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丁若鏞)
새로운 유학 체계를 꿈꾼 마지막 대가
조선의 가장 남쪽에 강진이란 마을이 있다. 그곳에 어느 유배자가 18년 동안이나 머물게 된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이다.
표면적으로 그의 유배 생활은 무척 고독하고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고달픈 유배 시기는 정약용이라는 조선의 한 유학자를 19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탁월한 유학 사상가로 만드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이곳 강진에 머물면서 정약용은 19세기 동아시아 사상계에 유행했던 여러 종류의 사유 경향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희의 신유학, 마테오 리치의 서학, 청나라의 고증학 그리고 일본의 고학 등 다양한 사유와 치열하게 논쟁한 끝에, 마침내 정약용은 자신만의 고유한 유학 체계를 집대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조선 후기 유학 사상사의 빛나는 별이 아닐 수 없다.
경세학의 집대성자
정조(正祖)가 사망하고 노론(老論)이 다시 정국을 지배하게 된 1801년부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뜻하지 않은 유배자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유배 기간이 18년 넘게 지속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고독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치권에서 망각되어 홀로 늙어갔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고독한 유배자였지요. 하지만 사상가로서 책을 통해 위대한 대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에서 그는 절대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18년이 넘게 지속된 그의 유배 기간은 오히려 학문적으로 행운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이때 정약용은 기존의 사유 전통들과 싸우면서 충분히 자신의 사유를 가다듬고 숙고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로써 우리는 그가 남긴 방대한 규모의 저술들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는 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836년 그가 타계한 뒤 방대한 그의 저술들은 단지 몇 벌의 필사본으로 남아 세상에 떠도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저술들이 상당히 위험한 순간을 맞이했던 셈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 실학자들의 글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짐작건대, 지금도 아마 어느 시골집의 벽지나 창호지로 사용되어 어처구니없이 소실된 실학자의 글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약용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난 1899년, 우연한 계기로 그의 저술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으니까요. 『황성신문(皇城新聞)』 1899년 4월 17일~18일자에, 당시 주필이며 뒷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해진 장지연(張志淵, 1864~1920)은 자신의 논설을 통해 정약용을 ‘아국(我國)의 경제학 대선생(經濟學大先生)’이라고 부르면서 화려하게 부활시킵니다. 아마도 장지연은 정약용의 필사본에서 쇠약해져 가는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정치ㆍ경제적 개혁정책을 읽어냈던 것 같습니다.
장지연은 방대한 정약용의 저술 가운데 특히 경세학(經世學)에 주목했습니다. ‘경세학’이란 글자 그대로 세상을 경영하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운영하고 세상을 경영하는 의미의 경세학은 요즘 말로 경제학이나 아니면 정치학, 사회학 정도에 해당되겠지요. 과거 정약용 사상에 대한 연구를 주로 사학이나 정치학, 사회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사회과학적 방면에서 진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지연 이후 정약용은 세상을 구제할 개혁이론의 선봉장처럼 이해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정약용의 사유를 사회과학적인 시선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은 자신의 묘지명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바로 유명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입니다. 이 묘지명에서 정약용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 자신의 몸을 닦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린다”고 역설했습니다. 정약용 본인의 포부를 들어보면, 그는 자기 수양을 위한 경학(經學)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경세학(經世學)을 모두 중시했음을 알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경세학은 근본으로서의 경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경학과 경세학을 본말(本末)의 관계, 다시 말해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했으니까요.
여기서 경학이란 유학 경전들에 대한 주석학적 연구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수많은 유학자들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주석을 통해서만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세상에 피력할 수 있었습니다. 주희도 『사서집주』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밝히지 않았습니까? 정약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학 경전들에 대한 독창적인 주석서를 씀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철학적 입장을 밝힐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약용의 경학 저서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약용의 경학, 즉 그의 철학 체계에 대한 연구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정약용의 철학 체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 경향들이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첫째는 주자학의 완성자인 주희의 사유이고, 둘째는 서학을 동아시아에 유포시킨 마테오 리치의 사유이며, 셋째는 일본에서 실존적으로 주희의 사유를 극복하려고 했던 고학파 유학자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의 사유입니다. 정약용은 바로 이 세 가지 부류의 사유 경향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체계를 세우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사유 체계를 통해 유학 경전들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과거에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차피 공자와 맹자의 유학 사상에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연결시키려면, 유학자들은 유학 경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약용의 사유를 음미해보려는 독자들은 그가 남긴 경학 저술들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의 경학 저술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주희가 사서로 규정한 『논어』ㆍ『맹자』ㆍ『중용(中庸)』ㆍ『대학(大學)』에 대한 정약용의 주석서, 다시 말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ㆍ『맹자요의(孟子要義)』ㆍ『중용자잠(中庸自箴)』ㆍ『대학공의(大學公議)』 등입니다. 이 밖에도 매우 중요한 저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정약용의 사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지요.
