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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하 - 21. 춘추라는 노나라 역사서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하 - 21. 춘추라는 노나라 역사서

건방진방랑자 2022. 12. 28.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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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춘추라는 노나라 역사서

 

 

4b-2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왕도를 구현하는 위대한 왕들의 활동이 종식되면서 ()도 같이 사라졌다왕자지적(王者之迹)’()’을 왕자의 순수(巡狩)로 보거나, 또 순수하면서 민요를 채집하기 위하여 울리는 목탁(木鐸)으로 보는 설도 있다. 즉 성왕들의 시()를 채집하는 활동이 종식되면서 시가 사라졌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에 관해서는 주나라의 평왕이 낙읍(洛邑)으로 동천(東遷)하면서 왕도가 쇠퇴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가 사라진 연후에 비로소 춘추(春秋)가 일어났다沃案: ‘()’지어졌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나 나는 그런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이라는 ()이라는 사서(史書)가 있었고, ()나라에는 도올(檮杌)이라는 사서가 있었고, ()나라에는 춘추(春秋)라는 사서가 있었는데, 결국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성격의 것이다.
4b-21. 孟子曰: “王者之迹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 晉之乘, 楚之檮杌, 魯之春秋, 一也.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은 제환공(齊桓公)진문공(晋文公)에 관한 것이고 그 문장은 각 나라의 사관들이 기록한 것이다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晋文公)만의 일을 기록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춘추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오패(五霸)의 일이고, 오패의 대표가 제환공ㆍ진문공이었으므로 춘추시대의 정치사를 기록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기문즉사(其文則史)’()’는 사관이다. 공자는 이러한 기록에 대하여 바른 인륜의 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가필하고 해석을 가하였다. 공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그 포펌의 대의(大義)를 나는 춘추라는 문헌 속에 은밀하게 구현하여 놓았다.’”
其事則齊桓晉文, 其文則史. 孔子曰: ‘其義則丘竊取之矣.’”

 

매우 문제가 많은 로기온자료인데 그 세부적 토론은 끝이 없다. 등문공9의 공도자장의 논의와 같이 참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어차피 맹자의 논의는 앞 두 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케리그마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맹자의 선포(proclamation)이다.

 

우선 왕자지적(王者之迹)이 식멸하고 시()가 사라졌으며, ()가 망한 연후에나 춘추가 지어졌다는 일반적 논의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거유(巨儒) 다산은 그의 맹자요의강진(康津) 유배 중의 저술로서 1814년 다산 53세에 완성 속에서 시()가 망했다는 것도 터무니 없는 일이며, 시가 망한 후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어불성설이라고 일반주석을 싸잡아 비판한다. ()는 나라가 어렵게 되면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는 법이며, 13국풍이 모두 동천(東遷) 후의 작품이며, 동천 이후에도 정풍(正風), 변풍(變風), 소아(小雅), 대아(大雅)와 노()국의 송()이 무성하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공자가 스스로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 나라로 돌아온 뒤로 음악이 바르게 되고, ()와 송()이 각기 제자리를 얻었다’(9-14)고 했는데 어찌 시가 망했다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더구나 춘추는 공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사례는 문헌상으로 수없이 입증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일부 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춘추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요약하여 말한다면 시가 망한 연후에 춘추가 작하였다는 말은 시가 왕자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가지고 있었던 기능, 즉 노래 자체가 인간세의 포폄을 담당하던 풍송주포(諷誦誅褒)’의 기능, 다시 말해서 노래로써 천자를 기도하고, 제후를 벌주거나 상주기도 하던 기능이 사라지게 되자, 그 기능을 춘추라는 역사서로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통하여 시교(詩敎)를 대신하였다는 것이다. 전체적 문맥으로 본다면 맹자의 논의의 핵심은 마지막에 공자의 말로서 나오는 ()’에 있다. 따라서 시는 왕자의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그 왕자의 권위인 시와 상응하는 권위를 춘추가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대체적으로 다산의 논의는 적확하다고 평할 수 있다. 공자의 역사적대업이 춘추를 빌은, ()를 부각시키기 위한 포폄의 필법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바로 맹자의 케리그마를 정당화시키는 치란(治亂)의 역동적 전기를 확고하게 부각시킨다.

