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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분열로 날린 기회(신탁통치)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분열로 날린 기회(신탁통치)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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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로 날린 기회

 

 

미 군정청의 의도는 어떻든 간에 한국민의 손에 남한을 맡겨두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한을 일본에 부역한 준전범국으로 보던 태도는 곧 사라졌으나 그런 미군의 기본 입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 미군은 남한 정치 세력들의 수권 능력도 의문시했겠지만, 여기에는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예상 외로 남한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해진 것도 한몫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정청은 인공을 거부한 데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오랜 망명과 항일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여운형의 인공과 김구의 임시정부는 둘 다 결격사유는 좀 있지만 어쨌든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반도의 정권 담당자로서 큰 하자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두 세력 중 어느 측이 새 나라의 정부를 구성했다 해도 이후의 실제 역사보다 나았을 것은 틀림없다. 게다가 두 세력은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으므로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통합을 이룰 수도 있었고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사이좋게 정치적 지분을 나눌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 군정청이 둘 다 퇴짜를 놓으면서 사정은 달라져 버렸다. 이제는 누구나 대권후보를 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공이나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인물일수록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미 군정청으로서는 미국의 이해를 대변해 줄 수 있는 꼭두각시를 바랐을 테니 기존의 권력 기반 같은 것은 없을수록 좋다). 그런 공백을 이용해서 급부상한 자가 바로 대통령병 환자인 이승만이다.

 

사실 이승만은 1919년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이미 대통령으로 임명된 바 있었다. 원래 임시정부는 그에게 국무총리 직함을 주었으나 이승만은 굳이 대통령직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얼굴마담도 없는 데다 워싱턴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이승만 외에는 딱히 국제적으로 조선의 사정을 알릴 루트가 없었던 탓에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름뿐인 망명정부의 이름뿐인 직함에까지 욕심을 냈으니 그의 대통령병은 이미 그때부터 심각했던 셈이다(의원내각제를 취했던 임시 정부에서는 원래 대통령이라는 직함조차 없었으므로 순전히 이승만을 위해 급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해외 동포들의 성금을 횡령하고 외교업무에서 전횡을 일삼아 1925년에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아 해임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런 얼룩진 경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국내 각 정치 세력마다 이승만을 영입하려 애쓴 이유는 바로 미 군정청이 인공과 임시정부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모든 활동과 기반을 무시한다면, 영어를 알고 워싱턴 물을 먹어본 이승만이 단연 유리할 수밖에 없다당시 영어 한마디 할 줄 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청의 각료들이 한국어를 배울 리는 없으므로 군정청과 대화할 일이 있다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랬으니 이승만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기본 점수는 따고 들어갔던 셈이다.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던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막대한 재산(적산敵産)도 영어 한마디만 잘 하면 군정청에서 헐값으로 불하받을 수 있었던 게 당시의 세태였다. 지금의 영어 열풍은 그런 사태를 대비하는 걸까?.

 

주가가 잔뜩 오른 이승만은 오만하게도 모든 정치조직과 사회 단체들에게 하나로 힘을 합쳐 자신을 밀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해괴한 연합 단체가 출범했는데, 이승만은 그 총재의 자격으로 군정청과 접촉하면서 자연스럽게 단독 대권후보로 떠올랐다(앞서 하지의 발언과 더불어 이승만이 무원칙한 대통합을 추구한 것은 해방 이후 숨죽이고 있었던 친일 전력자들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이데이 집회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있었던 좌익 계열의 집회 장면이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과 민중의 대다수는 사회주의 이념에 찬동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또한 그런 분위기를 역전시키기 위해 좌익 갈등을 부추겨 자신의 집권을 이룬 이승만을 민족 반역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직 취약한 대국민적 인기를 높이는 일인데, 때마침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1945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를 향후 5년간 신탁통치하자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없던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이승만에게는 더없이 좋은 건수다.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한국민들에게 신탁통치란 그 지긋지긋한 식민지 지배의 연장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탁통치가 시행된다면 이승만이 바라고 바라던 대통령의 꿈은 무기한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민적 여망과 개인적 야망을 한데 모아 이승만은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계획한다. 여기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명망가들이 가세하면서 이승만의 반탁 운동은 더욱 힘을 얻는다.