반주자학자, 탈주자학자
정약용은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해체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불교적 관념을 비판하면서 주자학, 곧 성리학을 왕조의 정통 이념으로 채택했지요. 그런데 이 주자학이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매우 경색됩니다. 다시 말해, 현실 변화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사변적인 논쟁 수준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변적인 논쟁을 통해서 불가피한 현실의 변화와 개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회 내부적으로 정통 이념인 주자학의 아성과 권위에 도전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이 매우 무력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터라, 주자학의 유효성과 가치에 대한 반발이 여기저기서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쯤 들어보았을 윤휴, 박세당 같은 인물들이 이런 와중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자학을 신봉한 자들에게서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판결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말하자면 주자학에 대한 이단이라고 해서 사약을 받은 것이지요. 이로써 자유로운 논쟁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퇴계와 율곡의 시대에 비해 몹시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적 분위기로 바뀌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큰 흐름은 누구도 막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미 1600년대 초부터 청나라를 통해 서구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사상 등,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외래의 사유 경향들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호(星湖) 이익(李瀷, 1579~1624) 같은 실학파 학자들이 속속 배출됩니다. 그들은 당시 정권을 장악한 노론 계열 학자들에 비해 서구 사유에 보다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었지요. 물론 노론 계열에서도 홍대용 같은 인물들이 북학파(北學派)의 흐름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론보다는 역시 이익 문하의 남인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보다 많은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우리가 실학자로 알고 있는 상당수 학자들이 여기에 포함되며, 지금 살펴보는 정약용 역시 남인 계열 학파의 마지막 자리쯤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정약용을 실학(實學)의 집대성자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 실학이란 명칭에는 기존의 관념적인 주자학을 비판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을 반주자학자나 탈주자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정약용 역시 그렇게 불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특히 정약용 같은 인물은 조선시대 주류 담론이었던 주자학에 대해 그렇게 단순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자학의 사변성에 대해 비판적인 칼날을 들이대면서도, 자신의 철학에 부합되는 몇 가지 측면들은 잘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은 주희의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했습니다. 만물 속에 공통된 원리[理]가 내재되어 있다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지요. 그는 오히려 모든 개별자는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희가 미발의 때에 본성을 함양하라고 한 공부에 대해서도 불신했습니다. 선불교의 선사들이 면벽참선(面壁參禪)하면서 내면에 갇히는 공부와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주희의 인심도심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다
그러나 정약용은 주희가 만년에 집필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보자 마음이 달라집니다. 정적인 함양 공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태 속에서 드러난 인심과 도심의 싸움으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한 주희의 관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요. 급기야 주자학을 비판해왔던 정약용은 주희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만은 유학의 도를 잇는 핵심적인 관건이라고 극찬합니다.
맹자가 죽은 뒤 도(道)의 흐름이 드디어 끊어졌다. 전적들은 전국시대에 소멸되고 경전들은 진시황과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다. (…) 한나라 유학자들이 경전을 설명할 때 모두 문자상에서 훈고했을 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 소체(小體)와 대체(大體)의 구별에서는 어떤 것이 인성(人性)이며 어떤 것이 천도(天道)인지에 대해 모두 막연하여 듣고도 알지 못했다. (…) 자기로써 자기를 극복하는 것은 모든 성왕(聖王)들이 마음으로 전하고 은밀하게 건네준 오묘한 뜻이요, 요긴한 말이다. 이에 밝으면 성현이 될 수 있고 이에 어두우면 곧 금수가 된다. 주자가 우리 도(道)의 중흥조(中興祖)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중용(中庸)』의 서문을 지어서 이런 이치를 밝혔기 때문이다. 『논어고금주』 6: 1~2
孟子之沒 道脈遂絶 籍滅于戰國 經焚于秦項 (…) 漢儒說經 皆就文字上 曰詁曰訓 其於人心道心之分 小體大體之別 如何而爲人性 如何而爲天道 皆漠然聽瑩 (…) 以己克己 是千聖百王 單傳密付之妙旨要言 明乎此則可聖可賢 昧乎此則乃獸乃禽 朱子之爲吾道中興之祖者 亦非他故 其作中庸之序 能發明此理故也
맹자지몰 도맥수절 적멸우전국 경분우진항 (…) 한유설경 개취문자상 왈고왈훈 기어인심도심지분 소체대체지별 여하이위인성 여하이위천도 개막연청형 (…) 이기극기 시천성백왕 단전밀부지묘지요언 명호차즉가성가현 매호차즉내수내금 주자지위오도중흥지조자 역비타고 기작중용지서 능발명차리고야
정약용은 주희를 유학의 새로운 중흥조, 곧 공자 이후 유학을 다시 한 번 흥기시킨 대단한 인물이라고 논평합니다. 우리가 흔히 정약용을 주자학 비판자라고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요. 그만큼 정약용은 전통 학문에 대해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가 주희를 칭찬하는 까닭은 주희가 『중용(中庸)』에 대한 서문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중용장구서」에서 인심과 도심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맹자 이후에 끊어진 유학의 도통을 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학의 도를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그리고 맹자의 대체소체론(大體小體論)으로 이해하는 정약용의 고유한 관점이 깔려 있지요.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의 자기로써 또 다른 자기를 절제하고 조절하는 공부를 의미합니다. 곧 인심이라는 육체적 욕망을 도심이라는 윤리적 마음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 인심과 도심의 대립적 구도가 주희에 이르러서야 보다 명확히 밝혀졌다고 보는 것이 정약용의 입장입니다.
