹정제(雍正帝, 1678~1735)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었다. 1725년에 간행된 백과사전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거창한 제목답게 현재까지 나온 모든 문헌들을 총망라해서 무려 1만 권의 책으로 엮은 엄청난 규모다【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도 방대한 백과사전이 편찬된 것을 보면 가히 세계적으로도 백과사전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1751년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가들이 모여 인류의 모든 학문을 백과사전으로 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도하고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 노장파까지 가세한 이 백과사전은 제목도 『고금도서집성』처럼 거창하지 않고 그냥 『백과사전(Encyclopédie)』이지만 내용에서도 중국의 사전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중국의 필자들은 전부 학자들이었으나, 프랑스의 필자들은 루소와 돌바크 등 학자들이 오히려 소수이고 양말이나 시계를 만드는 기능인들이 가장 많을 정도로 백과사전의 개념에 충실했다. 동서양 두 문명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과연 ‘오랑캐 나라’ 답게 청나라는 옛 중화세계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과 양명학(陽明學)을 버리고 새로이 고증학(考證學)을 채택해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학문 연구의 풍토를 정착시켰다. 가히 동북아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한 커다란 변화인데, 여기서 간단히 그 과정을 짚고 넘어가자.
양명학은 원래 명의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주창한 새로운 유학이지만, 이후에 워낙 여러 갈래로 분파되었으므로 단일한 정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쉽게 말해서 기본적으로 성리학의 ‘대중판’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성리학이 주로 국가 운영의 철학이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데 비해 양명학은 유학만이 아니라 선불교나 도교의 요소까지 가미해서 일종의 생활 철학으로 성립했다(그랬으니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에 양명학이 뚫고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연하지만, 일부 골수 분자가 아닌 사람들은 양명학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현실적 대세 감각을 보였던 최명길이 대표적인 예다). 양명학만 해도 성리학에 비해서는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명나라를 타도한 청나라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학풍을 장려한다. 그게 바로 고증학이다.
고증학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이전의 어느 유학보다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학풍이다. 실제로 고증학의 모토는 바로 실사구시였으니까 고증학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실학인 셈이다. 성리학이 사변적이고 양명학이 관념적이라면 고증학은 늘 유학의 근저에 놓여 있었던 그 사변성과 관념성을 제거하고 과학으로서의 유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고증학은 유학에서 나왔으되 가장 유학답지 않은 학풍이다. 이렇게 보면 고증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문의 초보적인 분류와 체계화가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여전히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등 인문학 분야에 치중한다는 문제는 남았으나, 적어도 방법론에 관한 한 고증학은 훈고학적 관점에 입각해서 모든 학문적 대상을 엄밀히 증명하려는 과학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렇다면 고증학적 연구에서 무엇보다 전거(典據)가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데, 그 전거를 모으는 작업이 바로 『고금도서집성』의 편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조선은 같은 시기에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맞았으나 그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는 서로 달랐다. 단적으로 말해서 고증학은 성공했으나 실학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바로 체제와 이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중화세계의 우물 안 개구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새로운 시야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오랑캐 세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일 따름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서양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그들이 동양의 오랑캐이기에 서양 오랑캐[洋夷]를 익숙하게 여긴 탓이다. 하지만 중화세계인 조선이 근본 없는 청나라처럼 속되게 처신할 수 있으랴?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실학(고증학)이 곧 관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 실학은 재야의 학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양명학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선의 지배층이 실학을 수용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 바깥을 보자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면서 중국에 가는 조선의 사절도 간소해졌다. 따라서 예전의 복잡한 명칭도 간단히 연행사(燕行使), 즉 연경에 가는 사절로 바뀌었다. 그림은 연경에 간 연행사의 행렬을 그린 「연행도」다. 이들을 통해서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의 문물을 접하게 된다.
사회적 분위기와 학문적 흐름은 새 시대를 지향하고 있는데도 조선의 정치 현실은 여전히 수구적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명나라 때부터 정치 지상주의가 한물 갔는데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모든 사회 부문들을 정치의 고삐가 꽉 틀어쥐고 있다. 원래 경제는 진화론적으로 성장하지만 정치는 단속적으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바꿔 말하면 정치에는 반드시 적절한 혁명이 필요하다. 과연 조선이 처해 있는 시대적 모순은 곧 두 차례의 혁명적 변화로 표출된다. 하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반동이고 다른 하나는 급진적인 왕정복고다. 그러나 두 사건의 뿌리는 하나다. 탕평책(蕩平策)으로 당쟁의 열기를 잡았다 싶은 순간 영조(英祖)는 마음이 약해진다. 그동안 사대부 정치의 가장 큰 폐단이었던 당쟁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그는 왕국으로의 꿈을 조금씩 접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당격인 노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배려해주기도 하고 약간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해주기도 한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처럼 당쟁이 격화되는 일만큼은 두번 다시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론과 낙론 간에 제법 열띤 논쟁이 벌어졌어도 영조는 거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론 내부의 논쟁이었기에 예전의 예송논쟁처럼 당쟁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노론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노론을 왕당파로 간주했으나 영조의 비호 아래 입지를 확고히 굳힌 노론은 자신들이 왕당파가 아니라 오랫동안 조선을 호령하던 본래의 사대부로 복귀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한 편의 비극을 낳게 된다.
