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리라고 믿은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일본이 세계 최강인 미국을 물리치기 어렵다는 것은 객관적인 전력상 명백했으나 40년이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해방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회의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일본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어도, 또 1945년 초에 미군이 유황도와 오키나와까지 진출해서 일본 열도의 직접 공략을 눈앞에 두었어도, 사람들은 일본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막바지에 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시퍼런 서슬에 눌려 변변한 투쟁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곧이어 일본의 패전과 한반도의 해방이 다가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해방이 오기 1년 전인 1944년 8월 이들은 건국동맹(建國同盟)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어 놓고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혀 가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으로 올라와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했다. 그 그룹의 리더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관여했고, 공산당에도 가입했는가 하면, 외교 무대에서 국제적 활동도 벌였으니, 말하자면 당대의 거물들인 김구와 박헌영과 이승만을 한데 합친 듯한 인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에서 여운형이 그 세 사람보다 지명도가 낮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 왜곡이다).
‘준비된 후보’답게 건준의 활동은 신속하다. 해방 후 불과 보름 만에 전국적으로 145개 소에 달하는 지부를 설치하는가 하면, 선언서와 강령을 발표하고 치안대 조직까지 갖추었으니 이만하면 ‘건국준비’라는 이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활동이다. 사실 당시 건준은 수권 세력으로서의 위상이 충분했으니 그대로 새 독립국의 정부로 이어졌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반도 남쪽의 새 지배자가 된 미국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하다. 조선의 역사나 일본의 식민지 수탈 과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한반도는 일본과 같은 전범국일 따름이다.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자격으로 온 것은 그 때문이며, 즉각 군정청(軍政廳)을 차리고 식민지 지배 형식을 취한 것도 그 때문이다【물론 1943년의 카이로 선언과 1945년의 포츠담 선언에서는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을 뿐이며, 따라서 종전 후 독립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었다. 이것이 임시 정부의 유일한 외교적 성과인데, 여기에는 아마 두 회담에 모두 참여한 장제스가 대변인의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전면적으로 항전한 중국과는 아무래도 위상이 달랐기에 한반도는 종전이 되고서도 선언에 규정된 것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랬기에 중국에 파견된 미군은 철저히 자문의 역할에 국한 되었으나 한반도에서는 지배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진짜 전범국인 일본에 비해 중요도가 크게 떨어졌으므로,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연합군 사령부가 설치된 도쿄에만 신경을 쓸 뿐, 남한의 일은 오키나와에 있던 24군단장 하지에게 일임해 버린다. 한반도에 관해 철저히 무지한 상태에서 서울에 온 하지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에게서 항복 문서를 받는 자리에서 식민지 시대의 관리들을 모두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약속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한반도의 미래는 사실상 결정되어 버렸다.
이런 미군의 의도를 모르는 채(혹은 무시한 채) 건국 과정을 지휘하던 건준은 1945년 9월 초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대표자들을 뽑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이 일방적인 선언만으로 세워질 수 있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일단 건준은 그것으로 모든 활동을 마치고 발전적으로 해산했지만, 문제는 한반도의 오너인 미군이 모든 변화를 곧 ‘말썽’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인공이 내각 인선을 마친 9월 11일 같은 날에 미 군정청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공과는 별도로 미 군정청은 미군 장교들을 각 부처의 장관으로 임명해서 또 하나의 ‘내각’을 급조했으며, 미 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군정청은 곧 인공의 승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성명을 포고했다. 수권 조직이 미군의 말 한마디로 졸지에 불법 조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체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던 건준의 꿈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여운형으로서는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반도 북부에서는 그와 다른 해프닝이 벌어진다. 일단 여기에도 소련군이 진주했지만 사정은 남한과 크게 다르다. 우선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극동 전선에 참전했으니 미국처럼 주인 행세를 하기는 어렵다【소련이 반도 북부에 들어온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차피 한반도는 중국처럼 승전국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으므로 외국군이 진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남북한에 서로 다른 외국군이 들어옴으로써 장차 민족 분단의 씨앗이 배태된 것이다(따라서 한반도는 한국전쟁으로 분단된 게 아니라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고 봐야 한다). 소련의 의도는 뻔하다. 이미 1943년부터 연합국의 승리는 충분히 예상되고 있었으니까 소련은 전후에 재편될 세계 질서에서 미국과 양강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극동 전선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이 미국의 고문단을 받아들인 것에 소련은 더욱 자극을 받았음직하다(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소련이 발붙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북한에 온 소련군은 남한의 미군과는 정반대로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의 제스처를 취한다. 군정청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첫 포고문에서도 ‘조선은 해방됐고 조선의 미래는 조선인의 손에 달려 있다’고 발표한 소련의 태도는 일단 식민지 해방을 인정하면서 한국민에게 자유와 자율을 부여하려는 듯한 자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믿는 도끼는 따로 있었다.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김일성 일파가 그것이다.
8년 전 보천보 전투에서 얻은 명성은 33세의 김일성을 항일투쟁의 대표자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죽하면 나중에 그의 일파를 갑산파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미 군정청과 갈등을 빚은 남한의 수권 세력과 달리 소련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은 무주공산의 북한을 손쉽게 장악하고 권좌에 오른다. 한국민의 자체 정권을 세우지 못한 남한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엄혹한 시기에 투쟁을 방기하고 소련으로 도망쳤던 그가 권력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후 북한 정권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토지개혁, 단독정부) (0) | 2021.06.22 |
---|---|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분열로 날린 기회(신탁통치) (0) | 2021.06.22 |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모두가 침묵한 때(황국신민, 창씨개명, 총동원령, 광복) (0) | 2021.06.22 |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동북항일연군) (0) | 2021.06.22 |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일본의 야망(신간회, 신흥무관학교, 6ㆍ10만세운동) (0) | 2021.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