그는 주희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가장 지혜로운 성인에게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매우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한 구절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주희의 이 말은 앞으로 어떤 성인이 태어난다 해도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고 한 주자의 설명은 성인이 태어난다 해도 바뀌지 않는다. (『심경밀험(心經密驗)』 2:29).”
이 구절은 모든 인간에게 육체적 욕망과 도덕적 욕망 두 가지가 병존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성인이든 광인이든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보았지요.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육체적 욕망을 도덕적 욕망으로 조율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어떤 마음이 싹텄을 때 그것이 도덕적 마음인지 아니면 비도덕적 마음인지부터 구별하라고 말합니다. 마치 주희가 두 마음을 구별하는 정(精)의 공부를 강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한 뒤에 인심의 마음을 억누르고 도심의 마음을 길러서 배양하라고 권합니다. 이 또한 주희가 일(一)의 공부라고 해서 강조했던 것이지요.
본성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다
인심도심(人心道心)의 공부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정약용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지요.
무릇 하나의 생각이 발동하면 곧바로 두려워하고 맹렬히 반성하면서 말한다. “이 생각은 공적인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인가, 사적인 인욕(人欲)에서 나온 것인가, 이것은 도심(道心)인가, 인심(人心)인가?” 세밀하고 절실하게 연구하여 이것이 과연 공적인 천리라면 배양하고 확충하며, 혹여 사사로운 인욕에서 나왔다면 막고 꺾어서 극복한다. 군자가 입술이 타고 혀가 닳도록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변론을 열심히 전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퇴계는 일생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에 힘썼다. 그러므로 이발과 기발을 나누어 말하면서 이 구분에 밝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학자가 이런 뜻을 살펴 깊이 체득한다면 퇴계의 충실한 무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문집(詩文集)』 「이발기발변이(理發氣發辨二)」 12:18
凡有一念之發 卽已惕然猛省曰 是念發於天理之公乎 發於人欲之私乎 是道心乎 是人心乎 密切究推 是果天理之公則培之養之 擴而充之 而或出於人欲之私則遏之折之 克而復之 君子之焦唇敝舌而慥慥乎理發氣發之辯者 正爲是也 苟知其所由發而已 則辨之何爲哉 退溪一生用力於治心養性之功 故分言其理發氣發 而唯恐其不明 學者察此意而深體之 則斯退溪之忠徒也
범유일념지발 즉이척연맹성왈 시념발어천리지공호 발어인욕지사호 시도심호 시인심호 밀절구추 시과천리지공즉배지양지 확이충지 이혹출어인욕지사즉알지절지 극이복지군자지초진폐설이조조호리발기발지변자 정위시야 구지기소유발이이 즉변지하위재 퇴계일생용력어치심양성지공 고분언기리발기발 이유공기불명 학자찰차의이심체지 즉사퇴계지충도야
이 글은 정약용이 40세 이후에 쓴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에 대한 논변」의 일부입니다. 이(理)가 발동하기도 하고 기(氣)가 발동하기도 한다고 본 관점은 이황의 고유한 입장이었지요. 젊었을 때 정약용은 퇴계 선생의 이기(理氣)에 관한 주장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히려 율곡 선생의 이기론을 더 좋아했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입장이 조금씩 바뀝니다. 퇴계와 율곡을 함께 인정하다가 나중에는 다시 퇴계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정약용이 퇴계 선생의 이발(理發)을 도심의 발동으로, 그리고 기발(氣發)을 인심의 발동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처음에는 선배 유학자들이 이기를 논한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정약용은 이제 입장을 바꿔서 그들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정약용은 주희의 학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주자학이 지배한 조선시대의 전통 학문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정약용은 인간에게는 인심과 도심의 두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도심의 마음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윤리적인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마음을 정약용은 우리의 본성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본성과 주희가 말한 본성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정약용의 본성론은 성기호설(性嗜好說)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본성을 마치 구체적인 기호나 욕망 작용과 같이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정약용은 본성이 아무런 힘도 없이 죽은 사물처럼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고 본 주자학적 관점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도덕적 욕망을 가진, 자신만의 본성 개념을 새롭게 정의 내립니다. 그에게 본성이란 마치 우리가 배가 고프면 먹고 싶듯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선한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 강력한 욕망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지요.
정약용은 이런 본성이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천명(天命)이라고도 말합니다. 천명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명령을 의미합니다. 그에 따르면, 천명이 있었기에 우리는 선천적인 본성을 타고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선천적으로 선을 행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선을 알고 선을 실천하려는 윤리적 욕망
정약용은 타고난 본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마음 상태를 곧 도심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윤리적 행동이란 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지요.
