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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규장각, 북학파)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규장각, 북학파)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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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영조(英祖)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한 그가 출중한 재질과 뛰어난 학문, 강력한 카리스마 등 군주적 자질을 두루 지녔고 무척 오래 재위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왕권 강화와 조선의 왕국화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북아의 질서가 송두리째 변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황제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청나라에도 황제는 있다. 그것도 건륭제(乾隆帝, 1711~99)라는 뛰어난 황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는 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이 충심으로 사대했던 한족 황제는 아니다. 진정한 중화의 황제, 즉 천자는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조선의 국왕에게도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을 주었지만, 그동안 중국에 상위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왕권 견제의 수단으로 잘 써먹었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싫든 좋든 이제 부터는 조선의 국왕을 중화세계의 유일한 절대 권력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조(英祖)가 강력한 왕권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사실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참고로, 영조의 치세에 해당하는 18세기에 유럽 세계는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 시기 유럽 국가들의 정치 체제를 흔히 절대왕정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절대라는 수식어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동양식 전제 왕국과 비교한다면 절대왕정조차 별로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유럽의 왕국들은 중세 봉건 시대에 처음 등장하지만, 중세가 끝날 때까지 영토국가도 아니었고 왕권도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종교개혁 이후 영토국가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각국의 군주들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기에 전과는 다른 체제라는 의미에서 절대왕정이라 부른 것일 뿐이다. 그에 비해 동양식 왕국들은 고대부터 중국의 천자는 물론이고 주변국들의 왕들도 근대 유럽의 절대왕권을 능가하는 강력한 왕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그 유리한 변화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탕평책(蕩平策)을 관철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왕국의 문턱을 넘었다 싶은 순간 그는 그만 발을 빼버렸다. 과속을 겁낸 탓일까? 아니면 개혁 피로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이 탓일까? 그는 심지어 석연찮은 이유로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개혁의 완성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그가 미룬 숙제는 그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떠맡게 되었는데,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손자에게 출발점이나마 제대로 마련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사대부(士大夫)들의 책동에 휘말려 비명에 죽는 것을 목격한 경험은 정조(正祖)에게 처음부터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세자의 아들로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한 희한한 기록을 보유하게 된 정조는 마음 속에 깊숙이 가라앉은 앙금을 결코 씻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아버지를 해원(解寃)한다는 사적 과제와, 왕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적 임무가 결합되면서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번이 아마도 조선 역사상 마지막 체제 실험이 되리라는 것을 그도 예감했던 걸까?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조선은 완전한 왕국이 되어 격변하는 동북아의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될 테고, 실패한다면 조선은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제물이 되고 말 터이다.

 

즉위한 뒤 정조(正祖)가 맨처음으로 한 일은 아버지의 시호를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도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영조(英祖)가 내린 시호였으니 정조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장헌세자는 나중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정조가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는 것과 더불어 장조莊祖로 격상된다). 일단 이렇게 아버지의 원한을 어느 정도 달래고 나서 정조는 곧바로 왕당파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물론 이 발상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세조(世祖)도 그랬고, 광해군(光海君)도 그랬고, 영조(英祖)도 그랬다. 무릇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왕다운 왕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왕당파를 튼튼히 구축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록 발상에서는 같았어도 정조(正祖)가 구사한 수단은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었다. 세조, 광해군(光海君), 영조는 모두 기존의 사대부 세력 가운데 일부를 구워삶아서 왕당파로 삼았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들을 측근으로 부렸고, 광해군과 영조는 각각 대북과 노론의 당파를 여당으로 성립시켰다. 하지만 정조는 그들이 실패한 이유를 바로 그 점에서 찾는다. 기존의 세력을 왕당파로 만들면 잘 되어야 자기 대에만 유지될 뿐이고 못 되면 오히려 반정을 부르게 된다. 세조와 영조가 전자의 경우라면 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정조가 택한 방법은 새롭고 참신한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즉위하기도 전인 1776년에 그가 규장각(奎章閣)이라는 기구를 설치한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그는 1775년부터 영조(英祖)의 명으로 국정을 맡았다). 원래 규장이란 임금이 쓴 글을 뜻하는 말이니까 규장각도 새삼스러운 기구는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규장각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으며, 숙종(肅宗) 때도 환장각(煥章閣)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조(正祖)의 규장각은 다르다. 임금의 글씨나 그림을 보관한다는 기본 기능은 그대로 가져갔으나 규장각의 실제 기능은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야심찬 것이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문화의 탈을 쓴 정치기구였다.

