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고츠키가 알려주는 능력ㆍ장애ㆍ학습의 개념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들은 생각지도 않은 채, 모든 문제점을 한 개인으로 환원하여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능력의 유무, 성실성 유무, 장애의 유무 등과 같은 것들이 그렇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을 보고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학생일수록 ‘역시 난 놈은 뭘 해도 잘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 공부 못하는 학생을 보고선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뭘 조금이라도 잘 한다 해도 ‘어쩌다 보니 그런 것 뿐’이라고 단정 짓기 쉽다. 이런 판단을 통해 우린 ‘능력’을 ‘개인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여기서 ‘유능’이라는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추상적 사고 능력의 뛰어남’이다. 바로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니, 기준에 맞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되고, 맞지 않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만약 학교의 평가 시스템 자체가 크게 바뀌어서 ‘운동 능력이 좋은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바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지금의 유능한 사람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고, 반면에 무능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유능한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체가 지닌 능력이란 개인이 지닌 게 아닌 사회 시스템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 박동섭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우치다쌤의 얘기를 통해 능력이란 것의 다양한 층위를 알 수가 있다.
장애와 비장애란 무엇인가?
능력은 그렇다 쳐도 장애 또한 사회시스템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말엔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눈이 멀었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장애이지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물음이 충분히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미 푸코의 책 『광기의 역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광기 또한 근대 이전엔 ‘좀 남다른 사람’이라는 인식만 있었을 뿐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정신병원에 가둬야 할 질병으로 인식되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성적 사고와 효율이 사회 전면의 가치로 떠오른 근대에 이르러선 광기가 있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격리되고 치료받아야만 하는 질병을 지닌 존재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인의 정신 상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장애로 취급받게 됐다.
이런 예에 빗대어 박동섭 교수님은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가 집필한 『여기서는 모든 이들이 수화로 말하였다Everyone Here Spoke Sign Language』라는 책을 소개해줬다. 미국 근해에 위치한 비니어드 섬엔 유전적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이곳 사람들은 ‘수화’를 기본 언어로 익혔기에 청각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문화인류학자가 “그러면 그동안 살면서 할머니가 만났던 청각장애인들은 전부 몇 명이었습니까?”라고 묻자, 할머니가 대답을 하는데 이 대답이야말로 장애도 사회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드러내준다.
“오!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과 ‘장애인’이라는 인식엔 레테의 강만큼의 격차가 있다. 현대엔 ‘심리학’이 주요 학문으로 떠오르면서 현대인은 모두다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다. 과연 우린 ‘정신병자’인가, ‘팔팔 끓는 감정을 지닌 사람’인가? 교정이나 치유는 한 개인을 ‘장애인’이나 ‘돌연변이’로 인정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린 결코 닫혀 있는, 완결형의 존재들이 아니다. 환경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열려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왜 개체환원주의를 의심하거나, 되묻지 못한 채 사회나 학교가 규정지은 특성이 나의 모습인양 착각하며, 그런 기준으로 남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건 무언가를 묻고 새롭게 디자인할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고 느끼던 것들이 사회적인 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니 놀라웠다.
개체의 관점이 변하면 학습이란 관점도 변해야 한다
박동섭 교수님이 말해준 ‘마리의 요리 만들기’라는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정신을 완전히 혼란의 아수라장으로 초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건 지금까지 지녀왔던 ‘학습=획득’의 공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학습=실천’이란 새로운 관점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화두로 삼아야 할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마리는 중증장애인이다. 그래서 몸조차 가누기 힘든데 글쎄 요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보면, 누구나 ‘마리가 직접 요리 재료를 샀고 직접 손을 움직여 요리를 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리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빌려 요리를 만들었다. 마리는 재료도 직접 사지 못했으며 요리도 손수 만들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미묘하게 움직이는 동작을 통해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진두지휘 했을 뿐이다. 즉, 그녀는 의지만으로 요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이걸 학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고 나선 잠시 멍해졌다. 이건 학습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뿌리째 뽑지 않고서야 도무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보통 정의하는 학습이란 ‘개인의 내면에 어떤 능력을 획득하는 것’인데, 이 이야기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획득했다는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 나를 보면, 나 또한 여러 문화적 도구와 성취물의 도움을 통해 무언가를 해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컴퓨터를 개발한 사람들의 도움, 전기를 발명한 사람의 도움, 끼적거릴 종이를 발명한 사람의 도움 등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등에 업고 있다. 마리와 나는 다양한 도구(물론 사람의 도움도 포함된다)를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같은 게 아닐까?
더욱 현실적인 예로 대기업 회장들은 어떤가? 그들이 직접 반도체를 만들기를 하나, 각 계열사의 일들을 일일이 알아서 할 수 있길 하나. 회장은 자신의 어떤 의지만을 직원들에게 보일 뿐이고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부하직원들이다. 마리와 대기업 회장의 모습은 비슷한 게 아닐까. 하지만 마리는 중증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요리도 만들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낙인찍어 버리고, 회장은 최고경영자라는 이유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이와 같은 부조화를 어떻게 재평가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학습‧능력‧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며 사람을 대우하는 방법도 달라질 것이다.
▲ 아이폰4를 보면서 우린 스티브 잡스를 떠올린다. 그렇다면 '마리의 요리 만들기'도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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