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10부 왕정복고,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10부 왕정복고,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4:16
728x90
반응형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영조(英祖)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한 그가 출중한 재질과 뛰어난 학문, 강력한 카리스마 등 군주적 자질을 두루 지녔고 무척 오래 재위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왕권 강화와 조선의 왕국화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북아의 질서가 송두리째 변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황제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청나라에도 황제는 있다. 그것도 건륭제(乾隆帝, 1711~99)라는 뛰어난 황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는 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이 충심으로 사대했던 한족 황제는 아니다. 진정한 중화의 황제, 즉 천자는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조선의 국왕에게도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을 주었지만, 그동안 중국에 상위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왕권 견제의 수단으로 잘 써먹었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싫든 좋든 이제 부터는 조선의 국왕을 중화세계의 유일한 절대 권력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조(英祖)가 강력한 왕권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사실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참고로, 영조의 치세에 해당하는 18세기에 유럽 세계는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 시기 유럽 국가들의 정치 체제를 흔히 절대왕정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절대라는 수식어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동양식 전제 왕국과 비교한다면 절대왕정조차 별로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유럽의 왕국들은 중세 봉건 시대에 처음 등장하지만, 중세가 끝날 때까지 영토국가도 아니었고 왕권도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종교개혁 이후 영토국가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각국의 군주들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기에 전과는 다른 체제라는 의미에서 절대왕정이라 부른 것일 뿐이다. 그에 비해 동양식 왕국들은 고대부터 중국의 천자는 물론이고 주변국들의 왕들도 근대 유럽의 절대왕권을 능가하는 강력한 왕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그 유리한 변화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탕평책(蕩平策)을 관철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왕국의 문턱을 넘었다 싶은 순간 그는 그만 발을 빼버렸다. 과속을 겁낸 탓일까? 아니면 개혁 피로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이 탓일까? 그는 심지어 석연찮은 이유로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개혁의 완성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그가 미룬 숙제는 그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떠맡게 되었는데,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손자에게 출발점이나마 제대로 마련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사대부(士大夫)들의 책동에 휘말려 비명에 죽는 것을 목격한 경험은 정조(正祖)에게 처음부터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세자의 아들로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한 희한한 기록을 보유하게 된 정조는 마음 속에 깊숙이 가라앉은 앙금을 결코 씻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아버지를 해원(解寃)한다는 사적 과제와, 왕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적 임무가 결합되면서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번이 아마도 조선 역사상 마지막 체제 실험이 되리라는 것을 그도 예감했던 걸까?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조선은 완전한 왕국이 되어 격변하는 동북아의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될 테고, 실패한다면 조선은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제물이 되고 말 터이다.

 

즉위한 뒤 정조(正祖)가 맨처음으로 한 일은 아버지의 시호를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도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영조(英祖)가 내린 시호였으니 정조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장헌세자는 나중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정조가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는 것과 더불어 장조莊祖로 격상된다). 일단 이렇게 아버지의 원한을 어느 정도 달래고 나서 정조는 곧바로 왕당파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물론 이 발상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세조(世祖)도 그랬고, 광해군(光海君)도 그랬고, 영조(英祖)도 그랬다. 무릇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왕다운 왕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왕당파를 튼튼히 구축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록 발상에서는 같았어도 정조(正祖)가 구사한 수단은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었다. 세조, 광해군(光海君), 영조는 모두 기존의 사대부 세력 가운데 일부를 구워삶아서 왕당파로 삼았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들을 측근으로 부렸고, 광해군과 영조는 각각 대북과 노론의 당파를 여당으로 성립시켰다. 하지만 정조는 그들이 실패한 이유를 바로 그 점에서 찾는다. 기존의 세력을 왕당파로 만들면 잘 되어야 자기 대에만 유지될 뿐이고 못 되면 오히려 반정을 부르게 된다. 세조와 영조가 전자의 경우라면 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정조가 택한 방법은 새롭고 참신한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즉위하기도 전인 1776년에 그가 규장각(奎章閣)이라는 기구를 설치한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그는 1775년부터 영조(英祖)의 명으로 국정을 맡았다). 원래 규장이란 임금이 쓴 글을 뜻하는 말이니까 규장각도 새삼스러운 기구는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규장각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으며, 숙종(肅宗) 때도 환장각(煥章閣)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조(正祖)의 규장각은 다르다. 임금의 글씨나 그림을 보관한다는 기본 기능은 그대로 가져갔으나 규장각의 실제 기능은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야심찬 것이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문화의 탈을 쓴 정치기구였다.

