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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 해체(Deconstruction) 본문

어휘놀이터/개념어사전

개념어 사전 - 해체(Deconstruction)

건방진방랑자 2021. 12. 1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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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Deconstruction

 

 

책은 저자가 쓰고 독자가 읽는다. 독자는 책의 저자가 무엇을 말했는가를 염두에 두고 그 내용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교과서든 소설이든 철학서든 만화책이든 다 마찬가지다. 책을 통해 저자와 독자는 대화를 나눈다. 저자가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했을 때 독자는 그 책을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상식적인 책읽기다. 그런데 당연해 보이는 이 상식에도 문제점이 있다.

 

저자가 어떤 주제에 관해서 글을 쓰고 독자는 저자가 설정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다고 가정할 때, 독서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책의 논리(저자의 논리) 속에 뛰어들어 그것에 따라 책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독자가 자신의 논리에 따라 그 책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할 것인가? 앞의 것이 학습이라면 뒤의 것은 비평이다. 학습이 올바른 독서일까, 비평이 올바른 독서일까? 예를 들어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쓴 자본론자본주의 경제를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경제서로 봐야 할까, 아니면 자본주의 초창기인 19세기에 그 시대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담아냈던 책이지만 이제는 하나의 역사서’, 혹은 고전에 불과한 것일까? 경제서라면 자본론의 경제학적 이론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고, 역사서라면 자본론의 역사적ㆍ해방적 이념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독해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독일의 해석학자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문학을 해석할 때와 비문학을 해석할 때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문학의 해석은 저자와 독자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문학의 경우에는 저자가 뒤로 물러앉고 언어 자체가 전면에 등장한다. 문학을 해석할 때는 독자의 지평이 넓어지고 끝없는 독해만 존재한다. 그래서 문학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며, 저자조차 한 명의 해석자로서 존재한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그런 구분조차 무시한다. 가다머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진일보했으나 책 속에 저자의 의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데리다는 책에 저자의 의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주장한다. 책은 저자와 독자가 다정하게 대화하는 의사소통의 통로가 아니다. 책은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매체도 아니고, 독자가 수동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매체도 아니다. 데리다는 전통적인 독해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해석할 때 늘 중요한 두 축으로 여겨졌던 저자와 독자는 해체된다. 물론 이 말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저자는 책을 쓸 당시에 특정한 독자를 미리 연상할 수 없으며, 독자는 저자의 의도야 어떻든 그 책을 자기 마음대로 읽을 권리가 있다. 따라서 저자와 독자는 전통적인 독해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서로 투명하게 친한 사이가 아니며, 오히려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낯선 관계다. 저자도 독자도 확정된 실체가 아닌데, 어떻게 저자에게서 독자에게로 의미가 순조롭게 흐를 것을 기대하겠는가?

 

 

저자와 독자가 해체되면 책의 내용도 해체된다. 한 권의 책을 관통해 흐르는 일관된 내용, 진리, 전체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책은 독자에게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거나 특정한 감동을 주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읽음으로써 직접 뭔가를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바둑 한 판을 두면서 대국자들은 수많은 판을 머릿속에서 두듯이,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같은 필름들을 가지고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듯이, 한 권의 책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책들을 ()생산한다.

 

독해의 해체를 통해 데리다는 지배적 독해가 행사하는 억압적 권력을 해체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 이후 서양 사상사의 지배적 흐름은 문자를 음성보다, 글쓰기를 말하기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성이 파악한 사물의 본질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일차적인 재현이었고, 글은 언제나 부차적인 재현에 머물렀다. 그러나 말이 글로 바뀌는 데서 해석은 억압된다. 성서의 원본보다 수많은 주석본이 더 큰 위력을 가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억압되어온 해석을 복원해서 감춰진 목소리를 드러내는 게 데리다가 시도하는 원대한 해체 기획의 요체다푸코가 고고학적 방법으로 타자의 침묵을 드러내고자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전통적인 독해관에는 억압적 권력을 바탕으로 합의를 강요하는 정치적 함의가 숨어 있다. 텍스트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란 문헌만이 아니라 영화, 음악 등의 예술, 정책이나 법의 형태를 취하는 권력의 메시지, 나아가 일상적 대화까지도 아우르는 의미다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의 해석이 권위와 권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이 전쟁에 대한 독해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고 특정한 방향의 독해는 냉전 시대에 억압적 반공(反共) 이데올로기를 생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배적 독해의 가장 해악적인 측면은 바로 다양한 관점을 용인하지 않는 데 있다. 억압적 권력은 단일한 독해만을 제시하면서 그것에 따르는 것이 사회적 합의와 단결을 이루는 길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합의이고 파시즘적인 단결일 뿐이므로 해체의 타깃이 된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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