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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한국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행중인 역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에필로그 - 한국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행중인 역사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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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한국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행중인 역사

 

1948년 남북한의 경쟁적인 단독 정부 수립으로 한반도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우선 이제부터는 하나가 아닌 둘의 역사다. 더욱이 이 현대사는 아직 진행중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에 가깝다. 이 책을 이 시점에서 끝맺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적어도 남한에 관한 한 1948년부터 지금까지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유사 이래 최대의 비극이라 할 소모적인 내전이 있었는가 하면, 이승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겪었고, 그 뒤에도 다시 군사독재와 문민독재가 되풀이되는 간단치 않은 굴곡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1997년부터 몰아친 경제 위기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향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시사적인 사건들에도 역사의 두께가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전쟁만 봐도 그렇다. 이 전쟁을 2차 대전 후 두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에 의한 세계 분할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그럴 경우 전쟁의 성격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이 된다). 그러나 어린아이들 간의 싸움도 아닌 전쟁이 어찌 외세의 책동으로만 빚어지랴?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이라는 슬로건하에 김일성 정권이 도발하고, 그에 대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저항한 사건이다. 북한의 사회주의나 남한의 자본주의나 모두 정상적인게 아니었으므로 흔히 말하는 이념 분쟁이나 체제 갈등의 성격은 사실 매우 약하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간단히 말해서 남북한의 두 집권 세력이 정권 수호의 차원에서 피비린내나는 권력다툼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현상은 이미 조선시대 내내 지겨우리만큼 많이 본 바 있다.

 

그 뒤 남한에서 전개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역시 오랜 왕조시대를 지녀온 우리 사회 특유의 정치지상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공화의 전통이 전혀 없었던 우리 역사에서 외부로부터 이식된 공화정은 곧 왕정의 연장에 다름 아니었으며, 시민사회의 역사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구의 의회민주주의란 곧 조선시대 의정부의 다른 모습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명함상으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국왕으로서 절대권력을 누렸고, 국회의원들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처럼 때로는 권력자에 아부하고 때로는 권력자를 끌어들여 자파 세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열심이었다. 심지어 공화국의 국민들조차 스스로를 왕국의 백성들로 인식하고 있었다(1950년대에 실정을 거듭하는 이승만에게 백성들이 여전히 몰표를 준 것은 그 때문이다. 백성이 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리는 경제 위기도 예외가 아니다. 1897년 역사상 최초의 은행인 한성은행이 문을 연 이래 금융의 역사가 100년이 지났어도 아직 우리 사회의 국가와 은행과 기업들은 금융 자본주의의 기초인 신용의 개념을 체득하지 못했다(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담보 대출 만을 고집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다). 경제 규모로만 보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었음에도 국가 주도형 발전 전략 외에 다른 구상을 전혀 모르는 정부는 금융을 기업 활동의 보조적인 역할로만 이해했으며, 은행 역시 허울만 민간은행일 뿐 사실상 국책은행의 위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건을 싸게 만들어 비싸게 판다거나(산업 자본주의),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상업 자본주의)원리쯤은 굳이 자본주의라 명명할 필요도 없이 어린아이라도 아는 이치다.

 

자본주의가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려면 산업ㆍ상업자본주의보다 금융 자본주의에 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TV 9시 뉴스에 외국 민간기업인 신용평가회사가 발표하는 신용 등급이 톱기사로 나오는 현상을 목격하고서야 정부와 기업과 국민들은 비로소 신용이 장사꾼의 덕목에 불과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경제 지표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역사적 반성을 위해

 

과거가 비관적이라 해서 미래도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굴곡과 질곡이 많은 역사일수록 미래에는 더 큰 도약을 꿈꿀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그것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자각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대개의 나라들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한 번쯤은 모든 질서가 뒤집어지는 혁명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숱한 고통을 넘겼으면서도 정작 생산적인 혁명의 진통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민중처럼 지배층의 잘못에 너그러운 경우도 보기 드물다. 다른 나라의 역사 같으면 얼마든지 쿠데타나 민중의 반란으로 지배층이 교체되어야 마땅했을 상황에서도 우리 역사에서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고려의 현종(顯宗)과 조선의 선조(宣祖)가 북쪽(거란)과 남쪽(일본)의 외침을 맞아 각기 남쪽(나주)과 북쪽(의주)으로 도망쳤을 때도 왕조는 바뀌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고종(高宗)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나몰라라 하고, 순종(純宗)한일합병조약을 물리치지 못했을 때도 우리 민중은 싹싹하게(?) 복종하고, 나중에 그 못난 왕들이 죽었을 때도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진심으로 애도해주었다(일제에 항거한 것의 1/10만큼이라도 지배층에게 화살을 돌려야 하지 않았을까?). 해방 후에 친일파를 단죄해야 할 때도, 이승만이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 인도교를 끊으며 도망쳤을 때도, 또 박정희 유신독재가 끝난 뒤 황당하게 군사독재가 계속되었을 때도 민중은 무능한 지배층을 언제나 용서해주기만 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소같이 일 잘하고 쥐같이 겁이 많고 양같이 온순하여 가위 법이 없어도 능히 살겠다는 평판은 결코 우리 민족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노래와 춤을 즐기고 흰 옷을 사랑했다는 전통도 결코 미덕이 못 된다. 역사는 지배층 단독으로만 이끌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에서는 민중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조선시대 당쟁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자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와 행정의 모든 중심이 오로지 권력을 획득하는 목표에만 집중되어 있다(더구나 유학 이념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 과정에서도 보스를 중심으로 자파의 세력을 불리는 방식이 고수된다). 심지어 정치와 무관하게 진행되어야 할 행정, 예컨대 장기적인 SOC 국책사업조차도 정권이 바뀌면 성격과 진행 방식이 달라질 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과도한 정치 중심주의가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전근대적 행태가 온존되고 있는 이유는 한편으로 역사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부재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지배층의 그런 작태를 민중이 용납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인 변명을 말할 수는 있다. 세금을 예로 들어보자. 민주 국가에서 납세는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납세를 의무만이 아니라 권리로도 여기는 국민은 거의 드물다. 왜 그럴까? 고려와 조선의 왕토 사상에서 보았듯이 원래 우리 역사에서 모든 토지는 왕, 즉 국가의 소유였다(관리들은 봉급으로 토지의 수조권收租權만 받았고,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 경작시켜 생산물을 수취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나랏님의 땅을 갈아먹는 이상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을 뿐 거기서 무슨 권리 같은 걸 주장할 처지는 못 되었다(그와 달리 유럽의 왕조시대에는 영주가 토지 자체를 모두 소유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농민들을 착취하려면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방앗간이나 부두 시설 등의 이용료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 부패가 근절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렇듯 역사적인 데 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왕조시대의 백성과 달리 오늘날의 국민은 위정자를 선택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법적으로()은 민()을 지배하는 역할이 아니며, 관리(官吏)는 어디까지나 관리(管理)의 역할일 뿐이다. 그런데도 관리는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입장이고 국민은 여전히 권력 앞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라면, 그것은 공화국의 허울을 벗지 못한 왕국에 다름 아니다. 비판적 역사관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역사에는 지름길은 있을 수 있어도 비약이나 생략은 없다. 따라서 혁명으로 모순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원죄는 두고두고 우리 사회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분명한 사실은 올바른 역사의 비판이 행해질 때 그 걸림돌의 높이는 낮아질 것이며, 결국에는 제거될 수도 있으리라는 점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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