 

 

우선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의 본연의 임무를 확대해서 도서관과 출판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개혁의 운을 뗀다. 세자 시절부터 수입하고 싶어했던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사고전서건륭제(乾隆帝) 때 이루어진 도서 집대성이다. 강희제고금도서집성편찬 작업을 이어받은 작업인데, 고금도서집성처럼 항목별로 분류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서적들을 모아 새로 교정하고 정서하고 지은이 소개까지 붙여서 총정리한 것이다. 무려 8만 권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청나라 조정에 반대하는 입장의 서적들은 내용을 자의적으로 첨삭하기도 하고 금서로 분류하기도 했으니 정치적 잣대가 상당히 반영된 총서라고 봐야겠다. 제목에서 사고(四庫)란 네 군데 서고를 가리키는데, 모두 네 질(민간 열람용까지 합치면 일곱 질)을 인쇄했던 탓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역시 동양에서의 서적이란 보급용이 아니라 보관용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를 비롯해서 각종 도서 수만 권을 보관하게 하는 한편, 활자의 주조에서부터 서적의 편찬과 간행에 이르기까지 출판의 총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나중의 일이지만 정조 자신의 저서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규장각에서 간행된다). 이 기능도 물론 중요하나 정조가 머릿속에 그리는 규장각의 참된 임무는 아니다. 규장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그는 드디어 애초부터 상정해왔던 과제를 규장각에 부여하는데, 그것은 바로 국왕의 비서실이라는 기능이다. 즉 정조는 규장각을 도서관이자 비서실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정부 도서관이라면 홍문관이 있고 왕의 비서실이라면 승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 전통적인 기관들은 둘다 오랜 사대부(士大夫) 체제를 거치면서 왕의 직속기구라는 본래의 형질을 잃었고, 매너리즘에 빠져 그나마 제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정조(正祖)가 직접 밝힌 규장각의 설립 취지는 이렇다. ‘승정원과 홍문관은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바로잡을 수 없으니 내가 바라는 혁신 정치의 중추 기관으로서 규장각을 설립했다.’ 그는 규장각이 홍문관과 승정원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국왕 직속 정치 기구로서의 역할까지 맡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규장각을 운영할 경우 그가 즉위 초부터 구상한 문화 정치의 기치도 내세울 수 있으니 그로서는 일거양득이다정조(正祖)가 설정한 규장각의 이념은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의 두 가지다. 우문지치란 말뜻 그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정치(‘란 숭상한다는 뜻이다)이고, 작성지화란 인재를 키우겠다는 의도다. 따라서 겉으로 문화 정치를 표방하고 안으로 왕당파를 육성해서 참다운 왕도정치를 펼치겠다는 그의 꿈이 집약되어 있는 이념이다. 이보다 더 왕국화 작업의 취지를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거꾸로 말하면 그 이념은 그간의 사대부 정치가 문화 정치마저도 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과사전의 시대 르네상스를 벗어나 근대의 문턱에 접어들자 유럽인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학문적 작업은 신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문으로 세상만물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게 바로 백과사전이었다. 사진은 유럽과 동시대에 간행된 중국의 백과사전인 사고전서(四庫全書)(위쪽)고금도서집성(아래쪽)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당내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개가 웃을 일이듯이, 혁신을 꾀하는 규장각(奎章閣)이 그 내부 운영부터 혁신적이지 못하다면 말도 안 될 것이다. 과연 정조(正祖)는 우선 인사 행정부터 파격적으로 가져간다. 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이상 규장각에서는 검서관(檢書官)이 중요한 실무인력이다(상위 서열로는 제학과 직제학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원로로서 형식적으로 임명되었을 뿐 규장각의 실제 운영은 검서관들이 도맡았다). 정조(正祖)는 이 검서관직에 과감히 서얼 출신을 기용한다. 초대 검서관 네 명 중 이덕무(李德懋, 1741~93)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바로 서자의 신분이었다는 것은 정조가 의식적으로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실력 위주의 인사를 집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물론 단순히 서얼 출신을 기용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혁신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검서관들의 성향은 정조의 혁신 정치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덕무는 청나라에 서장관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서학을 익혔으며, 일반 학문은 물론 건축학, 식생학, 동물학, 곤충학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게 된 대표적인 실학자다. 또 박제가는 성리학의 한 덕목을 뜻하는 이름[齊家]과는 달리 청나라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을 펴낸 북학파의 젊은 대가다. 또한 서자 출신은 아니지만 또 다른 초대 검서관인 유득공(柳得恭, 1749~?)도 학자로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포함시켜 발해고(渤海考)를 쓴 북학파의 학자다.

