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의 의지
니체의 고유한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질문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이른 봄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이나 저녁에 곱게 지는 노을, 늘씬하게 빠진 젊은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칩시다. 만약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게 무어냐는 걸세.”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요컨대 꽃이나 노을, 몸매 같은 것들은 가상이고 그 근저에는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질문방식은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 전체의 주된 흐름이 되어 왔던 질문방식이며, 흔히 서구 형이상학의 뿌리로 간주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질문을 바꾸어 버립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이는 진리의 예를 들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는 ‘진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걸 요구하는 플라톤식의 질문과 달리,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대체 어떤 것인가? 진리를 점령하고 있는 의지는 어떤 것인가?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숨어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건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force)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어떤 힘이 지배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구별해 주는 것이 ‘의지’라고 합니다. 거꾸로 이러한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는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의지가 힘들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합니다. 줄여서 ‘권력의지’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권력을 추구하거나 욕망하는 의지와는 별로 상관이 없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 이거 진짜 훌륭한 거 맞나?
계보학은 말 그대로 보자면 계보를 찾는 학문이다. 그래서 통상 계보를 찾고 ‘아버지’를 찾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누구, 한민족의 ‘아버지’ 단군 등등.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계보의 선을 그리는 것. 그러나 니체는 ‘족보학’이란 말에 더 부합하는 이런 종류의 계보학에 대한 비판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버지나 신성한 기원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차라리 라 투르(La Tour)의 유머러스한 위 그림(제목은 「야바위꾼」The cheat)에 더 가깝다. ‘진리’ ‘자유’ ‘인간’ ‘도덕’ ‘정의’ 등과 같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관념들, 모든 활동의 목적이자 기원이라고 간주되는 그런 에이스 카드나 킹 카드 등을 보면서, “이거 진짜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 맞나?” 하면서 그런 관념이 발생한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눈 앞의 카드를 보고서, 의혹의 시선으로 감추어진 손을 찾아가는 두 여인의 삐딱한 눈동자처럼, 그 위대한 관념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오른쪽의 저 여인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맹목적 순진성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선’이니, ‘진리’니, ‘도덕’이니, ‘인간’이니 하는, 대개는 의문 없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믿는 그런 관념의 혈통과 ‘계보’를 찾아간다. 그리곤 그것이 어이없는 것에서 시작되었거나 끔찍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자신의 작업을 ‘망치 들고 하는 철학’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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