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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한 지붕 두 가족(대장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한 지붕 두 가족(대장정)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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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지붕 두 가족

 

초라하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금세 세력을 확장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도 접촉해 혁명당과 혁명군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이루어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통일전선 전술을 권장하고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아직 조직력에서 미약한 공산당이 국민당의 조직을 이용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일부는 중앙 집행위원에 올랐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념과 노선이 크게 다른 두 세력이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 내에서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국민당 좌파를 이루었고, 나머지 국민당 세력은 자연히 우파로 포진했다. 그런 상황에도 합작이 깨지지 않고 그런대로 굴러갈 수 있었던 이유는 지도자와 과제가 공통적이었기 때문이다. 쑨원은 당의 구심점으로서 합작에 충실했고, 남북이 분열된 상태에서 광둥의 국민당 정부로서는 무엇보다 북벌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1925년에 그 두 가지 요소가 거의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우선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던 쑨원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했다. 부드러운 권위로 양측을 중재하고 조정하던 지도자가 없어지자 국민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북벌의 경우에는 조건이 유리해진 게 오히려 합작에 독이 되었다.

 

1925515, 일본이 관리하던 상하이의 방적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노조 간부를 사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는데, 530일 가두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열세 명이 죽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상하이의 노동자 전체가 총파업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벌였으며, 상인들마저 가세했다. 530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 다시 반제국주의 의식이 퍼졌다. 국민당은 노동운동을 지원하면서 중국 민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제국주의와 결탁한 북부 군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으며,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서 국민당이 떠올랐다.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게 마련이다. 상황이 크게 호전되자 그동안 안으로 높아왔던 국민당 내부의 분열이 밖으로 터져버렸다. 국민당은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를 중심으로 좌파가 결집하고(공산당원이 아닌 왕징웨이를 우두머리로 삼을 만큼 당시 공산당은 좌파의 핵심이 되지 못했다)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중심으로 우파가 모이는 뚜렷한 분열 현상을 보였다. 북벌이 눈앞에 다가오자 남쪽에 치우친 광저우는 수도로서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당은 천도를 계획하는데, 장제스의 우파는 후보지로 난창을 주장했으나 좌파의 주장에 밀려 새 수도는 우한으로 정해졌다. 굴러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빼낸 격이었다. 장제스는 스승인 쑨원의 명으로 소련에 군사 유학도 갔다 왔지만(그 덕분에 장제스는 황푸黃埔 군관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는데, 그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데는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 지지한 덕이 컸다), 타고난 반공주의자였다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시대라면 몰라도 1920년대에 반공주의는 때 이른 감이 크다. 그 무렵에는 소련을 제외하고 세계 어디에서도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했으며, 유럽과 미국도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백안시하지 않았다. 당시 장제스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혐오하기보다 장차 공산당과 권력을 놓고 경쟁하리라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민족 해방과 반제국주의의 과제마저 팽개치고 권력 획득에 혈안이 되는 것으로 미루어 충분히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만년의 쑨원 부부 광둥군 장교들 한가운데 쑨원과 그의 아내 쑹칭링(宋慶齡)이 앉아 있다. 쑨원은 흔히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실상 그 별명에 어울리는 활동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금융 재벌의 딸인 쑨원의 아내 쑹칭링과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은 중국 현대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자매다.

 

 

때마침 국부군(國府軍, 국민당의 군대)이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것은 장제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마뜩잖은 합작을 피해 그는 상하이로 옮겨 우한 정부와 딴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저장(浙江)의 한 재벌이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보장했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의 5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장제스는 날개를 달았고,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는 초조해졌다. 장제스와 결탁할까, 아니면 그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당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까? 그러나 공산당이 후베이와 후난에서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이탈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로써 4년간에 걸친 어색한 밀월, 1차 국공 합작은 끝났다.

 

우한 정부가 기어들고 공산당이 당을 떠나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한껏 고무된 그는 국민당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로 연장하고자 했다. 국부군은 총공세로 북벌에 나서 불과 2개월 만에 20년간 중국 북부를 지배했던 북양군벌을 모조리 무찌르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10년간의 이상한 남북조시대가 끝났다. 통일을 이룬 장제스는 드디어 새 중앙 정부를 수립했다. 난징을 수도로 했기 때문에 이것을 난징 정부라고 부른다.

 

한편 지하로 들어간 중국공산당은 난징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27년 하반기에 몇 차례 봉기를 일으켜 해륙풍 소비에트와 광둥 코뮌 같은 소비에트 체제를 건설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국부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실패했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중앙의 명령에 따라 추수봉기(秋收蜂起, 추수기의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크게 실패하고 정치국원의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그 실패는 마오쩌둥에게 더없이 귀한 약이 되었다.

 

작전도 실패하고 당 중앙에서도 쫓겨난 참담한 신세로 마오쩌둥는 겨우 1000명가량의 잔여 병력만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몇 개월의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정치 실험을 통해 그는 장차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얻게 된다.

 

마오쩌둥은 징강산에 장시(江西)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사회주의적 토지 혁명을 실시했다. 모든 토지를 몰수한 다음 농민들의 가족 수에 따라 재분배하는 것이었는데,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공산주의 원칙의 구현이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성과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 혁명의 주력군이 될 홍군(紅軍)을 창설했다는 점이다.