 

이렇듯 북학파가 규장각(奎章閣)의 실권을 쥐고 혁신의 주체로 나섰다면 정치 분야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을 터이다. 하지만 조정은 영조(英祖) 시대부터 노론이 장악하고 있다. 비록 북학파 학자들 가운데는 홍대용이나 박지원(朴趾源)처럼 노론측의 인물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노론 중에서도 진보적인 소장파에 속했고, 노론의 중심 세력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물든 골수 성리학자이며 호시탐탐 당쟁의 기회를 노리는 낡은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유물이었다. 그렇다면 노론과 정조(正祖)의 관계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조의 개혁에서 타깃은 당연히 노론이다. 이제 정조의 실험은 막바지 고비에 이르렀다. 250년 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 세력과,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한시바삐 왕국을 복원하려는 정조의 대결은 그 실험의 성패를 가려줄 것이다.

 

 

규장각도와 현판 가운데 2층 건물 중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이 주합루이다. 서울 창덕궁의 비원에 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고 주합루는 일종의 열람실이었다. 뒤쪽으로 창덕궁의 뒷산인 응봉이 보인다.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반정의 예방조치

 

 

정조의 즉위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은 정조가 세자로 책봉되자 그마저도 살해하려 했으며,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물론 그들은 그가 즉위한 다음에 있을 정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 정조를 구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은 홍국영(洪國榮, 1748~81)이라는 자였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중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입장에 따라 분열하는 것은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생리다. 장헌세자의 죽음을 두고도 노론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매파는 벽파(僻派)를 이루었고 그 사건을 안타까이 여기는 비둘기파는 시파(時派)로 분류되었는데, 시파에는 옛 소론과 남인의 세력까지 가세했다. 소수였기에 치우친 파’, 즉 벽파라고 불리게 된 노론 강경파지만 아직 영조(英祖)의 치하에서는 엄연한 여당이다. 따라서 1775년 정조가 영조(英祖)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정조(正祖)의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고 나선 인물은 홍인한(洪麟漢, 1722~76)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장헌세자의 장인(경의왕후의 친정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78)의 동생이니까 정조에게는 외종조부가 되는 자였다(하긴, 홍봉한도 사위의 죽음에 나몰라라 하다가 영조가 아들을 추존하는 것을 보고 그 분위기를 이용해서 잽싸게 사위의 반대파를 탄핵하고 나섰으니, 장헌세자는 처가 복도 어지간히 없었던 셈이다). 그는 정조(正祖)가 즉위할 경우 권신으로서 누렸던 자신의 권력이 위축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자기 외손주가 왕으로 즉위하는 것조차 반대했을 만큼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의 권력욕은 병적이었다. 그들이 채택한 전략은 전과 다름없다. 즉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와 똑같이 정조의 비행을 조작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똑같은 전략에 자신마저 당할 바보 아들은 없다. 더욱이 팔순에 접어든 영조는 자식에 이어 손주까지 죽일 마음이 없는 데다 달리 후사도 없었으니 벽파의 판단은 여러모로 어리석은 것이었다. 홍인한을 보스로 하는 홍상간(洪相簡, 1745~77), 정후겸(鄭厚謙, 1749~76) 등 모리배들의 책동이 노골화되자 정조(正祖)는 측근을 만들어 대처했는데, 그가 바로 홍국영이었다. 어차피 영조가 죽으면 정조의 치세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그 이듬해인 1776년에 벽파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선제 공격에 나서서 그들을 탄핵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 해에 영조가 죽었으니 그의 선택은 탁월했던 셈이다.

