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6부,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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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세 명의 푸코

 

 

푸코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대부 중 한사람으로 간주됩니다혹은 적어도 근대적 합리주의에 반대한 반합리주의자, 계몽적 이성의 독재에 항의한 반계몽주의자로 간주됩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의 경우에 더욱 단순화되고 있지만, 서구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 구조주의자라고 평하는 것 만큼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정은 그의 친한 친구였던 들뢰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들뢰즈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대해서 매우 적대걱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 가운데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근본적인 문제설정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시류 타는 평가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제 나름대로 철학자로서 푸코의 문제설정이 어떤 건지, 무엇을 하려고 그토록 복잡하고 희한한역사를 썼던 것인지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푸코가 근대적 문제설정과의 사이에 만드는 긴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의 사상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흔히 고고학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는 시기입니다. 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출세작인 말과 사물을 통해 지식의 고고학에 이르는 시기지요. 이 시기에 그는 정신병리학(광기의 역사)이나 생리학(병원의 탄생), 혹은 생물학ㆍ정치경제학ㆍ언어학 등의 인문과학(말과 사물) 등 다양한 지식을 둘러싼 관계들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특히 당시 혹은 지금, 진리요 과학이라고 평가되는 지식에 의해 가려진 침묵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어떻게 해서 침묵속에 갇히게 되었나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침묵하는 소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문학이나 미술 등 다양한 문화적 유물을 통해 과학이나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잊혀진 과거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고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담론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 이르는 시기로, 흔히 계보학이란 이름으로 요약되는 시기지요. 앞서 니체에 관한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계보학이란 모든 것들에서 가치와 권력의지를 찾아내는 작업이며 방법입니다. 형벌과 감옥의 역사를 통해서(감시와 처벌), 혹은 성이나 성욕에 관한 담론과 장치들을 통해서(성의 역사 1) 그것들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을 드러내고 그 권력의 효과를 분석하는 게 이 시기 푸코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푸코의 말년으로서 성의 역사 2성의 역사 3에 집약되어 있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권력과 자아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예컨대 쾌락의 활용을 통해 어떻게 자아를 구성하는지, 양생술 같은 자기 배려의 기술을 통해 자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연구합니다. 이는 권력을 통해 자아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보들의 배

보쉬(Bosch)의 그림 바보들의 배(Narrenschiff)

바보들의 배는 중세말에 쫓아내고 싶은 광인들을 태워서 이곳저곳을 항해하게 했던 배였는데, 15세기 말 이래 서양의 문학이나 미술 등에서 집중적으로 형상화된 주제였다. 여기서 바보란 일종의 광인이기도 한데, 이러한 광기는 미친 사랑의 정열이나 모든 것을 웃어넘기는 태도, 어리석음, 집착, 망상, 풍자 등을 포함하는 아주 복합적인 개념이었다. 그것은 멕베스나 햄릿의 광기처럼 죽음이나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돈키호테의 광기처럼 웃음을 야기하기도 하며, 리어왕의 어릿광대처럼 미련하게 세태에 반하여 버림받은 자의 동무가 되어주기도 하는 극히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르네상스인들은 이러한 광기와 우매함에서 일종의 두려움과 위험, 혹은 경멸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삶에 불가결한 요소로 보았다. 에라스무스는 우신(Narrheit) 예찬에서 우신의 입을 빌려 우매함을 절멸시키려는 태도는 삶 자체까지도 파괴할 것이라고 설파한다. 보쉬의 나렌쉬프는 고깃덩어리를 달아놓고 마이크 삼아 노래하고, 그 위아래에서 어리석고 기이한 행동들을 하는 이 우매한 광인들을 싣고 간다. 그것은 자기들의 이성을 찾아 헤매는 광인들을 실은 순례선이었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이 시기의 사람들은 광인이나 바보에 대해 불안해 하고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그것의 미덕과 혼란스런 힘을 인정했고, 따라서 그들은 갇히지 않았고, 쫓겨나는 경우에도 마을 사이를,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는 존재였다. 마치 돈키호테가 끊임없이 비웃음을 사면서도 온 세상을 떠돌며 기사도 순례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침묵의 소리

 

 