 

국부군과 달리 공산당의 군대는 농민이 주축이었다. 자발적으로 모인 병사들이었으므로 사기는 높았으나 정규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군의 핵심이라 할 군기가 서 있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따른 엄격한 규율을 제정해 홍군이라는 정식 군대로 조련했다. “인민에게서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얻지 않는다.”라는 홍군의 강고한 규율은 이때 정해진 것이다.

 

국민당의 극심한 탄압에 움츠러든 공산당은 근본적인 노선을 재정비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급노동자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사회를 경제적으로 지탱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상황은 달랐다. 중국은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고 농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근대적 공업이 발달하면서 노동계급도 성장했지만 아직 농민에 비하면 힘에서나 세력에서나 미치지 못했다.

 

이론(마르크스주의)과 현실(중국적 상황)이 다른 만큼 공산당의 노선도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공산당이 탄생했으므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중심이 있었으나 점차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농촌을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믿은 마오쩌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리리싼(李立三, 1896~1967)이 이끄는 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당 지도부가 붕괴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상하이의 장제스 부하들은 희색이 만면한 데 반해 장제스(가운데)는 그렇지 않은 표정이다. 하기야 중국의 대권을 꿈꾸는 그가 난징 정권의 수반 정도에 만족할 리 없다.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우한 정부를 박차고 나와 결국에는 우한 정부까지 휘하에 끌어들였다. 사진의 장제스는 국공합작 따위에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이다.

 

 

1930년 공산당 지도부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도시 혁명론을 방침으로 정하고 홍군에게 창사(長沙)를 총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부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미국의 군수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모한 전투는 무참한 패배를 낳았다. 마오쩌둥도 이 작전에 참여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지도부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휘하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사태로 리리싼(李立三)은 실각하고 당권은 소련 유학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명한 판단으로 병력의 손실을 막은 마오쩌둥은 한껏 입지를

굳혔다. 1931년에 개최된 제1차 전국 공농병(工農兵) 대표대회에서 그는 공산당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당을 조직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홍군이 대도시 총공격에 나설 정도로 성장한 데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탄압을 넘어 본격적인 토벌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에 따라 1930년 말부터 1933년까지 4차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장제스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홍군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과 무기가 증가했다.

 

국부군은 정부의 군대인 데 반해 홍군은 인민의 군대였다. 무기에서만 뒤질 뿐 사기에서 크게 앞섰고 전략과 전술에서도 앞섰다. 홍군은 화력이 우세한 국부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전으로 맞서는 한편 작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적의 무기를 노획하고 투항자를 홍군에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유명한 유격전과 지구전 전술이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에게서 한 수 배운 장제스는 1933년 말의 5차 토벌 작전에서 마오쩌둥의 전술을 모방했다. 지구전이라면 우리가 적보다 못할 게 없잖은가? 그는 단숨에 홍군을 섬멸해버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한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경제를 봉쇄하는 조치를 내렸다. 수복 지구에서는 농민들에 대한 선무 공작과 더불어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 전술로 홍군을 고립시키고 유격전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효험을 보았다. 홍군은 점점 세력권을 잃으면서 근거지인 장시 소비에트로 밀려났다. 급기야 1934년에는 이곳마저 국부군의 포위망에 갇혔다.

 

 

농촌을 지나는 대장정 1934년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할 때는 그것이 역사적인 대장정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년에 걸친 혹독한 대장정은 홍군에게 두 가지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자칫하면 전멸할 뻔한 홍군의 주력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진에서 보듯이 중국의 드넓은 농촌 지대를 지나면서 민중에게 홍군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겨울을 눈앞에 둔 그해 10, 마오쩌둥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홍군이 태어난 곳이자 7년이나 근거지로 삼았던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는 것은 살을 깎아내는 듯한 아픔이었으나 홍군의 주력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86000여 명의 홍군은 비교적 느슨한 서쪽의 포위망을 뚫고, 역사에 대장정(大長征)이라고 기록된 기나긴 행군에 나섰다.

 

그로부터 꼭 1년 만인 1935년 산시의 새 근거지에 도착하기까지 홍군은 열여덟 개의 험준한 산맥과 열일곱 개의 큰 강을 건너며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게다가 국부군과 지방 군벌군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면서 행군해야 했다. 장정 도중에 새로 홍군에 편입되는 농민들도 적지 않았으나 끊임없는 전투와 가혹한 행군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장정을 마치고 난 뒤 홍군의 수는 거의 10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대장정이 가져온 승리감은 병력의 손실을 충당하고도 남았다. 온갖 역경을 헤치면서 홍군은 더욱 정예화되고 사기가 높아졌으며, 장정 중에 거쳐간 곳곳에서 혁명의 씨를 뿌렸다. 홍군 병사들과 고난을 함께하며 장정을 이끈 마오쩌둥은 소련 유학파를 물리치고 당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당권을 위협받지 않았다.

 

 

장정이 끝난 뒤 마오쩌둥(왼쪽)이 대장정 직후 외국 기자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홍군의 명장으로서 나중에 팔로군 총사령관이 된 주더와 마오쩌둥의 두 번째 아내 허즈전(賀子珍)도 함께 하고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험난한 공화정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한 지붕 두 가족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합작의 성과와 한계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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