 

 

 

 

전자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지만 홍국영의 선택은 그의 삶을 4년만 좌우했다. 정조가 즉위한 뒤 비서실장에다 경호실장까지 도맡아서 권세를 누리던 그는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후사를 만들려 하다가 실패하자(그의 누이는 곧 죽었다) 계속해서 정조(正祖)의 조카를 누이의 양자로 삼으려 했다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고 만다. 누이를 죽인 범인이 정순왕후라고 판단한 그는 왕후를 독살하려 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실각했다. 홍국영의 집권은 장차 정조 사후에 등장하게 될 조선 사대부(士大夫) 정치의 최후이자 최악의 산물인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전조였으나,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일단 홍국영을 제거함으로써 정조는 완벽한 친정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홍국영이 대신해준 노론 강경파의 숙청은 그가 혁신 정치를 펼치기 위한 좋은 무대를 갖춰준 셈이 되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죽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야당이 되었을 뿐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는데도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전가의 보도처럼 간직하고 사대부가 지배하던 그때 그 시절의 영화를 꿈꾸며 가만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서얼 출신을 중앙 관직에 끌어들이는 정조는 기본적인 법도조차 모르는 무식한 왕이었고, 청나라에서 선진 문물을 줄기차게 도입하는 북학파 실학자들은 금수나 다름 없는 자들이었으며(인물성이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소장파 노론은 일부 철없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700년 전 송나라의 주희(朱熹)처럼, 오랑캐 세상은 본질적으로 기()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잠시 판치다가 결국에는 이()에 입각한 중화 세상으로 돌아오는 게 순리이자 천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1800년 전 나날이 치솟는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로마를 제국화하려는 카이사르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로마 원로원의 시선이 바로 그들의 눈초리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실험자 아버지의 해원이라는 숙제와 사대부(士大夫) 체제에 대한 적대감은 왕정복고를 꾀하는 정조(正祖)에게 원동력인 동시에 걸림돌이었다. 처음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성리학적 세계관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감한 개방과 개혁을 시도했다가 나중에는 복고로 돌아서서 오랜만의 왕정복고를 결국 실패로 만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정조(正祖)도 뒤통수에 꽂히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몰랐을 리 없다. 아마 그도 익히 알고 있었겠지만, 사대부(士大夫)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 가장 우려할 사태는 단 한 가지, 반정(反正)뿐이다. 왕이 허수아비일 때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그 경우 그들이 구사하는 수단은 언제나 말만의 역모. 수많은 당쟁에서 보았듯이 한 편이 다른 편을 역모로 엮어 왕의 이름을 빌려 처벌하는 식이다. 그러나 왕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 중 이인좌의 난은 실패한 반란으로 끝났고 나머지 두 차례는 각각 중종반정(中宗反正)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사대부가 승리한 경우였다. 따라서 정조(正祖)가 대비할 것은 반정의 예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1785년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壯勇衛)라 불렀다. 규장각(奎章閣)과 마찬가지로 장용위도 일찍이 세조가 처음 설치한 군대였으니, 여기서도 정조가 세조(世祖)를 왕다운 왕으로 여기고 자신의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세조(世祖)가 처음 설치할 때의 이름은 장용대(壯勇隊)였다. 이 장용대의 병사들은 무술에 능한 천인들로만 뽑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오늘날 유사시에 적진 깊숙이 파견되는 특수 부대도 전과자들처럼 일반 군대에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하듯이, 장용대 역시 국왕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목숨을 걸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도 신분도 없는 결사특공대인 셈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世祖)였기에 반대파의 책동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렇듯 강력한 친위대가 필요했을 터이다. 성종 때 이름이 장용위로 바뀌면서 양인들도 포함시키게 되는데, 곧이어 조선이 사대부 체제로 바뀌면서 이 군대는 존재의 의미를 잃고 유명무실해졌다.