푸코의 사상 전반을 특징짓는 가장 커다란 기획은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예컨대 과학이라고 간주된 것과 비과학이라고 비난받는 것 사이의 경계, 정상인과 아직정상인이 아닌 자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 이성과 비이성을 가르는 경계, 혹은 이성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정신이 나간’, 정신이 들어온이란 말을 생각해 보세요)가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부이자 정상과 동일시될 수 있는 동일자 와 거기에 동일시될 수 없기에 배제되어야 할 타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푸코는 허물려고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타자란 말은 라캉이 쓰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입니다. 라캉에게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집약하고 있는 자아 외부의 구조로서, 푸코의 용어에서는 차라리 동일자에 가깝습니다).

 

이 경계를 이해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유용합니다. ‘광인이란 무엇인가? 혹은 정신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상인과 어떻게 다르며, 양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구획선은 어디 있는가?

 

 

병원 설계도

감옥 아니냐고? 아니다. 틀림없이 병원이다. 감옥 같다고? 그렇다. 틀림없이 감옥 같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아주 중요한 사연이. 17세기에 들어오면서 광인들의 항해는 중단된다. 이제 그들은 부랑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범죄자 등과 더불어 수용소에 갇힌다. 그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간판이 달린다. ‘종합병원’, 노트르담 성당을 습격했던, 파리 시내의 한 구역을 점거해서 자신들의 법과 규칙에 의해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는 그 새로운 이름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광기란 이제 이성이 허용할 수 없는 외부가 되었고, 이성적이기 위해선 그 안에 광기가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유사한 것에 속지 않으려는 데카르트의 편집증적 강박을 푸코는 이를 통해 설명한다.

사실 인간이 사는 이 세계가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선 무언가 정상이 아닌 것이 있어야 하듯, 이성이 정의되려면 무언가 비이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세에는 나병환자를 가둔 수용소가 그 역할을 했고, 17세기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을 가둔 새로운 수용소가 이제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성의 정체성/동일성(identity)을 증명하기 위해선, 배제되어야 할 타자들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저렇게 따로 없다면, 대체 내 어두운 정념 안에 광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광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영화를 볼 때면 종종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예컨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란 영화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자기가 환자일 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맥 머피로 분장한 배우 잭 니콜슨은 미친 사람인지 아닌지 병원에서도 오락가락하며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가 하는 일을 봐도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니라 매우 사리에 맞으며, 그로 인해 많은 환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지요. 심지어 인간에 대한 불신 속에서 귀머거리로 행세하던 인디언에게까지 말입니다. 도대체 이들 가운데 누가 정말환자고 누가 가짜환자인 걸까요? 이들이 퇴원을 하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터미네이터 2에서 여주인공 사라 코너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지요.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왔다느니, 또 올 거라느니 하는 얘기를 하다 그렇게 된 걸 겁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답답하고 짜증이 납니다. 왜 저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고 가두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판단은 병원과 의사가 하지요. 하지만 잭 니콜슨은 광기와 정신병을 고치려는 그들의 치료를 받고는 구제불능의 병자가 되지요. 의사들이 정상인을 정신병자로 만든 겁니다. 사라 코너를 가둔 의사들의 판단 역시 그걸 보는 우리에겐 아무런 신뢰도 주지 못합니다. 사실 그들이 사람을 병원에 수용하고 내보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반드시 정상인인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다고 반드시 환자인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정신병원의 의사들도 정기적으로 다른 의사들에게 정상인지 아닌지 검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요컨대 푸코는 이런 식의 매우 심술궂은 질문을 통해서 정상인과 광인 사이의 경계가 과학과 진리가 보증해 주는 확실한 게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경계를 허묽으로써 동일자의 외부, 정상 외부에 대해 사고하고자 합니다. 이는 정상인의 관점에서 광인을 사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라리 광인에 대해 올바로 사고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정상인의 관점, 정상인이란 환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광인의 목소리를,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동일자에 의해 어둠 속에 갇혀 버린 침묵의 소리를 말입니다.

