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건방진방랑자 2021. 6. 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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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且女獨不聞耶?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於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1. 구성된 마음[成心] 또는 선입견의 의미

 

 

1. 성심이 초자아가 될 때의 위험성

 

 

발제 원문의 함의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구성된 마음으로 번역되는 성심(成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연구자들은 성심을 선입견이나 편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심과 관련된 장자의 진단은 이렇게 간단히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장자가 일체의 모든 성심을 부정하였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관점이나 입장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장자가 성심을 문제삼고 있는 이유는 성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성심이 모든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 즉 초자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규칙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한마디로 우리는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구성된 마음으로서의 성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김치를 먹고, 마늘을 먹고, 한국어를 쓰며,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심의 작용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미국이라는 다른 공동체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우리가 어느 평화로운 날 중산층 가정의 정원에서 아버지의 머리를 툭툭 치는 미국 어린이를 보았다고 하자. 이것은 미국이라는 공동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아이를 무례하고 잘못 자란 놈이라고 평가하며 분개할 수 있다. 우리의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성심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서 사태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공동체에 태어나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내면화된 성심은 그 공동체에서 살 때에는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공경하고, 또 아주 자연스럽게 김치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공동체에 가거나 혹은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과 만나게 되었을 경우에 발생한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성심을 특정한 공동체의 흔적이라고 자각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성심을 초자아로 삼아 타자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경우다. 전자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지만, 후자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만약 타자가 나보다 약하다면 나는 타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길 것이고, 타자가 나보다 강하다면 나는 결국 타자에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송나라의 삶의 문맥을 가지고 월나라에 간 사내

 

 

논의의 편의상 먼저 소요유편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읽어보자.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章甫)’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宋人資章甫而適越, 越人斷髮文身, 無所用之].” 이 송나라 사람이 살았던 삶의 문맥을 송이라고 하고, 그가 모자를 팔려고 갔지만 모자를 쓸 필요가 없었던 월나라의 삶의 문맥을 월이라고 해보자. 삶의 문맥이 지닌 구체성과 고유성은 우리의 삶이 몸을 통해 타자의 삶과 얽히게 되는 데서 기인한다. 특정 삶의 문맥 송에서 살았던 이 인물이 다른 삶의 문맥 월로 장사하러 가게 된 메카니즘을 재구성해 보자.

 

우선 이 인물은 자신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成心]을 가지고 월이라는 삶의 문맥의 구체성을 보지 않고, 월의 구체적 삶의 문맥을 마치 송의 구체적 삶의 문맥의 연장인 것처럼 사유하였기에, 월이라는 삶의 문맥으로 장사하러 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성심을 통해 구성된 월은 이 인물에게는 송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결국 이 사람은 송을 통해 월을 외삽(外揷: extrapolation)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송나라 사람이 월이라는 구체적 삶의 문맥으로 몸을 이끌고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는 성심에 의해 구성된 월과 직접 삶으로 얽히게 된 월과의 현격한 차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태는 바로 특정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의 제한성을 자각하는 지점으로 이 인물을 이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기존의 송이라는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이 인물의 구성된 마음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장자는 이런 자연스런 사태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문제 삼는 논점은 다음과 같다. 이 인물이 계속 특정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보편적인 척도 또는 기준으로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인물의 삶은 아마도 다른 특정한 삶의 문맥과 긴장 관계에 놓일 것이고, 이런 긴장 관계는 그에게 삶과 인식의 긴장 관계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재 자신의 삶이 다른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인식은 사실상 자신의 삶이 한때 깃들었고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구성된 마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 경우에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 송나라 사람도 월나라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구성된 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유용하다고 생각한 모자가 이 월나라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구성된 마음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3. 다시 구성되는 주체

 

 