 

 

우선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의 본연의 임무를 확대해서 도서관과 출판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개혁의 운을 뗀다. 세자 시절부터 수입하고 싶어했던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사고전서건륭제(乾隆帝) 때 이루어진 도서 집대성이다. 강희제고금도서집성편찬 작업을 이어받은 작업인데, 고금도서집성처럼 항목별로 분류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서적들을 모아 새로 교정하고 정서하고 지은이 소개까지 붙여서 총정리한 것이다. 무려 8만 권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청나라 조정에 반대하는 입장의 서적들은 내용을 자의적으로 첨삭하기도 하고 금서로 분류하기도 했으니 정치적 잣대가 상당히 반영된 총서라고 봐야겠다. 제목에서 사고(四庫)란 네 군데 서고를 가리키는데, 모두 네 질(민간 열람용까지 합치면 일곱 질)을 인쇄했던 탓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역시 동양에서의 서적이란 보급용이 아니라 보관용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를 비롯해서 각종 도서 수만 권을 보관하게 하는 한편, 활자의 주조에서부터 서적의 편찬과 간행에 이르기까지 출판의 총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나중의 일이지만 정조 자신의 저서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규장각에서 간행된다). 이 기능도 물론 중요하나 정조가 머릿속에 그리는 규장각의 참된 임무는 아니다. 규장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그는 드디어 애초부터 상정해왔던 과제를 규장각에 부여하는데, 그것은 바로 국왕의 비서실이라는 기능이다. 즉 정조는 규장각을 도서관이자 비서실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정부 도서관이라면 홍문관이 있고 왕의 비서실이라면 승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 전통적인 기관들은 둘다 오랜 사대부(士大夫) 체제를 거치면서 왕의 직속기구라는 본래의 형질을 잃었고, 매너리즘에 빠져 그나마 제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정조(正祖)가 직접 밝힌 규장각의 설립 취지는 이렇다. ‘승정원과 홍문관은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바로잡을 수 없으니 내가 바라는 혁신 정치의 중추 기관으로서 규장각을 설립했다.’ 그는 규장각이 홍문관과 승정원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국왕 직속 정치 기구로서의 역할까지 맡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규장각을 운영할 경우 그가 즉위 초부터 구상한 문화 정치의 기치도 내세울 수 있으니 그로서는 일거양득이다정조(正祖)가 설정한 규장각의 이념은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의 두 가지다. 우문지치란 말뜻 그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정치(‘란 숭상한다는 뜻이다)이고, 작성지화란 인재를 키우겠다는 의도다. 따라서 겉으로 문화 정치를 표방하고 안으로 왕당파를 육성해서 참다운 왕도정치를 펼치겠다는 그의 꿈이 집약되어 있는 이념이다. 이보다 더 왕국화 작업의 취지를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거꾸로 말하면 그 이념은 그간의 사대부 정치가 문화 정치마저도 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과사전의 시대 르네상스를 벗어나 근대의 문턱에 접어들자 유럽인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학문적 작업은 신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문으로 세상만물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게 바로 백과사전이었다. 사진은 유럽과 동시대에 간행된 중국의 백과사전인 사고전서(四庫全書)(위쪽)고금도서집성(아래쪽)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당내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개가 웃을 일이듯이, 혁신을 꾀하는 규장각(奎章閣)이 그 내부 운영부터 혁신적이지 못하다면 말도 안 될 것이다. 과연 정조(正祖)는 우선 인사 행정부터 파격적으로 가져간다. 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이상 규장각에서는 검서관(檢書官)이 중요한 실무인력이다(상위 서열로는 제학과 직제학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원로로서 형식적으로 임명되었을 뿐 규장각의 실제 운영은 검서관들이 도맡았다). 정조(正祖)는 이 검서관직에 과감히 서얼 출신을 기용한다. 초대 검서관 네 명 중 이덕무(李德懋, 1741~93)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바로 서자의 신분이었다는 것은 정조가 의식적으로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실력 위주의 인사를 집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물론 단순히 서얼 출신을 기용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혁신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검서관들의 성향은 정조의 혁신 정치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덕무는 청나라에 서장관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서학을 익혔으며, 일반 학문은 물론 건축학, 식생학, 동물학, 곤충학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게 된 대표적인 실학자다. 또 박제가는 성리학의 한 덕목을 뜻하는 이름[齊家]과는 달리 청나라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을 펴낸 북학파의 젊은 대가다. 또한 서자 출신은 아니지만 또 다른 초대 검서관인 유득공(柳得恭, 1749~?)도 학자로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포함시켜 발해고(渤海考)를 쓴 북학파의 학자다.

 

이렇듯 북학파가 규장각(奎章閣)의 실권을 쥐고 혁신의 주체로 나섰다면 정치 분야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을 터이다. 하지만 조정은 영조(英祖) 시대부터 노론이 장악하고 있다. 비록 북학파 학자들 가운데는 홍대용이나 박지원(朴趾源)처럼 노론측의 인물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노론 중에서도 진보적인 소장파에 속했고, 노론의 중심 세력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물든 골수 성리학자이며 호시탐탐 당쟁의 기회를 노리는 낡은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유물이었다. 그렇다면 노론과 정조(正祖)의 관계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조의 개혁에서 타깃은 당연히 노론이다. 이제 정조의 실험은 막바지 고비에 이르렀다. 250년 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 세력과,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한시바삐 왕국을 복원하려는 정조의 대결은 그 실험의 성패를 가려줄 것이다.

 

 

규장각도와 현판 가운데 2층 건물 중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이 주합루이다. 서울 창덕궁의 비원에 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고 주합루는 일종의 열람실이었다. 뒤쪽으로 창덕궁의 뒷산인 응봉이 보인다.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반정의 예방조치

정조의 딜레마

미완성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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