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삼국사기』 미스터리② 본문

카테고리 없음

종횡무진 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삼국사기』 미스터리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7:49
728x90
반응형

삼국사기미스터리

 

 

그렇다면 건국한 지 200년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삼국의 역사서를 편찬할 마음을 먹게 된 이유도 분명해진다. 우선 중국의 송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더구나 중국의 중심인 중원을 오랑캐인 금나라가 차지하면서 고려 정부에게는 이제부터 모든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전까지 몰랐던 삼국에 관한 역사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인종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압력을 가한 인물이 당시 금의 황제인 희종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금의 입장에서도 고려가 송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유리했을 테니까). 하권에서 보겠지만 17세기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 조선에서 실학이 발달하게 되는 배경과 마찬가지다.

 

둘째 미스터리는 삼국사기의 편찬에 사용된 사료(史料)들이다. 소설을 쓰려 한 게 아니라면 당연히 편찬자들은 당대의 사료들을 참고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에게도 무려 1천년 이상의 까마득한 옛날이었으니 사료가 없다면 편찬할 엄두도 낼 수 없다. 당시 그는 가장 주요한 사료로서 중국 측 사서들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만으로 삼국의 역사를 구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의 역대 제국들은 예외없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주변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중국의 변방으로서만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 변방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그런 중화적 관점의 역사 서술 방식에도 이름이 있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부른다. 춘추공자(孔子)가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서가 아니라 공자가 유교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한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비롯되어 이후의 중국 역사서들은 대부분 공자의 서술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이 다른 오랑캐나라들과 맺은 외교 관계를 모두 중국에 조공했다고 기록하는 게 그런 예다. 춘추필법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도 유교적 대의명분이므로, 중화세계에 치욕적인 사실들은 마음대로 왜곡하고 변경해서 서술하는 게 허용되며, 오히려 그게 올바른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권장될 정도였다. 따라서 중국 측 사서만 참고서로 이용했다면, “대무신왕(大武神王) 412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부여를 쳤다든가 고이왕(古爾王) 310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사슴 40마리를 잡았다는 식의 상세한 연대적 기록이나, 삼국의 인물들을 다룬 열전(列傳) 부분은 도저히 서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데는 중국 측 사서보다도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기록들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의 곳곳에서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신라고서(新羅古書)등의 옛 기록[古記]에서 인용한 부분을 싣고 있다. 하지만 삼국의 왕계에 관해 연도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물론 앞서 2세기에 관한 기록에서 보았듯이 연도가 틀린 경우도 많지만), 그는 아마 그런 고기들 이외에도 삼국에 관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역사서들도 참조했을 가능성이 짙다(아마 그것들은 삼국이 직접 편찬한 고구려의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같은 문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록들이 모두 후대에는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를 편찬한 뒤 그 기록들은 얼마 안 가서 폐기처분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나서 그 옛 기록들을 공식적으로 없애 버린 것은 아닐까? 김부식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범인은 조선왕조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간행된 뒤에도 일부 기록들은 남아 있었고,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일연 같은 고려 말의 문인들은 그것들을 참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개국 초에 옛 기록들에 대한 대대적인 폐기 작업이 실행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만약 그런 역사적 범행 이 실제로 있었다면 두 용의자(김부식과 조선 왕조) 모두 동기는 똑같다. 유교적 사관과 사대주의 성향에서는 한반도의 독자적인 역사서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까.

 

 

라이벌 역사서 유교사관과 사대주의, 신라중심주의로 왜곡된 역사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정사(正史)? 삼국사기의 이 두 가지 측면 중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언론인이자 민족사학자인 신채호는 첫 번째 측면에 관해 통렬하게 공박했다. 신채호가 연재를 시작한 조선사. 신채호의 글은 해방 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인용

목차

연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