 

 

감옥

감옥을 한국에선 교도소’(矯導所)라고 부른다. 바로잡아 이끄는 곳이란 뜻이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 않아도 우리는 감옥이 그와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수인들 자신이 감옥을 국립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뜻이야 다 알겠지만, 굳이 말하면 범죄를 배우고, 범죄를 할 인연을 만드는 곳이란 뜻이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감옥은 실패했다. 푸코는 근대사회에서 일반화된 권력의 모델을 감옥에서 발견했지만, 사실 그것은 적어도 감옥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이는 감옥의 관리자들도, 법조계 인사들도, 학자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거대한 감옥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선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해충들을 추방하고 격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곳에 있지 않은 우리 자신의 정상성을 믿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 아직은 정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성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혹자는 비슷하지만 아주 다르게 말한다. “감옥은, 이 사회 전체가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저기 저렇게 따로 존재한다.” 푸코는 좀 다른 식으로 말한다. “감옥이 저렇게 분명하게 있지 않다면, 범죄자들이 저렇게 명확히 가시화되어 있지 않다면, 대체 누가 저 거대한 경찰조직과 억압적인 국가장치들의 존재 이유를 인정할 것인가!”

 

 

고고학

 

 

이처럼 경계를 허묾으로써 푸코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배제된 타자에게 다시 동일자의 자리를 주고 복권시키려는 것일까요? 병원에 수용당하길 거부한 광인이나 차별에 고개 숙이길 거부한 흑인, 혹은 규율에 따르길 거부한 범죄자를 새로운 정상인의 모델로 승화시키려는 것일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동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영역, 비정상과 동일시되던 외부여서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간주하던 영역을 다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동일자를 새로이 사고할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를 허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존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던 것이 얼마나 일관되지 못하고 불안정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일자내부의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동일자 자체를 해체시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주로 데리다가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다른 하나는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 그리하여 강요된 침묵 속에 갇혀 버린 타자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동일자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의문에 부침으로써 양자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경계선이 어떤 식으로 그어졌나를 통해 타자와 동일자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푸코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반합리주의자’ ‘계몽주의라는 푸코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상을 단지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의 반대물로 만들고 있을 뿐이란 점에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즉 이성과 비이성, 계몽과 몽매 사이의 경계선 자체를 허물려는 푸코의 노력은 그 경계선을 인정한 위에서 이성 아닌 비이성, 계몽 아닌 반계몽을 지지하는 반합리주의자의 태도와 전혀 다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후자는 이성/비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분법을 똑같이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나 계몽주의를 거울에 비춘 모습일 뿐이며, 그것들의 소박한 보충물입니다. 마치 낭만주의가 이성주의나 계몽주의의 대칭적 보충물이듯이 말입니다.

 

 

길을 행진하는 KKK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은 영화사의 초기를 장식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영화의 내용은 노예해방으로 인해 오만해진 못된 흑인들과, 그들의 불의를 못 참아 궐기한 KKK단의 탄생과 승리를 그리고 있어서 의무감에 하품을 참으며 보던 사람을 당혹하게 만든다. ‘국가의 탄생’, 그것은 백인 국가의 탄생이고, 백인 아닌 것들을 처단하고 제거하는 폭력장치의 탄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1923년에 찍힌 저 사진에서도 KKK단은 충분히 야만적인 가면과 복장을 한 채, 검은 동물 들을 처단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백색, 그것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동일자의 권력이다. 다만 그들의 가슴에 단 표시나 바지와 구두마저 그 자랑스런 흰색으로 칠하지 않은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아니, 검고 흉한 눈동자도, 붉어서 불온해 보이는 입술도 모두 흰색으로 칠했다면 더욱더 완벽하게 인종적인 순결성과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한 듯해서 안타깝다.

 

 

타자의 역사

 

 

이와 같은 관점에서 푸코는 타자를 소통과 대화의 자리에 끌어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그 타자의 역사를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자의 역사를 통한 것입니다. 전자는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말과 사물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타자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봅시다.