성(性)이 드러난 것을 도심이라고 한다. 도심은 항상 선을 하고자 하고, 또한 선을 선택할 수 있다. 한결같이 도심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들으면 이것을 성을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성을 따른다는 것은 천명을 따르는 것이다. 불의(不義)한 음식이 앞에 있을 때 입과 배의 욕구가 넘쳐나겠지만 마음이 고하길 “먹지 마라! 이것은 불의한 음식이다”라고 하면, 나는 그 고함에 따라서 음식을 물리치고 먹지 않는다. 이것을 성을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성을 따른다는 것은 천명을 따르는 것이다. 『중용자잠(中庸自箴)』 1:3
性之所發 謂之道心 道心常欲爲善 又能擇善 一聽道心之所欲爲 循其欲 玆之謂率性 率性者 循天命也
성지소발 위지도심 도심상욕위선 우능택선 일청도심지소욕위 순기욕 자지위솔성 솔성자 순천명야
사실 천명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대 유학 경전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천명은 간혹 인격적인 하늘, 즉 상제(上帝)의 명령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지만, 인간이 부여받은 선천적인 본성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정약용 역시 인간의 윤리적 본성을 아예 천명지성(天命之性)이라고 불렀지요. 인간에게는 이러한 천명지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이기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은 물론이려니와 퇴계 이황, 그리고 주희까지도 이런 입장을 기본적으로 공유했습니다. 따라서 천명으로부터 받은 선천적 본성에 대한 강한 신념은, 전통 유학 사상에서 정약용이 배웠던 중요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지요. 더구나 앞의 유학 사상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천적 본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추론 능력 또는 사유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희와 이황 그리고 정약용에게 기본적으로 본성이란, 선(善)을 알고 선을 행하려는 윤리적 욕망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정약용은 우리에게 천명지성이 있기에 평생동안 작은 선행 하나라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도덕적 생활에서 선천적 본성이 없어서는 안 될 토대라고 본 것이지요.
형이상학적 유학을 넘어 실천적 유학으로
정약용은 주희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매우 좋아했지만, 주희가 말한 미발의 함양 공부나 내면에 깃든 인의예지 본성에 대한 설명은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정약용이 공자와 맹자의 인의예지 개념을 다르게 해석했음을 말해주지요. 그는 공자가 말한 인(仁)을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인이란 한자는 사람 인(人)과 두 이(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정약용은 바로 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지요.
옛 전서에 따르면 인(仁)이란 글자는 인(人)과 인(人)이 중첩된 문자였다. 아버지와 자식은 두 사람이고 형과 동생도 두 사람이며, 군주와 신하도 두 사람이고 목민관과 백성도 두 사람이다. 무릇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古篆仁者 人人疊文也 父與子二人也 兄與弟二人也 君與臣二人也 牧與民二人也 凡二人之間 盡其本分者 斯謂之仁 天地生物之心 干我甚事
고전인자 인인첩문야 부여자이인야 형여제이인야 군여신이인야 목여민이인야 범이인지간 진기본분자 사위지인 천지생물지심 간아심사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나는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말하거나, 신하가 자신의 군주에게 충성하면서 “나는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군주에게 충성한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사태의 실정에 대해 상당히 해를 미칠 것이다.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1:36
爲人子者 孝於其親曰我以天地生物之心 孝於親 爲人臣者 忠於其君曰我以天地生物之忠 心於君 恐於事體有多少損傷
위인자자 효어기친왈아이천지생물지심 효어친 위인신자 충어기군왈아이천지생물지충 심어군 공어사체유다소손상
정약용이 말했듯이, 주희는 공자가 말하고 맹자가 강조한 인(仁)의 관념을 천지의 마음[天地之心], 즉 만물을 낳고 기르는 우주적 마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주희가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서의 인을, 인간적 차원을 넘어선 우주적 지평으로까지 확대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런 시선이야말로 유학의 본뜻을 잃게 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지요. 그가 볼 때 인이라는 덕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모습을 일컬을 뿐입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친근하게 인을 해석해야 윤리적 실천에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지요. 그래서 정약용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도대체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 어느 순간에 천지의 마음 같은 것을 떠올리는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하가 군주를 섬길 때도 앞에 있는 군주의 상태만을 생각하지, 언제 천지의 마음을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공자의 유학 사상을 보다 실천적으로 해석하려는 정약용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는 공자의 인(仁) 개념 뿐만 아니라 맹자의 인의예지설도 주희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주희는 인의예지 네 가지 덕목[四德]이 내 마음 안에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이 덕목들이 밖으로 드러난 네 가지 단서[四端]가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덕이 토대가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단이 실현되어 나온 것이라고 본 셈이지요. 그러나 정약용은 주희와는 반대로 해석합니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네 가지 마음일 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朱熹 | 丁若鏞 |
四德(內) →(外現) 四端(外) | 四端 →(擴充) 四德 |
四德: 先天的 理 | 四德: 최상의 도덕적 상태 |
知 뿐 아니라, 行까지 따라야 함 |
인의예지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 네 가지 단서야말로 내가 처음 깨닫게 되는 윤리적 욕구라고 이해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네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삼아 조금씩 확충해가면, 마침내 언젠가는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덕목들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곧 그 순서가 사단에서부터 사덕으로 나아간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정약용은 이런 관점에 따라 인의예지 덕목들은 구체적인 행동, 즉 행사(行事) 이후에 성립될 수 있는 명칭이라고 주장합니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 이후에 성립된다. 어린애가 우물에 빠질 때 측은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없다.