보통 우리는 선입견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선입견이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선입견의 불가피성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없다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러브스토리라는 영화를 보아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선입견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선이해이자 선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송나라 사람도 만약 이런 선입견이 없었다면 월나라로 장사하러 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철학적 해석학의 대표주자인 가다머(Gadamer)와 같은 사람은 선입견을 철학적으로 긍정했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에 따르면 선입견은 구체적인 현재의 판단에 앞서서 선행하는 의식, 무의식적인 전제들 일반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선입견에 의해 이루어진 이해 내용은 인간의 인식ㆍ판단ㆍ행동의 근본적인 지평(horizon)을 형성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유명한 가다머의 지평 융합이라는 개념도 바로 이런 선입견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첫사랑에 실패한 어떤 남자의 예를 들어보자. 그가 사랑하던 여성은 그에게 너무나 냉정했고 도도했으며 한 번도 진지하게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그 여성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그는 무척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쳐갔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성의 절교 선언을 무기력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 실연한 남자에게는 여성과 사랑에 대한 선입견과 지평이 남게 되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 이 남자에게 또 다시 사랑하는 여성이 생겼다. 이 남자는 과거에 발생한 선입견을 가지고 이 새로운 여성을 만날 수밖에 없다. 새로 만나게 된 이 여성은 이전의 여성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녀는 활기차고 정이 많으며 속내를 솔직하게 밝히는 밝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랑에 빠지면서 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 번째 우선 새로운 지평은 이전의 지평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냥 아무 뜻 없이 그녀가 말수가 적어진 것을 보고 그는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의심이 가능한 것은 과거에 형성된 그의 선입견 때문이다. 두 번째 이전의 지평은 새로운 지평과 융합되고 수정될 것이다. 새로 만난 그녀를 통해서 그의 선입견이 지닌 일면성과 특수성은 수정될 것이고 새로운 지평으로 통합되고 포섭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된 선입견은 장자의 성심(成心)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그러나 장자는 성심을 긍정적인 이해 지평으로 독해하지는 않는다. 가다머에 따르면 선입견은 새로운 선입견과 지평 융합되면서 수정되고 보완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에게 이전의 성심은 새로운 삶의 사태 속에서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유된다. 가다머에 따르면 새롭게 융합된 지평은 아무리 새롭다고 해도 과거의 지평이 핵심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거의 지평이나 선입견은 부단히 새로운 지평과의 융합을 통해서 성장해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가다머의 낙관주의가 있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이미 구성된 성심과 앞으로 만날 타자에 맞게 구성되어야 할 성심 사이에는 인식론적인 단절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성심을 구성되게 만든 타자와 앞으로 구성될 성심을 구성하게 만들 타자는 전적으로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지평(= 선입견)을 수정해서 보완해야 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을 주체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는 새롭게 만날 타자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의 성심을 철저하게 폐기해야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타자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연속성은 새롭게 만날 타자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구성된 마음[成心]의 철학적 함축

 

 

1. 성심이 있기에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한다

 

 

이제 성심에 대한 장자의 진단을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제물론(齊物論)편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저 구성된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만이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들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 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爲有.

 

 

구성된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말은 이것을 초자아로 내면화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만난 타자는 하나의 외면으로 관조되고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의 몸은 이미 새로운 삶의 문맥에 진입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착된 자의식은 이런 새로운 삶의 문맥의 도래가 주는 자명한 긴장을 미봉하려고 한다. 결국 고착된 자의식은 기존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을 미리 결정하고 예기(豫期)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고착된 자의식은 새로운 삶을 직시하기보다는 기존의 삶의 문맥에서 이루어진 성심을 내면으로 정립하여 이 새로운 삶을, 이 새로운 삶의 문맥을 외면으로 관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성심을 스승 삼는다[師成心]’고 지적할 때의 스승 삼다, 또는 절대적 기준으로

삼다[]’로 말하려는 것이다. 장자에게 성심을 스승 삼다라는 것은 과거의 특정한 삶의 문맥에 기인한 성심을 인식 내면 혹은 인식 주체로 전화시키는 고착된 자의식의 일반적 운동에 대한 지적이다. 결국 성심이 없다면 고착된 자의식은 불가능해지고,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심이 작동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 구성된 마음[成心]을 장자가 부정하지 않은 이유

 

 