 

광기의 역사미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자체도 하나의 광기인지도 모른다는 파스칼의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광기가 어떻게 해서 정상 사회에서 배제되고 감금되며 결국은 치료되어야할 으로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르네상스 시대, 고전주의 시대, 근대라는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이 구분은 그의 저작에 가장 자주 쓰이는 시기 구분입니다),

 

영화 얘기가 만만하니,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안소니 퀸이 그 잘생긴 얼굴을 흉칙하게 일그러뜨리고 나와 더 유명한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를 보신 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혹은 위고의 소설로 직접 읽었다 해도 좋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의 하나가 파리 시내의 부랑자들이지요. 거지와 광대, 광인, 도둑, 집시 등이 파리 시내의 일부를 차지하고는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도 나름의 규율과 처벌이 있고,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달리 그들은 파리 시내에서 다른 정상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때로는 구걸도 하고, 때로는 거래도 합니다. 나중에 그들이 노트르담 성당을 습격하는 것 역시 이런 거래를 통해서였지요. 반면 아마데우스를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처음에 살리에리가 자살을 기도하는 곳은 광인과 부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였습니다. 그 역시 한 사람의 광인으로서 수용되어 있었지요.

 

이 두 영화에서 부랑자나 광인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은 아마 중세 말 르네상스 시기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반면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죽음(1791)을 전후한 시기니 고전주의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보이듯,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인은 정상인과 구별되어 감금되거나 병자 취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었지요. 광인이나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정상인과 공존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때론 그들의 힘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그들을 물먹이기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거리의 부랑자들은 예전에는 나병환자들을 가두던 수용소에 감금되기 시작합니다.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로피탈 제네랄’(L'hôpital général ; 종합병원이란 뜻입니다!)은 바로 그들을 이성의 타자로서 배제하고 감금하던 곳으로서 탄생합니다. 이게 바로 노트르담의 꼽추아마데우스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아마데우스시대에 그들은 병원인지 수용소인지 모를 곳에 감금된 채 나타납니다. 그곳에는 환자들을 통제하는 의사인지 신부인지 모호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 당시까지만 해도 광인은 다른 부랑자와 함께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용된 자들 가운데 빈자와 거지, 범죄자들은 광인들과 함께 가두는데 대한 공포와 저항을 갖고 있었고, 이후 산업이 발달하면서 일자리가 많이 생기게 되자 거지나 가난뱅이 등은 모두 풀려납니다. 그들은 이제 근대적 이성이란 동일자에 포섭될 수 있는 부분이 된 것입니다. 이제 범죄자와 광인만이 수용소에 남지요. 하지만 범죄자들 역시 광인과 분리해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근대는 대개혁이라 불리는 조치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는 예전엔 차라리 동물적인 존재로 취급되던 광인들, 그래서 극히 가혹한 처우를 받던 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려고 합니다. 다만 광기로 인해 아직 이성의 품 안에는 들어오지 못한 미숙아, 혹은 불행하게도 병에 걸려 미쳐버린 환자로 취급합니다. 그들은 감금에서 해방됩니다. 대신 이제 그들은 자신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들은 종교나 도덕적 조치의 힘을 빌려 치유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물론 책임을 못지는자나 책임지길 거부하는 자는 더욱 가혹하게 감금되지만 말입니다. 참을성 많고 인격이 훌륭한사람들, 혹은 광인들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의사로서 그들을 치료하게 되지요.

 

결국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때는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어떤 특징으로 간주되던, 혹은 유별난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던 광기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가둬두어야 할 대상, 치료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정신병리학이란 광기를 배제함으로써 정상인의 사회를 테두리짓고 정의하려 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며, 그들을 다루는 기술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진리과학이라고 할 어떤 특징도 사실상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광인이 타자로서 배제되고 침묵하게 된 과정을 드러내며, 광기와 이성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허물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자의 역사를 다루는 말과 사물은 시인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서구와는 전혀 다른 동물 분류법이 그것입니다. 즉 사물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전혀 상이한 사고방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물의 질서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사물에 대해 판단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실 의식적인 사고란 이런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이 기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기초입니다. 이처럼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며,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푸코는 에피스테메(épistémè, 인식틀)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앞서의 세 시기를 나누어 살펴봅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로, 고전주의 시대는 표상의 에피스테메로, 근대는 실체’(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립적 실재)의 에피스테메로 요약됩니다.