若其仁義禮智之名 必成於行事之後 赤子入井 惻隱而不往救則不可原其心而曰仁也
약기인의예지지명 필성어행사지후 적자입정 측은이불왕구즉불가원기심이왈인야
한 그릇의 밥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羞惡)의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음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의(義)’라고 말할 수 없다.
簞食嘑蹴 羞惡而不棄去則不可原其心而曰義也
단식호축 수오이불기거즉불가원기심이왈의야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는데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예(禮)’라고 말할 수 없다.
大賓臨門 恭敬而不迎拜則不可原其心而曰禮也
대빈림문 공경이불영배즉불가원기심이왈예야
선한 사람이 무고를 당했을 때 시비(是非)의 마음이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분별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지(智)’라고 말할 수 없다.
善人被讒 是非而不辨明則不可原其心而曰智也
선인피참 시비이불변명즉불가원기심이왈지야
이에 네 가지 마음[四心]이란 인성이 본래 가진 것이며, 네 가지 덕[四德]이란 네 가지 마음을 확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직 확충하지 못했다면, 인의예지라는 명칭은 끝내 성립될 수 없다. 『맹자요의(孟子要義)』 2: 23
是知四心者 人性之所固有也 四德者四心之所擴充也 未及擴充則仁義禮智之名 終不可立矣
시지사심자 인성지소고유야 사덕자사심지소확충야 미급확충즉인의예지지명 종불가립의
정약용은 인의예지 사덕이 가장 마지막에 실현되는 도덕적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와 달리 사심으로서의 네 가지 마음, 즉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은 바로 앞에서 네 가지 단서라고 말한 사단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것이 인간 마음에서 처음으로 작동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반드시 이 사심을 구체적인 실천의 영역인 행사(行事) 차원에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체적 현장에서 그 마음을 확충하고 더 강하게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아이가 몹쓸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현장을 내가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오로지 나 혼자입니다. 이런 상황에 아이 편을 들다가는 괜히 나까지 큰 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붙잡힌 아이가 측은하고 불쌍하긴 했지만, 나는 재빨리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길을 바꿉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정약용이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분명 나를 인(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아무리 아이에게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느꼈다 할지라도 결국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정약용은 주희와 같은 성리학자들이 자기 마음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의 본성이 있다고 감탄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성리학자들은 자기 내면에 사로잡혀 본성의 아름다움만 동경했다고 비아냥거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측은지심을 느꼈을 때 당장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측은지심을 크게 확충하여 실제로 아이를 구해야만 비로소 그 사람이 인(仁)하다고 평가한 것이지요. 정약용이 인의예지의 명칭은 구체적인 행동 이후에 성립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토 진사이의 견해를 따르다
한편 정약용은 인의예지의 내용을 새롭게 이해함과 아울러 구체적인 공부 방법에서도 주희와는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주희는 네 가지 덕목이 모두 나의 본성 안에 들어 있으므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라고 권고합니다. 곧 미발의 함양 공부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약용은 이런 공부는 공맹(孔孟) 같은 성인들의 자세가 결코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인의예지가 행사를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그 덕을 이루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의예지가 본심(本心)의 완전한 덕이라고 알면, 사람의 일은 다만 벽을 향하고 마음을 들여다보고서 빛을 돌려 내면으로 비추도록 하여, 이 마음의 본체를 텅 빈 듯이 밝고 또렷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마치 인의예지의 네 낱알이 있는 것처럼 본다면, 어슴푸레 나의 함양 공부를 인의예지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할 뿐이니, 이것이 어찌 옛 성인들이 힘쓰던 것이겠는가? 『맹자요의(孟子要義)』 1:22
仁義禮智 知可以行事而成之 則人莫不俛焉孳孳 冀成其德 仁義禮智 知以爲本心之全德 則人之職業 但當向壁觀心 回光反照 使此心體 虛明洞澈 若見有仁義禮智四顆 依俙髣髴 受我之涵養而已 斯豈先聖之所務乎
인의예지 지가이행사이성지 즉인막불면언자자 기성기덕 인의예지 지이위본심지전덕 즉인지직업 단당향벽관심 회광반조 사차심체 허명통철 약견유인의예지사과 의희방불 수아지함양이이 사기선성지소무호
정약용은 주희의 공부법이 그의 인의예지 관점에서부터 불가피하게 도출되었다고 분석합니다. 다시 말해, 인의예지라는 덕목이 인간 마음속에 있다고 보았기에 당연히 그것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불교에서 벽을 향하고 앉아 자기 내면을 응시하듯이, 그렇게 마음속만 뚫어져라 살펴보았다는 뜻이지요. 이런 사람은 세상 밖으로 나아가 부모를 섬기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백성들을 구제하는 구체적 행동을 실천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인의예지란 반드시 행동을 통해 실천의 지평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외부적 덕목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의예지 덕목이 행사 이후에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은, 일본 고학파 유학자 이토 진사이의 독창적인 견해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앞에서 살펴본 진사이의 주장이 생각나는지요? 그는 공자의 충서(忠恕)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타자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인물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진사이는 인의예지가 실천 이후에 완성되는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에서 정약용의 인의예지 정의는 진사이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약용은 자신이 이런 관점을 알게 된 것은 성호 이익의 제자인 선배 유학자들을 통해서라고 밝힌 적이 있지요. 