장자에 따르면 몸을 가지고 사는 우리 인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며, 또 그 문맥과의 소통에 근거하는 구성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완성된 사람[至人]이나 평범한 사람[愚人]이나 모두 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나 맑은 거울이나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듯이 말이다. 단지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허심(虛心)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독특할 뿐이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의 마음 상태를 거울에 비유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거울은 물과 함께 이상적인 마음 상태를 상징하는 비유로 쓰여 왔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여기서 거울은 지금 자신이 비추고 있는 상을 절대적인 상으로 여기고 있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다시 말해 거울은 A와 조우하면 A의 상을 갖게 되고, B와 조우하면 B의 상을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된 사람도 A와 조우하면 A와 어울리는 의식 A를 임시적으로 구성하고, B와 조우하면 의식 A를 비우고[] 의식 B를 임시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반면 일상인들이나 사변적 지식인들은 A와 조우해서 생긴 의식 A를 새롭게 B와 조우할 때도 보편적인 기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자의식이 고착된 이유는 자신들의 자의식이 특정한 타자와 조우함으로써 구성된 과거의식에 의존해서 추리하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결국 그들은 현재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과거에 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완성된 사람은 조우한 타자의 타자성에 근거해서 역동적이고 임시적으로 자신의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이 점에서 그의 자의식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라는 성격을 부여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미래에 상이한 타자와 조우하게 된다면, 그는 그 타자에 따라 자신의 자의식을 다시 새롭게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완성된 사람[至人]은 삶에 있어서나 사유에 있어서 모두 현재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위 인용문 마지막 구절 즉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 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 터무니없는 이야기다라는 구절을 새롭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대두하면 특정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成心]이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되고 있다[未成乎心而有是非, () 是以無有爲有].”는 주장을 함축하지만, “구성된 마음이 곧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다라는 주장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물론 성심이 문제되는 맥락이 항상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출현하는 데 있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구성된 마음=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是非之心]’이라고 보는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그러나 장자 철학의 핵심 문제 설정이 유한한 삶이 무한한 사변적 인식을 따르는 위기상황에 있었다면, 그리고 장자가 삶을 옹호하는[養生達生] 철학자라는 것을 기억해 둔다면, 장자가 어떤 특정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成心]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밖에 없다.

 

 

 

 

 

3.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장자가 문제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자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성심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존립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심은 된 자의식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지만,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도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의식에는 고착된 자의식과 아울러 임시적 자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결코 임시적 자의식과 관련된 성심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겠지만, 허심(虛心, 비인칭적인 마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장자에 따르면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成心]은 현재 내 삶이 깃들어 있는 새로운 삶의 문맥과의 충돌과 긴장을 통해서 나에게 드러난다. 즉 성심에 대한 경험은 새로운 삶의 문맥의 도래에서 오는 부득이(不得己)의 느낌과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득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결국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 조우하는 사태를 의미한다. 이런 부득이의 경험은 기존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편안함[]의 좌절을 경험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새롭게 체험된 부득이의 경험은, 사실상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의 일치감[成心]을 전해야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탁월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장자는 바로 이런 부득이의 경험에서 사변적 인식의 탄생을 엿보고 있다. 기존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이 새로운 삶의 문맥의 도래로 인해 의식되는 지점, 즉 기존의 삶의 문맥과 도래한 삶의 문맥이 마주치는 그 경계선상에서, 그 부득이의 분위기 속에서 인식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식은 이런 부득이의 긴장을 내외 분리를 통해 미봉하려고 한다. 새롭게 도래한 삶의 문맥을 저것[, ] 혹은 외면으로, 이전의 삶의 문맥에서 이루어진 성심을 이것[] 혹은 내면으로 삼는 것과 동시적으로 인식은 탄생한다. 동시에 이렇게 인식의 탄생을 통해 성심은 내면으로, 혹은 고착된 자의식의 근거로 전환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인식이 성심을 고착된 자의식의 근거로 전환시키고, 새로운 삶의 문맥을 외면으로 전환시킨다고 하여도, 우리의 삶은 이미 새로운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의 마음은 이미 새로운 삶과 소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득이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1.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여기서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표현과 임시적 자의식이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의 비유를 통해서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유동적인 물이 있다고 하자. 이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드러나고, 세모난 그릇에 담기면 세모나게 드러난다. 여기서 유동적인 물 자체가 비인칭적인 마음[虛心]을 상징한다면, 상이한 그릇을 만나서 규정된 모양을 띠는 세모난 물과 네모난 물 등은 임시적 자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세모난 그릇에 담긴 물이 얼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릇으로부터 이 세모난 얼음을 빼어내도 이 얼음은 세모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세모난 얼음은 고착된 자의식을 상징한다. 이 세모난 얼음은 세모남을 자기의 동일성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이 세모남은 자신의 동일성이 아니라 과거 소통의 흔적이 고착된 결과일 뿐이다. 이 비유가 지닌 실천적 함축은 이 세모난 얼음이 네모난 그릇을 만났을 때, 이 얼음은 그릇과 결코 소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결과는 세모난 얼음이 깨지든가 아니면 네모난 그릇이 부서지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장자에게는 두 종류의 자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첫째가 그가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 제거하려고 했던 과거의식을 자의식의 기준으로 집착하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면, 둘째는 인간이 사회에서 산다는 불가피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임시적 자의식이다. 임시적 자의식은 구체적인 사태마다 구성되는 자의식이다.