 

푸코는 돈키호테를 통해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는 돈키호테는 유사성에 따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반면 거인과 풍차의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는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은 이런 돈키호테의 사고방식을 미친 것으로 이해합니다. 호박꽃과 배추꽃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등을 분류하는 린네의 분류학은 고전주의 시기의 에피스테메를 대표합니다. 이들은 표상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표상들을 분류함으로써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의 말은, 생각(표상)을 통해 직접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런 사고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역사적 구조주의

 

 

다른 한편 근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 인식틀)는 고전주의 시대와 달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칸트의 사물 자체처럼 표상이 닿지 못하는 외부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도 예전에는 분류학에 그쳤지만, 이제는 생명이라는 실체를 중심으로, 그것을 위해 기능하는 기관이나 특징을 근거로 새로 정리됩니다. 나아가 이 실체 자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그로 인해 역사라는 개념이 나타난다고 하지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이라는 범주가 바로 그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개념은 이 근대라는 시기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푸코는 서로 상이한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금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동일하게 불리는 동일자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이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선을 사실 동일자 자신의 역사를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로 고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지금 현재 포섭과 배제의 선을 긋고 있는 이성이란 동일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고,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가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확고하고 꿈쩍도 않을 것 같은, 현존하는 서구적 이성의 지배를 균열시키고 뒤흔들려는 비판적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서구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통해서 나는 외관상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대지에 불안정성과 틈새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대지는 우리의 발 밑에서 다시 한번 불안하게 꿈틀거릴 것이다. 말과 사물서문

 

 

이러한 사상은 분명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입니다. 사고 전반을 규정하는 무의식적 기초를 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찾아내려는 시도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한 역사적 시기마다, 모든 사고의 선험적 기초를 이루는 일종의 선험적 구조인 셈입니다. 이 점에서 이 저작은 특히 구조주의적이라고 간주됩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와 푸코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레비-스트로스가 다양한 사고법들 전체를 특징짓는 가장 심층적인 보편구조를 찾아내려 한 반면, 푸코는 반대로 이 다양함을 다양함으로서 인정하려 한 데 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이 다양함을 하나의 선험적 구조(‘야성적 사고’)로 포괄하려는 시도를 또 하나의 동일화하려는 시도요, 동일자의 논리라는 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상을 단순히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곤란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푸코의 이 시도를 관통하는 멘탈리티는 분명 사고 밑바닥의 어떤 심층구조를 찾아내려는 것이란 점에서 구조주의적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역사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특징을 역사적 구조주의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얀 흑인

인간은, 특히 서양의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구분하는 데 매우 집요한 집착을 보여왔다. 그래서 인간은 ~한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다른 동물에 없는 자기만의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인간에게 없는 동물들의 수많은 능력들을 잊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이성적 동물’ ‘언어적 동물’ ‘사회적 동물’ ‘놀이하는 동물등등의 수많은 기이한 동물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모호한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가혹했는지도 모른다. 흑인들, 그들은 오랫동안 인간이 아니었다. 처참한 생활을 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 인간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을 동물처럼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저 기이한 동물들의 규정에는 항상 피부가 하얀 이란 말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자신의 피부색을 원망하지 않을 흑인이 대체 어디 있었을 것인가! 돈과 기술만 있다면 피부를 흰색으로 갈아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피부를 수세미로 밀어보는 안타까운 노력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성공한 흑인 마이클 잭슨의 얼굴을 저렇게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백인들의 가치, 흰 피부의 가치를 거꾸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하얀 흑인, 그것은 배제와 억압 속에서 타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동일자의 가치척도를 내면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자는 이처럼 자신이 핍박한 타자들의 피부, 타자들의 내면에까지 침투한다. 백인들의 얼굴을 점점 닮아 가는 우리의 얼굴들은 어떨까??

 

 

경계선의 계보학

 

 

앞서 우리는 푸코의 기획이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뒤집으면, 그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려는 힘과 권력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분명 동일자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입니다. 예컨대 광기와 이성 간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래서 광인을 가두거나 환자 취급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이 경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그은 경계선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성은 그 경계선을 유지하는 기술자들에게 의사란 직책을 주며, 그것을 위한 담론(談論, discours; 여기서는 정신병리학이란 지식을 말합니다)과학이란 이름을 제공합니다.