 

1793년 그는 장용위를 확대 개편해서 장용영(壯勇營)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그가 이 시점에서 갑자기 군대를 신설한 이유는 뭘까? 그것도 하필 친위대를, 비중화세계의 도전이 거세었던 16세기 이전이라면 몰라도, 또 비록 허망한 환상이나마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획책하던 무렵이라면 몰라도 이제 조선에서는 군대의 필요성이 사실상 없어졌다. 동북아가 비중화세계로 바뀌면서 해안을 주름잡던 왜구도, 북방을 괴롭히던 여진족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중화세계가 중심이었을 때 왜구와 여진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으나 이제는 문명의 수준이 역전되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설사 군대가 필요하다 해도 국방용이 아닌 친위대를 굳이 신설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정조(正祖)가 장용영을 설치한 의도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반란, 좁게 말하면 노론 벽파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조선 역사상 세 번째의 반정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다.

 

그러나 장용영의 기능은 그것만이 아니다.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내영은 설립 취지에 걸맞게 도성을 수비하는 군대니까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외영의 임무는 아주 색다르다. 이 군대는 엉뚱하게도 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왜 느닷없이 수원일까? 일단 장헌세자의 능이 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정조(正祖)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융릉隆陵)의 방비를 외영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효자라고 해도 친위대의 절반을 할당하면서까지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게 한다는 게 과연 이치에 맞는 발상일까?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정조(正祖)가 수원에 보인 애착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우선 그는 그 전까지 수원부(水原府)로 불리던 이곳을 부사(府使)가 관장하는 곳에서 유수(留守)가 관장하는 곳으로 승격시키고 화성(華城)으로 개칭했다(오늘날로 치면 광역시로 격상된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성(지금은 이 성을 화성華城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축조하고 네 개의 대문을 만드는가 하면 여기에 각종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해서 완벽한 신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794년부터 2년이 넘게 걸린 이 대형 토목공사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기술자가 동원되었고 100만 냥에 가까운 돈과 1500석의 양곡이 소요되었다. 10년치의 국방 예산을 앞당겨 쓰면서까지 그가 화성의 축조를 서두른 이유는 뭘까? 수원의 4대문에 서울의 4대문에도 없는 삼엄한 방어 시설까지 갖춘 이유는 뭘까?

 

일단 추측할 수 있는 해답은 혹시 정조(正祖)가 수원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도읍을 옮긴 경우는 한 차례도 없을뿐더러 천도의 계획조차 반란 세력이라면 몰라도 국왕이 구상한 적은 없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정조가 종묘 사직을 버리고 수원 천도를 결행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수원에 정성을 들인 이유는 한 가지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바로 대피처의 기능이다. 반정을 걱정한 그는 만약 노론 벽파가 실력 행사에 나설 경우, 그리고 그들의 거사가 성공해서 한양을 빼앗겼을 경우 화성으로 대피할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일부를 화성의 수비 병력에 할당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능을 지킨다는 것은 명분이었으리라.

 

 

또 하나의 도성 정조가 축성한 화성의 모습이다. 한양의 도성에도 없는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정조는 아마 자신의 개혁에 대한 반발로 내란이 벌어질 경우 대피처이자 임시 수도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외영을 그곳에 주둔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리라. 화성의 설계는 정약용이 주도했다.

 

 

정조의 딜레마

 

 

규장각(奎章閣)을 정치 개혁의 실무자로 삼고, 실학자들에게는 전반적인 사회 개혁에 필요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한다.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보수파의 반동에 대해서는 장용영(壯勇營)을 물리력으로 구축하고, 화성을 미연의 사태에 대비하는 대피처로 삼는다. 정조(正祖)의 이런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대박이 터지려면 좋은 시나리오에 감독의 능력과 의지가 보태져야만 한다. 개혁 드라마의 모든 일을 도맡은 정조는 기획, 제작, 시나리오 작업까지 완벽하게 진행했으나 마지막 감독의 단계에서 무너진다. 조선의 마지막 실험이 실패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다. 공교롭게도 그 단초는 그리스도교가 제공했다.