 

고착된 자의식이 모든 사태들에 대해 과거의식의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장자가 권고하는 임시적 자의식은 새로운 타자가 도래할 때마다 그 타자와 소통하면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임시적 자의식의 이런 임시성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유동적인 마음, 즉 허심(虛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착된 자의식이 타자의 타자성을 배척하는 경향으로 작동한다면, 임시적 자의식은 타자의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경향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시적 자의식의 임시성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복수성(plurality)과 다양성(diversity)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예민한 독자는 어떤 종류의 자의식이든지 그것이 자의식이라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기의식, 즉 자신에 대한 의식이라는 점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는 임시적 자의식도 기본적으로는 고착된 자의식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냐고 문제삼을 수 있다.

 

이것은 옳은 질문이며,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중요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런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서, 즉 임시적 자의식의 고유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타자를 도입해야만 한다. 임시적 자의식이 지니고 있는 임시성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타자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이런 타자성에 입각해서만 자기의식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는 점이 바로 임시적 자의식이 고착된 자의식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반면 고착된 자의식은 기본적으로 타자가 지닌 고유성과 단독성을 부정하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다.

 

아울러 고착된 자의식이 임시적 자의식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특정한 타자와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형성된 임시적 자의식이 새로운 타자와 만날 경우, 이 임시적 자의식이 새로운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하기 위해서 비워지지 않고 그 타자를 평가하고 관조하는 기준으로 쓰일 때, 이 임시적 자의식은 고착된 자의식으로 전환된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착된 자의식이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는 매번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하고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는 존재다. 어떤 여자를 만나서 혹은 어떤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고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기 마련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타자에게로 열려 있는 존재이고,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만들어져 가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전혀 예기치 못한 타자나 사건들과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타자와의 소통에서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우리는 변해갈 것이다.

 

장자가 부정하지 않은 자의식 장자가 부정한 자의식
임시적 자의식 고착된 자의식
타자성에 입각해서만 자기의식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는 점 타자가 지닌 고유성과 단독성을 부정함
타자를 평가하고 관조하는 기준으로 쓰일 때 언제든 임시적 자의식 고착된 자의식이 됨

 

 

 

 

 