 

나아가 이 담론을 통해 정신병이나 광인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의사뿐이며, 광인은 그들이 판단하고 처리하는 대로 따라야 할 대상이라고 정해줍니다. 정신병원에서 하는 광인들의 얘기는 어떤 것도 미친 소리일 뿐이라는 것이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잭니콜슨이 간호사에게 여러 가지 항의도 하고 부탁도, 조언도 하지만 간호사는 그 어느 것에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건 미친 소리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사가 취하는 조치는 심지어 그것이 환자를 다치게 하거나 얼빠진 사람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해도 치료로서 정당화됩니다.

 

그렇다면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이 의사와 광인(환자)을 각각 주체와 대상으로 정의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주체와 대상은 담론 안에서, 담론에 의해서 정의됩니다. 또한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의사가 환자에게 취하는 모든 조치를 정당화해 주고, 나아가 그런 조치를 강제로라도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줍니다. 따라서 담론 안에는, 다시 말해 정신병리학이란 지식 안에는 권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지식은 권력을, 그 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해 줍니다. 반대로 지식 역시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권력을 필요로 합니다. 필요한 조치를 강제로라도 취할 수 없다면, 정신병리학이 환자들에게 어떻게 과학의 권위를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 푸코는 지식-권력’(savoir-pouvoir)이란 말을 합니다. 지식과 권력이 뗄 수 없는 하나의 복합체란 뜻이지요. 결국 담론의 질서란 담론 자체에 권력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담론 자체가 권력에 의해 작동하며 정당화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한편 담론만으로는 이러한 권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정신병원이나 수용소라는 물질적 장치들이 없다면, 그래서 환자들이 당연히 수용되어야 하고 수용된 환자들에 대해선 어떠한 조치도 과학의 이름으로 취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들이 없다면, 담론이 제공하는 권력은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라는 제도적 장치, 즉 기존 질서를 가르치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는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거기서 벗어날 때면 어김없이 징벌이 가해지는 학교라는 장치가 없다면,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보학이란 이처럼 동일자가 경계선을 긋고 유지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권력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것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보학은 또 하나의 비판적 문제설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경계선이 만들어진 역사를 추적하고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는 고고학적 시도와 구분되는 것이지만, 경계선을 찾아내고 허물려는 푸코의 전체적 기획에서 보면 일관된 것이며, ‘고고학적시도를 보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는 감시와 처벌의 역사를 서술합니다. 애초에 지배적이던 것은 공개적인 끔찍한 처형(신체형의 화려함!)이었습니다. 이는 낡은 군주권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인민들에게 강렬한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범죄나 모반을 막으려는 일종의 보복이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말을 거치면서 이 보복훈육(discipline)으로 바뀝니다. 범죄자 속에서 인간을 발견한 것입니다. 범죄자도 인간이란 생각이 대두하면서 이제 인간은 행형(行刑)과 훈육의 새로운 대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여기서는 죄를 범한 개인들을 법적인 주체로, 즉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게 중요해집니다.

 

나아가 이들의 신체 운용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고, 신체를 항상적으로 속박할 수 있으며, 효율적인 순종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감시가 발전합니다. 더불어 시간표, 신체와 동작의 상관화, 시간의 철저한 활용, 시험, 제재의 규격화 등등 다양한 훈육의 기술들이 발전합니다. 이로써 감옥은 단순한 처벌권력에서 규율에 의해 법적 주체로 훈련시키는(교정!) 권력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와 훈육의 기술은 이후 학교와 군대, 공장에서 개인들을 길들이고(훈육!) 통제하는 데 하나의 모델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뜻에서 그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라는 섬뜩한 테제를 제시합니다.

 

감옥에 대한 연구를 통해 푸코는 이제 권력이 지식-권력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임을 분명히 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이나 성욕, 성적인 제도와 장치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관점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이처럼 신체에 직접 작용하고 신체에 새겨지는 권력을 푸코는 생체권력(bio-pouvoir)이라고 합니다.