이미 이익의 문하생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학뿐만 아니라 일본 고학파 등을 비롯한 다양한 외래 학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정약용의 독특한 인의예지 관점이 일본 고학파의 창시자인 이토 진사이의 입장에서 연유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여러분은 앞에서 정약용이 주희의 전통적 입장을 수용한 측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명지성으로부터 연원한 도심의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이 도심의 마음을 구체적 실천의 문맥에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도심이 행사(行事)에서 힘을 발휘하여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마음을 인(仁)하다고 부를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렇듯 정약용은 천명지성과 도심의 측면에서는 주자학의 관점을 따른 반면, 구체적인 윤리적 덕목의 실천에서는 일본 고학파 유학자들의 관점을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철학 체계에 가장 효과적인 관점들을 취사선택할 줄 알았던 그의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유학자들의 본성론과 신부의 자유의지론
정약용 철학의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한문으로 지은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입니다. 예수회 소속 신부인 그가 처음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명나라 말기, 정확히 말해서 1583년의 일입니다.
사실 그가 중국으로 들어간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천주교를 중국인의 내면에 심기 위한 선교의 일환이었지요. 그런데 리치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당시 중국인들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중국의 전통 철학, 특히 주희의 신유학적 사유와 먼저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희의 사유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천주교의 교리를 중국인들에게 그럴듯하게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치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취했던 전략을 중국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려고 시도합니다.
중세 기독교의 이론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철학을 이용하여, 아직 기독교를 믿지 않는 유럽인들에게 기독교를 심어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리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이용해 주희의 신유학에서 주장한 이기론에 대적하려 했습니다. 주희는 이(理)를 세계의 절대적인 원리라고 생각한 반면, 기(氣)는 개별자들의 다양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리치는 주희의 이를 개별자들의 단순한 속성으로 추락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이를 기의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일정하고 규칙적인 패턴 정도로 이해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리치가 주자학의 이의 관념을 붕괴시키려고 한 것은 정약용이 주희의 이기론을 비판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정약용은 구체적 개별자들이 가진 다양한 속성을 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주자학의 절대적 토대의 하나인 이(理) 개념을 무력화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리치의 『천주실의』가 철학적으로 중요한 보다 깊은 이유는, 이 책에서 리치가 동양의 사유 전통에 낯설었던 자유의지론을 강력하게 피력했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도 당연히 선(善)을 선택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주체의 의지 작용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본성의 힘에 의존하면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지요. 맹자가 강조하고 주희가 철학적으로 더욱 정교화한 인의예지 본성론에 따르면, 우리는 본성의 자연스러운 명령에 따르려고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자면, 이 경우 유학자들이 언급한 의지란 리치가 도입한 자유의지로서의 의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을 결정하고 구성하는 자유의지를 천명한 리치
리치는 인간의 자유와 자유에 따른 선택 행위가 전제될 때에만 선과 악이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선악 개념이란 것 자체가 자유의지를 토대로 해야만 정립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동양의 유학 사상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선천적 본성이 천명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절대적인 선이 이미 천명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리치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은 유학자들이 생각했던 본성과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리치는 이성적 추론 능력을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꼽았지만, 학자들은 선을 좋아하고 선을 하고픈 감성적 욕망을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리치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 추론 능력을 통해 옳고 그름을 변별하고,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이 결정한 것을 선택하는 행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세상의 존재물이 이미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의지를 따를 수도, 그만둘 수도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덕(德)도 부덕(不德)도, 선도 악도 존재하게 된다. (…) (짐승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이 옳은 예[是禮]이든 옳지 않은 예[非禮]이든, 어찌할 수 없어서 행한 것일 뿐이며, 게다가 그들은 이 점을 스스로 알지도 못한다. 어떻게 선인지 악인지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세상의 여러 나라에서 제정한 법률에는 짐승의 부덕함에 벌을 주거나 짐승의 덕행에 상을 주는 일이 없다. 오직 사람만은 그와 같지 않아서 밖으로 일을 실행하지만 안으로는 이성적인 마음(理心)이 있으니, (하는 일이) 옳은지[是] 그른지[非] 합당한지[當] 아닌지[否]를 지각할 수도 있고, (그에 따라서 그 일을) 할 수도 그만둘 수도 있다. 『천주실의』 6 : 3
凡世物旣有其意, 又有能縱止其意者, 然後有德有慝有善有惡焉. (…) 其所爲, 是禮非禮, 不但不得已, 且亦不自知, 有何善惡之可論乎? 是以天下諸邦, 所制法律, 無有刑禽獸之慝, 賞禽獸之德者. 惟人不然, 行事在外, 理心在內, 是非當否, 嘗能知覺, 兼能縱止.