 

이수광(李睟光)소현세자가 서양의 이 새로운 종교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이래 그리스도교는 학문적으로만 연구되었을 뿐 신앙으로서 믿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조(英祖) 시대와는 달리 북학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장려되는 정조의 치세에서는 점차 그리스도교를 종교로서 대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한반도 최초의 정식 그리스도교도가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1783년에 서장관으로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가서 프랑스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성서와 십자가, 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한다. 강력한 포교 종교를 믿게 되었으니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단연 포교다. 그에게서 감화를 입고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이벽(李檗, 1754~86), 그리고 정씨 삼형제 -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이 속속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한다. 물론 조선 정부에서는 아무리 북학을 배우는 것을 장려한다 해도 그리스도교마저 허용할 의지는 전혀 없다. 따라서 교도가 늘어날수록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마침내 충돌의 계기가 생겨났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持忠)이라는 선비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게 그것이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대신들은 공서파(功西派)와 신서파(信西派)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게 된다. ‘공서란 서학을 공격하자는 것이니 당연히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세력이고, 신서파는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묵인하자는 세력이다. 누가 이길까? 아무리 북학의 바람이 거세다지만 천 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그리스도교가 인정될 수는 없다. 따라서 당연히 공서파의 승리여야겠지만 결과는 무승부다. 다시 당쟁이 재연될 것을 우려한 정조(正祖)가 상대적으로 열세인 신서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무승부를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 안에서의 승부는 그랬어도 밖에서는 그럴 수 없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독한 윤지충은 처형을 당함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승훈은 관직이 박탈된 뒤 신앙을 버리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물론 이승훈이 진정으로 배교(背敎)한 것은 아니다. 그의 세례명은 베드로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던 실제의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신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첫 번째는 1785년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관헌에 적발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1790년에 베이징 주교가 조상 제사를 하지 말라고 명했을 때 그에 대한 반발로 배교했으며, 세 번째가 이번 진산 사건 때다. 이후 그는 다시 종교 활동을 하다가 결국 1801년에 순교한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인데, 진산에서 비롯되었기에 진산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대형사고를 면하고 사태는 그럭저럭 마무리되었으나 이 사건을 대하는 정조(正祖)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그리스도교마저 용인할 수는 없다(사실 그리스도교야말로 서학 중의 서학이었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학에 상당 부분 의지하는 그의 개혁론은 처음부터 모순이었던 셈이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학 이념에 기초한 왕국이지 당시 유럽에 즐비한 서학 왕국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개혁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교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고심하던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개혁의 대세였던 북학을 위축시키고 육경학을 권장하는 방법이다.

 

성리학은 왕권보다 신권을 강조하고, 서학은 국가의 정체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개혁의 목표인 올바른 유교왕국을 건설하려면 성리학과 서학을 모두 배척할 수밖에 없다. 마침 성리학은 야당으로 물러앉았으니 이제 서학만 다스리면 된다. 1794년에 정조(正祖)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얄궂은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그런 의도에서다. 문체반정이라면 문체를 바로잡자는 뜻일 텐데, 갑자기 무슨 학술 운동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북학의 분위기에서 당시 베스트셀러로서 널리 읽혔던 책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었다. 이 책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박지원(朴趾源)이 베이징에서 보고 접한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기행문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동감 있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어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내용으로도 북학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문체반정의 주요 타깃이 된 것은 바로 이 책이다. 단지 북학을 소개한다는 내용을 문제삼을 수는 없으므로 정조는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하다는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압력을 못 견딘 박지원은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고, 규장각(奎章閣)의 실세이자 개혁의 주체였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도 문체의 문제점이 적발되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는 저속한 문체를 쓰는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조정 대신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으면 승진을 시키지 않겠노라고 을러댔다. 나아가 그는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패관(稗官)류의 잡서들에 대해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말뜻 그대로 보면 패관이란 정식 관리(학자)가 아닌 자를 뜻하는데, 이 말은 중국 고대 한나라의 역사가인 반고(班固, 32~92)가 처음 쓴 용어다. 그는 정식 학자가 아닌 사람이 멋대로 글을 짓거나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를 경멸했다. 그는 소설류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패관이 지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전통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20세기 전반기까지도 시만이 문학으로 인정되고 소설은 언제나 잡글로 취급되었다. 패관문학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국문학자 김태준이 쓴 조선문학사에서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의 문집들, 이를테면 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이나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등을 패관문학으로 꼽았다. 그렇게 보수적인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김태준이 공산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점은 의외다. 물론 진짜 의도는 더 이상 청나라의 북학 관련 문헌들을 수입하지 않겠다는 데 있다.

