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Art
문자는 항상 인간을 짓누른다. 어떤 메시지는 문자로 포착되면 즉각 고형화(固形化)되고, 고체 특유의 경직성과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에 비해 예술은 부드러운 액체처럼 매끄러워 특정한 형태가 없다. 그래서 문자의 교훈적 특성과 계몽성에 질린 인간은 예술을 통해 일체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만끽한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늘 문자와 대립하는 동시에, 문자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을 긁어주면서 문자의 여집합과 같은 노릇을 했다.
또한 예술은 문자의 경직성이 고조되어 스스로의 굴레에 갇혀버렸을 경우 선도적으로 치고 나감으로써 문자의 질곡을 풀어주는 역할도 했다. 15세기 인문주의의 물꼬를 튼 르네상스 예술이 그랬고, 20세기 초 과도한 이성 중심주의에 허덕이던 철학을 해방시킨 모더니즘 예술이 그랬다. 예술은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는 상상을 낳는다. 상상력이 필요한 역사적 시기에는 늘 예술이 앞장을 섰다.
그러나 예술의 속성은 언제나 자유와 상상력이지만 정작 ‘예술품’이 탄생한 계기는 대단히 현실적이다. 흔히 예술을 순수예술과 상업예술로 구분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순수예술이란 없다. 자본주의 이전에 예술품은 의뢰인의 주문을 받아 생산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을 위해 예술품이 생산될 뿐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구분은 시간이 지나면 무의미해질 게 분명하다. 200년 뒤의 음악학도는 음악사 과목에서 바흐와 모차르트만이 아니라 비틀스와 록 음악도 공부할 것이다. 이 점은 바흐와 모차르트가 살았던 2~3세기 전의 상황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근대 음악을 낳은 17~18세기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황실을 섬기는 수많은 영방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허울만 ‘제국’일 뿐 합스부르크의 권력은 오스트리아의 일부 직할령에만 국한되었고 영방국가들은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역사적 · 정치적 지형은 근대 음악을 태동시킨 중요한 배경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가들은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사주는 팬들이 없으면 창작 활동은커녕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방송 매체나 오디오 장비가 없었던 시절의 음악팬은 다름 아닌 왕과 귀족들이었다. 따라서 음악가들에게는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처럼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왕국보다는 고만고만한 왕들과 귀족들이 모여 있는 독일 지역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새 궁정이나 교회를 세웠을 때, 자식을 얻었을 때, 생일을 맞았을 때 등등 기념할 만한 사건을 맞아 축하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 것이 수많은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 예술이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와 같은 예술의 생래적인 ‘상업성’은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품 시장이 없었던 시절인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의뢰인의 주문을 받아서 작품을 제작했다. 심지어 조수들을 고용해 화실을 공장처럼 운영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1475~1564)나 라파엘로(Raphaello, 1483~1520)처럼 가장 큰 의뢰인 즉, 당시 유럽 최대의 부호였던 로마 교황의 주문을 받으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처럼 에스파냐 왕실의 궁정화가로 취직해도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교회가 새로 건립되면 제단화와 장식 조각상을 많이 의뢰받을 수 있었고, 공주가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면 궁정화가는 그 초상화를 그렸다.
이런 계기에서 제작된 음악과 미술 작품이 오늘날 고전으로 전해졌으니, 알고 보면 고전 예술은 처음부터 상업 예술이었던 셈이다. 음악과 미술이 비교적 순수한 예술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인데, 실은 그것도 자체의 시장이 이 무렵에 생겼기에 가능했다.
과거의 예술 소비자가 사회적 상류층에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매체의 눈부신 발달로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예술이 갈수록 대중화되는 현상은 결코 부정적인 게 아니라 과거보다 더 예술의 본래적인 속성(대중성)에 충실해지게 된 결과다. '클래식' 이란 처음부터 클래식이라고 선언된 작품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예술성이 인정되어 역사에 남는 예술품을 가리키는 용어일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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