영조(英祖)는 1728년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죽은 탓에 그 뒤 마흔이 넘어 얻은 아들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62)를 끔찍히 아꼈다. 그래서 세자가 겨우 열네 살이던 1749년부터 국왕 실습을 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아들을 위해서는 커다란 실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데다가 열 살 때 이미 신임옥사에서 노론이 저지른 잘못을 지적할 만큼 정치적 안목이 뛰어났던 세자를 노론 세력은 결코 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에게는 다른 아들이 없었으므로 어차피 그들의 입맛에 맞는 왕위계승자를 물색할 수 없었는데도 노론은 장헌세자를 무척 싫어했다. 더욱이 여기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와 후궁까지 가세하면서 세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마침내 노론의 책동은 먹혀들었다. 아마 영조는 여당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아들이 장차 나라를 이끌 지도자감으로 부족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이미 세자는 사실상의 국왕으로서 국정을 전담하고 있었다). 원래 성질이 불같았던 그는 간간이 올라오는 노론의 상소만 믿고 아들을 몹시 꾸짖었는데, 그건 그의 두번째 실수였다. 총명함에 비해 성격이 약했던 세자는 믿었던 아버지마저 등을 돌리자 그만 정신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이후 세자는 궁녀와 내시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에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고, 마음대로 궁에서 나가 놀러다니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노론은 치명타를 준비한다. 1762년 5월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耈)와 홍계희(洪啓禧), 윤급(尹汲) 등 노론의 똘마니들은 더 아래 똘마니인 나경언(羅景彦)이라는 자를 시켜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고해 바치게 했다【윤급은 탕평책(蕩平策)조차 반대하던 소인배였고 나경언은 바로 그의 집 청지기였으니 그들의 책동이 치졸할 것은 예상되는 바다. 당시 나경언은 가산을 탕진한 처지였으므로 윤급 일당이 매수하기에 좋은 자였다(그들이 영조 앞에 직접 나서서 세자를 탄핵하지 못하고 하수인을 쓴 이유는 영조가 어떻게 나올지 겁났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신분의 나경언이 감히 국왕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그는 우선 역모가 있다고 고발하면서 영조의 관심을 끈다. 과연 영조는 음모에 걸려들어 친히 나경언을 국문하겠다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나경언은 세자의 비행을 10조목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했다. 상당한 부풀림이 있었음은 당연하지만, 영조(英祖)는 음모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영조는 나경언을 비호하려 했으나 결국 나경언은 세자를 모함한 죄로 처형당했다. 손대지 않고 코를 풀려는 모리배 일당의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그것은 가뜩이나 세자의 처신에 분노하고 있던 영조(英祖)로 하여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실수를 저지르게 하기에 족했다. 나경언의 고발이 있었던 날부터 세자는 석고대죄를 시작했으나 영조는 20일이나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나라의 앞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 것이다. 한 번 아들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는 가혹했다. 신하들이 세자의 자결을 극구 만류하자 영조(英祖)는 세자를 서자로 강등시켰다. 사실 세자는 계비의 소생이 아니므로 원래 서자였으나 세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적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조치는 곧 세자를 폐위하겠다는 뜻이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겠으나, 영조는 세자를 이미 정치적으로 죽여놓고도 생물학적으로도 죽이려 했다. 결국 세자는 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혔다가 여드레 만에 그 안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그의 아내인 경의왕후(敬懿王后, 우리에겐 혜경궁 홍씨로 더 잘 알려져 있다)에 의해 『한중록(閑中錄)』이라는 책으로 기록되는데, 물론 여기서는 사대부(士大夫)들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장헌세자의 억울함이 소상히 나와 있다. 아마 그녀는 책 제목을 ‘한중록(恨中錄, 한스러운 내심에 대한 기록)’이라 붙이고 싶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지만, 이 사건은 정치적 함의도 대단히 크다. 영조(英祖)는 왕국을 한 발 앞에 두고 갑자기 물러서 버렸다. 왜 그랬을까? 유구한 전통의 사대부 체제를 자신의 대에 뒤집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걸까?
세자가 죽은 직후 영조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묘한 방식으로 달랜다. 서자로 퇴출시켰던 아들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고, 장례식을 직접 집전한 것이다(그 때문에 장헌세자는 사도세자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알려졌다). 그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분명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했던 듯하다. 게다가 공석이 된 세자 자리를 세자의 아들인 이산(李祘, 뒤의 정조)에게 잇게 한 것은 세자가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영조(英祖)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영조에게 다른 아들은 없었으나 손자는 많았다).
그렇다면 영조(英祖)의 의도는 확실해진다. 세자에게 가해진 고발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또한 노론이 세자를 축출하는 데 음모를 동원했든 않았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여권의 왕위계승자를 ‘여당’이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영조는 노론이 배척하는 세자에게 왕권을 상속시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조의 처지가 불가피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왕국화가 아직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아마 탕평책(蕩平策)으로 왕권 강화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던 영조도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새 세자(정확히 말하면 세손世孫이라 해야겠지만)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할아버지가 중단한 왕국화를 다시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타이밍을 놓친 만큼 그 작업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따라서 이제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신중을 기해서 장기적인 호흡으로 추진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더 신속하고도 급진적으로 추진하든가, 1777년 영조(英祖)가 죽은 뒤 조선의 22대 왕으로 즉위한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7~1800)는 그 중에서 후자의 노선을 택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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