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Production
생산과 창조는 둘 다 뭔가를 만든다는 뜻이지만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말이 있듯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데 반해, 생산은 재료를 가공해 뭔가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생산은 일종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과 창조는 둘 다 뭔가를 만든다는 뜻이지만 경제적 생산은 전형적인 변형을 의미한다. 경제활동으로서의 생산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에 노동 같은 작용을 가해 재화를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 결과 생산은 가치를 낳게 된다. 그냥 돌멩이라면 가치가 없지만 돌멩이를 가지고 석공이 끌로 작용을 가하면 인형이라는 가치를 지닌 재화가 생산된다. 즉 경제적 생산은 노동자가 노동대상에 노동수단과 노동력을 가해 상품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나 생산이라는 개념은 경제적 내용만 가지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생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식의 생산이다. 지식은 담론들이 결합된 결과로 형성된다. 지식을 낳는 담론들은 과거 지식을 구성하는 담론들과 연속적인, 혹은 불연속적인 연관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창조되는 게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 구조주의 인식론으로 지식을 바라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담론들을 결합시키는 인식론적 체계로 에피스테메(epistēmē)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에피스테메를 ‘참된 지식’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으나 푸코는 지식을 포함하여 인식, 실천, 행위를 규제하는 숨겨진 구조적 질서를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에피스테메는 인식론을 뜻하는 에피스테몰로지(epistemology)와 같은 어원이다.
인간 이성이 깨어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에피스테메는 역사적으로 몇 가지 양태로 변천되어왔다. 각 에피스테메의 범위 안에서는 지식을 구성하는 담론들이 연속성을 취하지만 에피스테메를 넘어설 때는 불연속적이 된다. 쿤(Thomas Kuhn, 1922~1996)이 말하는 과학혁명의 구조와 비슷하다(→ 패러다임).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가 지배적이었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무모한 도전장을 던진 돈키호테(Don Quijote)는 바로 그 에피스테메를 대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에만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유를 마시면 얼굴이 하얘진다든가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현대의 속설은 ‘우유=흰색, 호두=뇌’의 모양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사고다.
17~18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을 특성으로 한다. 이 시대에는 사물과 인식이 1 대 1로 대응한다고 믿었고, 표상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에피스테메의 구체적 표현은 구분과 분류다. 르네상스 시대에 영웅적으로 보였던 돈키호테의 행위는 미친 짓으로 분류된다.
19세기부터 싹튼 근대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이성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인식의 주체로 등장한다. 인간 주체에게는 과거와 같은 표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인간은 사물처럼 표상되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을 표상하는 특권적 지위를 가진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 정치적 자유, 노동, 해방 등의 이념들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이 구분을 현대에 적용하면, 현대는 인간이 중심에서 탈락하고 구조가 중심에 놓이는 에피스테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식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지식은 설명하는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에피스테메는 지식 자체를 가능케 하는 틀이므로 특정한 지식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에피스테메는 의식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인식 틀이다(그렇기 때문에 개별지식으로 에피스테메를 관통할 수는 없다). 마치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거의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되듯이.
푸코가 말하는 지식의 생산을 가리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는 이데올로기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기원도 역사도 없는, 누구나 당연시하고 넘어가는 무의식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는 벗을 수 없는 색안경과 같다. 모든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자유로운 인간존재인 듯하지만 실은 내 부모님의 둘째 딸이고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어떤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다. 나의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은 거의 없다. 심지어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보는 창문과 같은 역할로서, 사고와 행위를 제약하면서 동시에 사고와 행위를 가능케 한다.
알튀세르는 개인적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계급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자로서 의식하고 그에 따르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수단이 바로 미디어와 학교다.
경제, 지식, 이데올로기는 모두 생산의 개념을 핵심으로 한다. 창조가 아닌 생산이라면 새로 만들어낸다는 의미보다는 ‘유지와 보존’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므로 경제, 지식, 이데올로기의 생산이란 사실상 ‘재생산’의 개념이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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