 

 

 

 

해체의 철학, 철학의 해체

 

 

결국 니체의 계보학은 푸코에게 새로운 두 권력 개념을 제공한 셈입니다. 지식-권력과 생체권력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생체권력 개념은 또 하나의 변환을 야기합니다. 감시와 처벌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푸코가 도달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요, 기능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군대에서 생체권력을 통해 개개인은 사회적으로 받이들여질 수 있는 주체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인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푸코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체가 되는 데 권력의 작동이 필수적이라면, 이제 권력 없는 주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권력은 영원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없는 주체는 없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고 했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푸코는 또 한번의 커다란 전환을 합니다. 권력 없는 주체가 있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을 통해서 각자가 어떻게 자아를 구성해 가는가가 문제가 되고, 권력을 통한 자기와의 관계가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권력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기술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이러한 그의 작업은 윤리학이란 이름을 얻습니다.

 

이런 전환은 이제까지 그의 작업 전체를 이끌어온 비판적인 기획 자체가 중단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비판적 문제설정 자체가 해체되고 마는 것입니다. 듀스(P. Dews)는 이를 니체적인 권력 개념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라고 비판합니다(해체의 논리), 니체에게 권력은 지배/저항의 대립이 중요하기보다는, 모든 개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권력의지로서의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면 타당한 평가입니다. 그러나 사실 좀더 니체의 사상에 충실했던 들뢰즈는 유사한 경로를 거치지만, 푸코와는 다른 귀착점에 이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그는 철저하게 니체적인 출발점을 가지며, 니체적 입장에 지속적으로 충실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공언하는 비판적 지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푸코의 입장은 니체의 개념에 의존하나 결코 충분히의존하지 않습니다. 니체에게는 작용적 힘과 반작용적 힘, 긍정적 의지와 부정적 의지가 언제나 공존하며 대립투쟁합니다. 이는 생성을 중심에 두고 파악하는 그의 사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푸코는 아마도 니체의 긍정적 의지나 작용적 힘이 생물학적인 권력의지로, 결국 형이상학적 실체를 가정하는 결과에 빠질 위험에 주의했던 것 같습니다. 유명론적 입장이 강했던 그로선 아마 이런 선택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니체가 보기엔 반작용적 힘, 부정적 의지에 불과한 요인이 권력개념을 일면적으로 정의하게 됩니다. 푸코가 말하는 생체권력 개념이 바로 그렇습니다.

 

반면 들뢰즈에게는 일차적이고 작용적인 힘이, 긍정적 의지 개념이 욕망하는 생산’(desiring production)이란 개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이 자신을 통제하려는 코드화된 힘과 권력(의지)에 저항하고 대립합니다. 따라서 주체는 단지 생체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드는 수동적 생산물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것은 끊임없이 코드화하려는 힘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근대철학의 한계를 넘어 새로이 주체의 생산을 파악하는 탁월한 유물론적 관점이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

 

마지막으로 푸코와 근대철학의 연관이라는 우리의 본래 주제로 잠시 돌아갑시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려는 푸코의 기획은 사실 근대적인 이성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었고, 근대적인 문제설정 자체를 상대화하고 넘어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이 푸코를 들뢰즈와 함께 포스트구조주의의 중심에 자리잡게 한 요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허무는 작업을 통해 근대 내부에서는 사고되기 힘들었던 새로운 영역이 나타났습니다. 푸코의 연구대상이 갖는 특이함이 바로 그 사례겠지요. 나아가 그 경계선에 작용하며 그것을 유지하는 권력을 드러냄으로써, 진리란 동일자 자신이 발행하는 동일자의 보증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즉 그것은 지식에게 권력을 제공하고 권력을 통해 지식이 작동하도록 하는 지식-권력의 접착제인 셈이지요. 그럼으로써 근대적인 진리 개념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지식을 재는 참된 지식이란 잣대는 부러지고 맙니다. 정신병리학이나 임상의학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리고 결국은 지식에 대한 고고학적이고 계보학적인 비판을 통해 과학이란 이름의 정당화주의 또한 해체합니다.

 

다른 한편 인간이란 범주가 근대라는 시기의 산물임을 밝힘으로써, 근대철학의 지반을 근대철학의 역사성 속에서 볼 수 있게 재배치합니다. 이로써 주체철학은 그 근대적 성격이 명확해집니다. 주체를 파악하는 새로운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을 제시한 것 역시 이러한 작업의 성과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윤리학으로 전환되는 아이러니와 한계는 망각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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