2.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자가 권고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대화와 토론, 그리고 그 결과로 달성되는 동의와 일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소통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역량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활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은 이미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지는 소통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단지 서구적 이성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의 논의에는 사전에 이미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독창적인 예술가들, 어린아이들, 환자들, 새들, 꽃들, 나아가 새로 태어날 인간들이 배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게는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이라는 합의와 동의 절차가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합리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선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와 타자 사이에 서로 합리성에 대한 내포와 외연이 다르다면,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소통 자체는 애초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한두 가지 생각해보자. 우선 한국어를 쓰는 내가 영어를 쓰는 미국으로 갔다고 해보자. 이럴 때 나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장 공통적인 행동양식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것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언어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워야만 한다. 외국에 나간 나이든 사람과 어린아이 중 왜 어린아이가 외국어를 빨리 배우는가? 그것은 자신의 모국에서 형성된 선이해, 혹은 이해 지평을 제거하는 데 어린아이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에 나갈 때 이미 형성된 선이해라는 지평이나 매개는 소통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수영을 배울 때, 수영 교본을 여러 권 숙지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수영을 어린아이보다 잘 배울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영을 배울 때, 즉 물과 소통을 할 때, 수영 교본은 이 사람의 수영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오히려 물과의 소통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반면 어린아이는 직접 물에 뛰어들어 자신을 물의 운동과 흐름에 맞추어 조절한다. 물과 소통한다는 것은 내가 물 속에서 수영한다는 것이지, 수영 교본이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최초의 수영 교본도 누군가가 물과 소통한 이후에 쓴 것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이런 무매개적이라는 성질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소통은 이름뿐인 소통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수영을 잘 한다고 해서 우리가 물과 합일되었거나 일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무매개적 소통은 나와 타자의 합일이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생성의 긍정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가 전제되어야 소통의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 또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의 자기 동일성 혹은 선이해라는 매개의 지평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처럼 진정한 소통(= 무매개적 소통), 주체가 일종의 자기 해체를 통해 타자로 향하는 자기 조절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자기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외국어를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성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항상 타자와의 무매개적 소통을 전제로 영위되는 법이고, 오직 이런 무매개적 소통을 통해서만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인식론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삶이 이루어지는 실존적 사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지금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는 전혀 예기치 못한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함으로써 전혀 예기치 못한 우리로 생성될 것이다. 결국 소통의 긍정은 공존과 공생의 긍정과 연결되고, 비움[]으로 상징되는 깨어남[]은 이런 본래적 존재 양식으로의 복귀라는 의미를 갖는다.

 

 

 

 

 

3. 고착된 자의식의 폭력성

 

 

이제 발제 원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노나라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마치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인 것처럼 응접하였다. 술도 권하고, 맛있는 고기도 주었고, 음악도 들려주면서 그는 극진하게 자신의 애정을 아낌없이 그 새에게 쏟았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발제 원문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노나라 임금이 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새라는 타자를 자기의 고착된 자의식 또는 내면에 근거한 외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새를 대접했으니 어떻게 그 새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그 새는 죽고, 그도 다시는 그 새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새라는 타자와 관계 맺은 결과는 비참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경우 새는 타자라고까지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새는 새 자체로서의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투사된 외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는 노나라 임금이 새를 기른 방법에 대해서,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以鳥養養鳥]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는 것[以已養養鳥]이라고 논평하고 있다. 여기서 새를 기르는 것으로 새를 기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새와 소통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소통을 통해서 새로 상징되는 타자와 어울리는 새로운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역으로 만약 이 노나라 임금이 자신의 백성들을 기를 때,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다면 이것도 또한 하나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나라 임금이 새를 만나기 이전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 자체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삶의 문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런 문맥에 근거해서 구성된 마음[成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약 그가 사람들을 새를 기르는 방법[以已養養鳥]으로 길렀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새가 도래했을 때만이다. 이 순간에 그는, 새를 타자성에 근거한 타자로 조우하지 않고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다. 그래서 노나라 임금이 새를 기른 것에 대해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己養]이라고 한 장자의 논평은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사태에 대한 비유적 비판에 해당한다. 여기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己養]은 성심이 전화한 내면을, 이렇게 길러지는 새는 외면을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타자성에 근거한 타자와 외면으로 관조되는 타자 사이에는 엄청난 틈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식과 갈등에 빠져 있는 어느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이전에 열심히 공부하던 그녀의 아들은 요새 방과 후 집에서 공부를 하기보다는 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자 그녀는 아들에게 말한다. “애야!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하자꾸나. 요새 무슨 고민이 있니?” 아들은 다음과 같이 진정으로 대답한다 . 저 공부해서 대학가기보다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서 대부분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 놈이 공부를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걸 거야라고 판단했다고 하자. 결국 그녀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깊어만 갈 것이다. 이 갈등의 원인은 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판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은 공부가 하기 싫어서 음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려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일 타자를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 타자와의 공생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해 타자성에 근거해서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주체가 그 타자를 삶의 짝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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