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Nationalism
오랜 기간 동안 동질적인 역사를 이루며 살아온 탓인지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거의 종교적이라 할 만큼 엄숙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탓에 문화 공동체인 민족을 무의식적으로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와 일치시키는 습관이 있다. 서양의 역사에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nat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민족과 국가를 모두 뜻하는 것이 그러한 역사의 흔적이다.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교회가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를 잃자 17세기부터 유럽 세계는 각국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각개약진(各個躍進)의 시대를 맞았다. 이 대분열기는 17세기 초의 30년전쟁에서 20세기 중반의 제2차 세계대전까지 300여 년 동안 지속되는데, 이 기간이 대체로 민족주의 시대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주의가 배타적이고 호전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19세기였다. 그 이전은 유럽의 민족국가 (nation-state)들이 속속 성립하는 초기였고 그 이후는 성숙한 민족국가들이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로 나뉘어 갈등을 벌이는 후기였다. 그 사이에 해당하는 19세기는 민족주의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였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가 보여준 광신적인 군국주의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나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쇼비니즘은 나폴레옹(Napoléon, 1769~1821)을 신처럼 숭배했던 쇼뱅((Nicolas Chauvin))이라는 프랑스 병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징고이즘이란 영국의 대러시아 강경책을 지지하는 군중이 즐겨 부르던 대중가요의 후렴구(‘by jingo’)에서 나온 이름이다.
19세기의 유럽 국가들은 정치ㆍ외교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했고, 경제적으로 치열한 무역 경쟁을 벌였으며, 때로는 군사적인 정면대결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는 이미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이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곧 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다툼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유럽 열강의 힘겨루기가 끝나자 민족주의는 식민지ㆍ종속국의 이념으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갓 해방된 신생국들은 일제히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했으며, 강대국들도 스스로 표방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묶여 민족주의에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생국들이 구호로 내건 민족주의는 유럽 역사에 등장했던 민족주의와는 사뭇 달랐다.
유럽 역사에 등장했던 민족주의가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민족국가의 수립을 지향했던 데 비해, 일찍부터 영토 국가와 1민족 1국가의 관념이 존재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족주의는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생국들은 식민지ㆍ종속국의 상태에 있을 때부터 외세에 반대하고 민족해방을 이루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렇듯 역사적 배경과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신생국의 민족주의는 독재 정권이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독재자들은 ‘민족=국가’의 등식을 날조해 이미 역사적으로 낡아빠진 군국주의적 민족주의를 종교적 교리처럼 강요했고, 사회적 비판 세력을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탄압했다. 우리 사회의 경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이나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민족주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도 민족주의를 슬로건으로 채택한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의 유신독재가 끝나고 전두환의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1980년대에 진보적 정치 세력의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가 정치적 식민지만 아닐 뿐 경제ㆍ군사적으로는 아직 식민지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1960~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조장한 게 우익 민족주의였다면 1980년대의 경우는 좌익 민족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좌익과 민족주의는 서로 형용모순의 개념이니 길 가던 개가 웃을 만큼 황당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좌익과 우익의 양 진영에서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내건 의도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민족주의가 특정한 정치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주요한 무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같은 첨단 매체 덕분에 정보와 가치관이 국경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쉽게 공유되고 보편화되는 오늘날에는 민족주의가 점차 힘을 잃어 갈수록 칼날이 무뎌지고 있다. 따라서 과도하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세력이 있다면 그 정치적 의도를 한껏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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