 

사실 그동안 북학이 용인되어 왔던 이유는 학문적으로 정조(正祖)의 성향이 노론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 먼 탓도 있었다. 하긴, 왕권을 강화해서 새 왕국을 건설하려는 왕이 중국의 천자 아래 모든 사대부(士大夫)들이 같은 지위라고 주장하는 성리학을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성리학을 멀리 한다고 해서 유학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정조가 좋아할 만한 유학의 갈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유학, 즉 육경학인데, 이것은 왕권을 신권보다 우위에 두는 사상일 뿐 아니라 당파적으로는 남인의 이데올로기다. 결국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꾀한 것은 육경학의 학풍으로 되돌아가고 남인을 끌어들여 노론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이는 노론의 준동을 예방한다는 장용영(壯勇營)의 취지와도 부합된다).

 

과연 북학파의 저속한 문체를 바로잡게 한 뒤 정조(正祖)순정고문(醇正古文), 즉 옛날의 순수한 한문체를 널리 확산시키라는 명을 규장각(奎章閣)에 내린다. 물론 단순한 문체의 보수화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실학을 포기하는 순간이며, 정치적으로는 개혁의 총기획자가 복고로 선회하는 순간이다.

 

 

최초의 성서 1900년에 간행된 한반도 최초의 신약성서. 그리스도교는 정조(正祖)의 시대에 처음 들어왔고 정약종 등에 의해 성서의 일부가 번역되었으나 당시까지는 4대 복음서밖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천주실의와 복음서만으로 새 종교가 뿌리를 내린 셈이니, 이미 조선에 기복신앙이 만연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미완성 교향곡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개혁 의지에 충만했던 정조(正祖)는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출중한 군주였다. 비록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그에게 내내 심적ㆍ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탓에 다소 불안정한 행마를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가 설정한 왕국 건설의 목표는 옳았고, 그것을 위해 그가 추진한 여러 개혁도 대체로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에 느닷없이 수구적인 자세로 돌아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英祖)와 닮은꼴이다. 조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북학을 갑자기 거부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기묘한 조치를 들고 나와 복고주의로 역행한 이유는 뭘까? 영조처럼 과속을 겁낸 탓일까? 개혁피로감일까?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퍼지는게 그토록 두려웠을까?

 