범세물기유기의, 우유능종지기의자, 연후유덕유특유선유악언. (…) 기소위, 시례비례, 부단부득이, 차역불자지, 유하선악지가론호? 시이천하제방, 소제법률, 무유형금수지특, 상금수지덕자. 유인불연, 행사재외, 리심재내, 시비당부, 상능지각, 겸능종지.
리치의 말에 따르면,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윤리적 선악의 가능성이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자유롭게 선택했을 때에만 우리는 행위자에게 잘잘못의 책임을 따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리치가 들었던 예를 한번 들어보지요. 바람에 날려 내 머리에 떨어진 기왓장에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기왓장에는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비록 어떤 짐승이 내 자식을 물어서 다치게 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 짐승에게 윤리적 책임을 부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짐승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리치에게는 자유로운 의지 작용이야말로 선을 결정하고 구성하는 핵심적인 항목이었습니다.
자유의지의 도입
그런데 이 자유의지론에 누구보다도 정약용이 강한 호기심과 관심을 표명했지요. 기존의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의지라는 말을 본성을 따르려는 수양 공부에 적용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리치의 경우처럼, 자유의지 작용이 없으면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부를 수 없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유학에서 측은지심이란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선천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리치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저절로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은 결코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주체의 의지적 선택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학자들은 당연히 이 측은지심이야말로 선한 마음의 대표 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약용은 리치의 입장에 가까운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저절로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느끼는 것은 마치 불길이 타오르고 샘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적극적 노력을 통해 선을 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매번 악을 지을 때마다 한쪽에서는 욕망이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밝게 저지하는 것은 곧 본성이 부여받은 바의 천명이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라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악이 섞여 있다는 설명의 경우, 만일 하늘이 성(性)을 이와 같이 부여했다면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로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공(功)이라고 하기에 부족하게 된다.
每遇作惡 一邊發慾 一邊沮止 明沮止者 卽本性所受之天命也 天命之謂性 非是之謂乎 若所謂善惡渾者 天之賦性旣如此 則人之行善 如水之就下 火之就上 不足爲功能
매우작악 일변발욕 일변저지 명저지자 즉본성소수지천명야 천명지위성 비시지위호 약소위선악혼자 천지부성기여차 즉인지행선 여수지취하 화지취상 부족위공능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어서 선을 원하면 선을 행하게 하고 악을 원하면 악을 행하도록 했다. (선악이) 변동되어 확정되지 않았으니, 그 선택권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이것은 짐승에게 확정된 마음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진실로 자신의 공이 되고, 악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진실로 자신의 죄가 된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선택권(權衡)이지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이 아니다. 『맹자요의(孟子要義)』 1 : 34
故天之於人 予之以自主之權 使其欲善則爲善 欲惡則爲惡 游移不定 其權在己 不似禽獸之有定心 故爲善則實爲己功 爲惡則實爲己罪 此心之權也 非所謂性也
고천지어인 여지이자주지권 사기욕선즉위선 욕악즉위악 유이부정기권재기 불사금수지유정심 고위선즉실위기공 위악즉실위기죄 차심지권야 비소위성야
위의 인용문에서 ‘자유로운 선택권’이라는 표현은 정약용이 ‘권형(權衡)’이라고 부른 것을 의역한 것입니다. 권형이란 원래 저울을 뜻합니다. 옛날에 사용한 저울은 보통 가운데 중심추를 놓고 양옆에 기준이 되는 물건과, 무게를 잴 또 다른 물건을 놓아서 서로 균형을 맞추는 도구이지요. 정약용은 저울의 이미지를 통해 옳고 그름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한 권형의 능력이란 두 가지 대립적 갈등 속에서 하나를 선택할 줄 아는 윤리적 결단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살펴본 인심과 도심의 경우, 두 마음 가운데 도심의 마음을 선택해서 따르는 작용을 권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약용의 권형 개념이 리치의 자유의지에 가깝게 된 것은, 그가 권형의 작용 없이는 본성의 선함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 때부터입니다. 아무리 천명지성이 선하고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윤리적 행동으로서의 선함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그가 본성의 선천적 선을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약용은 선의 가능성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서, 반드시 부여받은 본성 외에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권형의 능력이 함께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강조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저절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끼더라도 반드시 구체적인 행사의 영역에서 노력을 거듭해야 비로소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매번 우리의 의지를 통해 측은지심을 다시 선택하고 또 확충해나감으로써 인간은 윤리적으로 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의 마음 이론을 새롭게 체계화하다
고독한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주희, 마테오 리치, 이토 진사이 등 다양한 경향의 사상가들과 오랫동안 씨름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정약용이 어느 누구의 입장에도 쉽게 경도되지 않는 놀라운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주희의 이기론을 치열하게 공격했습니다. 이 점에서 정약용은 리치와 진사이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가 리치와 진사이의 사유를 맹목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리치와 진사이 등의 사상가에게서 합리적인 요소들을 수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공격했던 주희에게서도 많은 측면을 흡수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자 정약용은 이들 사상가들의 다양한 관점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 자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약용 사유의 정합성과 체계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총괄하자면 마음[靈體] 안에는 세 가지 이치가 있다. 본성을 말하면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한다. (…) 권형(權衡)을 말하면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다. (…) 행사(行事)를 말하면 선을 하기는 어렵고 악을 하기는 쉽다. 『심경밀험(心經密驗)』 2: 28
總之靈體之內, 厥有三理. 言乎其性則樂善而恥惡. (…) 言乎其權衡則可善而可惡. (…) 言乎其行事則難善而易惡.