 

춘추(春秋)라는 것은 봄ㆍ가을의 의미이므로 시간의 추이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 언어이다. 길이를 장단이라 말하고, 높이를 고하(高下)라고 말하듯이, 시간을 춘추(春秋)로 말하는 것은 흔한 용법이다. 봄과 가을이라는 환절기야말로 세월의 추이를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모우먼트이기 때문이다. 묵자(墨子)라는 책에는 백국춘추(百國春秋)』 『주지춘추(周之春秋)』 『연지춘추(燕之春秋)』 『송지춘추(宋之春秋)』 『제지춘추(齊之春秋)등의 명칭이 보이고, 국어(國語)진어(晉語)에 진나라의 이야기로서 춘추를 학습하였다는 사례가 보이기 때문에 춘추는 당시 사서의 일반 통칭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 진()에는 ()이 있었고, ()에는 도올(檮杌)이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특별한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진과 초의 춘추에 대한 별명으로서 전해내려오던 이름인 것 같다.

 

()’은 이해가 쉽다. 혹자는 ()’이 전부승마(田賦乘馬)의 일을 기록의 한 것이라고도 하고(조기), 당시의 행사를 기재한다는 뜻이 있다고 하나(주희), ‘()’에 수레바퀴의 뜻이 있으므로 시간의 추이를 나타내는 역사서의 이름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이름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그 자체로 역사를 의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나라의 도올(檮杌)은 좀 이해가 어려운 이름이다. 일설에는 도올악목(惡木)’을 뜻하는데 거기다 악한 일들을 적어놓아 후세에 대한 경계로 삼았다는 것이다. 귀감의 뜻이 담겼다고 할 것이다. 혹설에는 그것이 흉악한 짐승 즉 악수(惡獸)의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는 아주 상서로운 짐승 즉 서수(瑞獸)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신이경(神異經)의 기록에 의하면 서방의 황야에 사는 짐승인데 호랑이 비슷하게 생겼는데 호랑이보다는 몸집이 더 크고, 그 털의 길이가 2척이나 되며, 얼굴은 사람얼굴인데 발은 호랑이발이라고 한다. 이빨이 산돼지 같이 생겼고 꼬리는 18척이나 된다고 한다. 혼자 황야를 어슬렁거리며 싸우게 되면 후퇴를 모르는 장엄한 동물이 도올이라고 한다. 좌전문공 18년조에 보면 이와 같은 재미있는 언급이 있다: ‘전욱씨(顓頊氏)에게 소질이 좋지 못한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이 되도록 교훈을 할 수가 없었고, 좋은 말을 분별할 줄을 몰라 좋은 말을 해주어도 완악하여 받아들이지를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마구 지껄이고, 큰 덕을 지닌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행동하여 하늘의 항상스러운 도를 어지럽히니 천하사람들이 그를 도올이라 불렀다[顓頊有不才子, 不可教訓, 不知話言. 告之則頑, 舍之則嚚, 傲很明德, 以亂天常. 天下之民, 謂之檮杌].”

 

결국 도올은 중국의 시조인 헌원(軒轅) 황제(皇帝)의 손자인 전욱의 아들이다. 왜 이토록 악명의 인물이나 악수의 이름이 초나라 역사서의 이름이 되었을까? 그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 옛 신성한 청동기 제기에 동물의 얼굴을 성화(聖化)의 문양으로 주조하듯이, 악수가 되었든 서수가 되었든 도올이라는 짐승의 얼굴을 초 나라 역사서를 성화시키는 문양으로 사용한 데서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공자가어』 「정론해편에 보면 공자가 진지(晋志)를 읽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 또한 ()일지도 모르겠다. 공자는 다양한 사서를 접한 사람일 것이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인간의 주체의식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일을 인간이 주체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기록한다는 것은 이미 인문정신이 고도화된 정신풍토가 아니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정착된 인문주의를 역사의식과 결부시켜 고민한 사상가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맹자는 그러한 역사의식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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