 

여기서 따져볼 것은 과연 반탁이 올바른 노선이었느냐는 점이다. 물론 완전한 독립을 바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충심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독립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었을까? 유사 이래 한번도 공화정의 경험이 없는 역사에서 서구적 공화정을 한국민 자체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을까? 더구나 남의 손으로 해방을 맞은 처지에 한국민들은 그런 화려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반탁 운동에 동조한 많은 사람들은 신탁통치를 식민지 지배로 단순하게 등식화했지만, 3상회의의 결정에는 신탁통치의 시한이 못박혀 있었고 그 뒤에는 어차피 정부 수립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신탁통치는 결코 식민지 지배와 같은 게 아니었다. 조금만 냉철한 시선을 가졌더라도, 신탁통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편이 여러 가지로 미숙한 신생국으로서는 훨씬 순탄한 정치 일정을 걸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실제로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까지 남한은 미 군정청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5년의 신탁통치란 결코 긴 기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시달린 한국민들은 신탁통치의 참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반탁 운동을 주도한 이승만은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임시정부의 명망가들은 이승만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처음에 반탁 운동에 가담했던 좌익은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리고 신탁통치 찬성쪽으로 돌아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것에 당황한 UN이 결국 신탁통치안을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그들은 민심을 잃은 데다가 이념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미 군정청의 미움까지 받아 박헌영, 이승엽(李承燁, 1905~53) 등 지도급 인물들이 월북하면서 와해되어 버린다. 지도부로부터 버림받은 남한의 좌익 세력은 결국 한국전쟁이 터진 뒤 산 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 없는 독립 나라를 되찾았으나 새 지배자로 들어선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망명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다. 사진은 그들이 귀국을 앞두고 이름과 구호를 적은 일종의 연명서다.

 

 

그러나 북한으로 건너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인물들의 팔자도 편한 것은 못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이 실력자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원래 김일성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을 때 북조선 분국을 맡은 책임자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만주의 유격대였지만 공산당 조직의 정통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었으므로 북조선은 분국의 위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실세인 김일성이 마냥 조선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려 할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남한의 공산당은 미 군정청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세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19464월 김일성은 북조선 분국을 북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독립하는데, 이때부터 원래의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으로 불리게 된다. 그랬으니 지도부만 달랑 월북한 박헌영 일파를 김일성이 곱게 볼 리가 없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들을 즉각 내치지는 못한다. 비록 김일성이 가장 선두에 선 대권후보이긴 했지만 아직 라이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 인물들만 물리친다고 해서 저절로 챔피언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은 남한의 이승만처럼 일단 자신을 구심점으로 해서 북한 내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는 데 주력한다.

 

당시 김일성이 권좌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은 크게 봐서 세 가지, 우익 하나와 좌익 둘이었다. 우익의 핵심 인물은 조만식(曺晩植, 1882~1950)인데, 그는 비록 북한 민중의 폭넓은 존경을 받는 민족주의자였으나 정치적 역량이 모자라는 데다 사회주의 세상이 된 북한의 색깔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어차피 놔둬도 오래 가지 못할 게 뻔하다. 좌익의 라이벌은 남로당 이외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했던 연안파(延安派).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대선배에 해당하는 김두봉은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빛나는 인물이었고, 특히 무정은 8로군의 군단장까지 맡은 화려한 이력에다 유명한 대장정(大長征)까지 참여한 바 있는 항일 전사로서 중국공산당에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김일성으로서는 사실 그들과 어깨를 견줄 처지가 아니었다.

 

이런 구도였으니 만약 소련이 갑산파를 밀지 않았더라면 김일성은 도저히 집권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항일 경력에서 김두봉과 무정에게 뒤졌고, 공산주의 이론의 수준에서 박헌영에 못 미쳤으며, 연배와 지명도에서는 조만식에 비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과 마찬가지로 당시 북한도 역시 최대 주주는 역시 소련이었다. 남한에 비해 북한 정권의 도전자들은 항일투쟁을 주도한 세력이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정통성은 인정되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는 핸디캡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한계는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한국민들이 주체적으로 정치 행정을 전개하는 데 끝끝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남북한의 닮은꼴 위쪽은 19451020일 이승만이 연합군 환영 연설을 하는 모습이고, 아래쪽은 같은 해 같은 달 14일에 김일성이 연설하는 장면이다. 이들의 뒤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배석하고 있다. 권좌에 오르지 말았어야 할 자들이 남북한의 권력을 틀어줘으로써 분단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

분열로 날린 기회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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