총지영체지내, 궐유삼리. 언호기성즉락선이치악. (…) 언호기권형즉가선이가악. (…) 언호기행사즉난선이이악.
정약용의 이 짧은 이야기는 그가 세 명의 대가들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종합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이라는 개념이 주희의 사유와 연결되고, 권형이라는 개념이 리치의 사유와 연결된다면, 행사라는 개념은 진사이와 연결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요. 물론 마음의 세 가지 기능으로 설명되는 본성, 권형, 행사라는 개념들은 정약용만의 고유한 심론(心論) 체계에서 유기적으로 묶여 있어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기호(嗜好)로서의 본성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존재하지만, 육체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도덕적 기호를 항상 실천하기는 힘든 행사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유의지의 함의를 지닌 정약용의 권형이라는 개념이 의미있게 등장합니다. 권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윤리적으로 고뇌하고 결단할 수 있게 되지요.
“도덕적 기호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 평안과 안락을 따를 것인가?”
정약용은 반드시 이런 주체의 결단과 선택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인의예지에 어울리는 선의 명칭을 붙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선천적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發露)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명지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측은지심을 행동의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윤리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주저함을 경험합니까? 바로 그때 정약용이 말한 권형의 저울질이 거듭 필요합니다. 본성의 명령인 도심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욕구인 인심을 따를 것인가? 정약용은 자신의 마음 이론을 체계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사상가들의 영향을 능동적으로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향 관계를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체계 속에 융해시켰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종합 이론가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마치 거대한 용광로가 다양한 형태의 철물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듯이, 정약용의 시선에 포착된 당시의 여러 사상 경향들도 서로 맞물리면서 융합되었습니다. 바로 정약용이 집대성한 철학과 사유 체계 속에서 말이지요.
더 읽을 것들
1, 『다산 맹자요의』(정약용, 이지형 옮김, 현대실학사, 1994)
정약용의 저서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의 저술들이 실려 있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아직도 원문조차 모두 번역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히 중요한 그의 저서들 몇 권이 번역되어 일반 독자들도 정약용의 사상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동아시아 철학의 집대성자였던 정약용의 유학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이지형이 번역한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많은 번역서들 가운데 유독 이 책을 택한 이유는, 정약용의 『맹자요의(孟子要義)』가 유학자로서의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 가장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지형의 번역서는 번역 상태가 매우 훌륭해서 일반 독자들이 편하게 읽기에도 손색이 없습니다.
2.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금장태, 이끌리오, 2005)
사실 정약용과 관련된 책들은 넘치고 남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책이 눈에 띄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온 저자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한 사료 고증을 거쳐서 탄생된 정약용 평전이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정약용의 삶과 사상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의 풍경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다산에 대한 통속적인 존경심을 거둬내면서, 그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한 시대를 살면서 고민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정약용의 인간적 삶과 사상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3. 『정약용의 철학: 주희와 마테오 리치를 넘어서 새로운 체계로』(백민정, 이학사, 2007)
이 책은 나의 박사학위 논문 「정약용 철학의 형성과 체계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구성한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정약용이 19세기 동아시아에 유행했던 다양한 철학적 경향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철학의 집대성자' 였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일반인들이 직접 살펴보기에는 좀 어려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구성은 정약용의 사상적 특성들을 잘 파악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주희와 서양의 마테오 리치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사유 체계를 구성한 정약용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정약용의 유학 사상에는 일본 고학, 중국 양명학(陽明學), 청대 고증학, 조선 후기 성호학풍 등 다양한 사상적 경향들이 모두 녹아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런 측면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연구서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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