그런 이유들도 나름대로 일부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겠지만, 그보다는 바깥에서 원인을 찾아야할 듯싶다. 순전히 내부 요인만으로 정조(正祖)가 입장을 선회했다면 그 시점이 하필 1790년대 초반이라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전까지 한창 앞으로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뒤로 돌아선 데는 아마도 바깥, 즉 동북아의 정세 변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청나라는 건륭제(乾隆帝) 치세에서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강희제 시대부터 이어져온 동북아 르네상스가 정점에 달한 것도 그 시대였으며, 서쪽의 신장(新疆)과 시짱(西藏)까지 정복해서 오늘날 중국 영토가 조성된 것도 그 시대였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 법, 오랜 세월 번영을 구가하던 청나라는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건륭제 치세의 후반기(즉 정조正祖의 치세). 우선 인구가 지나치게 늘었고(1700년에 2천만이던 인구가 100년 뒤에는 무려 3억으로 늘었는데, 이는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조치와 대외 정복의 성과 덕분이다), 개국 초기 소수 만주족이 다수 한족을 지배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각종 제도가 무력해졌다(그 예가 만주족 고유의 군제인 팔기제의 붕괴다). 그에 따라 탐관오리가 늘어나고 온갖 부패가 사회를 얼룩지게 만들면서 청나라는 서서히 썩어갔다이런 공직자 부패 현상은 동양식 왕조의 생리이기도 한데,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제도가 청나라의 옹정제 때 시행된 양렴은제(養廉銀制). 지방관리들이 조세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농민들로부터 삥땅을 치는 행위가 만연하자 옹정제는 아예 미리 삥땅분을 관리들에게 수당으로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그 수당이 바로 양렴은이다. ‘청렴을 배양하는 돈이라는 뜻이므로 얼핏 보면 좋은 취지인 듯 하지만 실은 관리들의 불법ㆍ탈법적인 수탈 행위를 도저히 근절할 수 없었던 탓에 인정한 제도였으니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다. 그래서 건륭제의 치세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반란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 해도 외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그런 대로 존속했을 것이다. 만약 더 이상 제국이 견디지 못할 정도에 이른다면 필경 다른 제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게 중국식 제국의 일반적인 진화 과정이다. 그런데 당시는 유럽 열강이 일제히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특히 인도를 정복한 영국은 모직물 수출이 여의치 않자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해서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내외의 우환에 시달리면서 늙은 공룡이 되어간다. 이것이 바로 18세기 말 건륭제(乾隆帝) 치세 말기 중국의 사정이다.

 

정조(正祖)가 본받을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둘이다. 하나는 역사적 인물로 300년 전 조선의 왕인 세조(世祖)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의 인물인 청나라의 건륭제. 그럴 정도로 청나라를 추종하고 있었으니 청나라가 급전직하로 몰락의 기운을 보이자 정조는 내심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더욱이 청나라에 파견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서양의 침략을 안내하는 앞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것은 사실이었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인식이 달라진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정조가 개혁을 중단한 데는 필경 그러한 동북아 정세 변화, 청나라의 약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正祖)의 실험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예고된 결과였다고 봐야 할까?

 

사실 정조는 조선의 여느 임금들과는 달리 상당히 자주적인 면모를 보인 군주다. 그는 비록 청나라를 선진국으로 여기고 그 문물을 받아 들이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이적에게서도 배울 게 있다는 논리의 연장이었지 과거처럼 중국에 사대주의로 일관한 태도는 아니었다. 진경산수화로 대표되는 국화풍(國畵風)과 동국진체(東國眞體)로 대표되는 국서풍(國書風)을 널리 확산시킨 것이나, 1782년에 새로운 역법인 천세력(千歲曆, 나중에 만세력이 된다)을 제정한 것에서 그런 자주성을 읽을 수 있다(물론 그 바탕에 소중화 이념이 있음은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게다가 정조(正祖)는 문화군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직접 주도할 만큼 해박한 문장 지식도 그렇거니와 그 자신이 그림을 즐겨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수묵화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실험에 실패함으로써 조선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그의 개혁 의지가 끝까지 지속되었더라면, 그의 왕국 실험이 성공했더라면 곧이어 다가올 황폐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18006월 그가 병에 걸려 죽으면서 조선의 실험은 완전히 끝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아마 자신의 사후에 벌어지는 사태를 그가 미리 알았더라면 마흔여덟의 한창 나이에 죽는 것을 아쉬워했을지도 모르나, 사실 1794년 복고로 도는 순간부터 그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난 셈이었다.

 

 

문화군주의 풍모 다방면의 개혁을 선도한 군주라면 팔방미인일 것이다. 과연 정조는 시ㆍ서ㆍ화에 두루 능한 문화군주였다. 위 그림은 정조가 직접 그린 국화(위쪽)와 파초(아래쪽). 썩 잘된 작품 같지는 않지만, 비단이 아니라 종이에 그린 것으로 미루어보면 습작이었던 듯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