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교육(敎育)

교육입국론 - 3. 제도론

건방진방랑자 2022. 2. 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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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도론

 

 

1. 새로움의 창출만이 퇴몰을 막는다

 

 

교육에는 진보ㆍ보수가 없다

 

교육에는 진보ㆍ보수가 없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혁신교육감시대로 규정한 것도, 교육감을 사소한 몇몇의 방법론적 기준에 의하여 진보와 보수라는 카테고리로써 분류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매사에 보수를 싫어하지만 진보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역사의 진보(the Progress of history)를 신봉하지 않는다. 나는 헤겔의 역사철학적 사관이나 칼 맑스의 경제발전단계설적 유물사관류의 필연주의적 역사주의(historicism)를 거부한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 그 자체는 인간의 언어행위나 가치관의 소산인 진보라는 개념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다. 역사는 진보하지도 퇴보하지도 않는다. 역사에 진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보사관은 발전을 중심에 두고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한다.  

 

 

 

역사주의의 허구성

 

진보적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 진보적인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 역사는 진보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로 퇴보적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 퇴보적인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면 역사는 하시(何時)고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인간과 상관없이 역사 그 자체가 저 혼자 슬그머니 진보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매우 기만적인 역사인식이요, 역사기술이다. 고조선의 역사보다 오늘의 21세기의 역사가 진보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넌센스다. 그것은 관념적 편견이며 비과학적 환상이다. 역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역사의 모든 가치는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다.

 

고대ㆍ중세ㆍ근대를 운운하는 모든 서구적 역사인식방법이 인간의 주체성을 외면한 기만적 필연성의 관념을 부지불식간에 역사 그 자체에 덮어씌운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고대(노예제)ㆍ중세(봉건제)ㆍ근대(자본제)의 법칙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모두 기독교적ㆍ아포칼립스적 섭리사관(攝理史觀)의 교활한 변형에 불과하다.

 

 

역사를 발전적으로 보려는 흐름은 하나의 방편일 순 있으나, 절대적일 순 없다.  

 

 

 

주역이 말하는 혁명의 의미

 

보수란 기존의 것을 보존하고[] 지킨다[]는 뜻인데, ‘기존의 것그 자체가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보존과 지킴이 추구하는 안정(stability)이라는 것은 결국 서서한 퇴락과 몰락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퇴몰을 막는 유일한 길은 새로움(novelty)을 창출하는 것이다. 창신(創新)의 요소를 도입하지 않는 모든 조화는 정체된 죽음의 조화일 뿐, 곧 시들고 만다. 새로움의 창출, 그것을 일컬어 혁신이라 하는 것이다.

 

혁괘(革卦, )를 보면 연못 한가운데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다[澤中有火, ]. 그 얼마나 버거운 타오름이냐? 혁명이란 본시 이와 같이 불리한 조건에서 타오르는 것이다. 물에 금방 파묻힐 수도 있는 불길이지만, 결국 그 불길이 연못 전체를 들끓게 하고 만다. 그것이 혁명이요, 혁신이다!

 

혁신교육감시대라고 하는 것은 국민들의 정성의 불씨가 모여 지펴놓은 가냘픈 연못 속의 불길과도 같다. 그것은 이 시대의 필연적 존재론적 규정이 아니라 17명의 교육감의 정의로운 삶의 양식과 혁명적 사유가 주체적으로 창조해야 할 새로움의 당위인 것이다. 이 당위를 거부하는 어떠한 보수세력도 국민의 선의지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지니깐 교육감선거제도까지 없애겠다고 난리를 핀다. 자멸의 망언일 뿐!

 

 

 

촛불집회에서 타오르는 촛불도 버거운 타오름이다.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힘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2. 교육보수주의의 실상

 

 

보수와 진보의 학교론, 가치론

 

앞서 나는 보수 교육철학과 진보 교육철학의 진리에 대한 관점을 절대적ㆍ상대적, 고착적ㆍ역동적, 선재적ㆍ상황적인 시각의 차이로써 규정한 바 있다. 그렇게 되면 선()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도, 불변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학생의 행동이나 습관 그리고 그 평가방식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을 선재적으로 전제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모든 가치는 시대의 변화와 그때마다 등장하는 인류의 욕구에 맞추어 재구성되어야 하며 영구적인 선악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학교의 존재이유에 관해서도, 이성주의적 입장에서 명료하게 규정하며, 가정환경이나 도제체제로써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집단적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으로써 자만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를 낳는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학교에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는 없다고 보며, 그것도 지성의 개발보다는 전인발달이나 개인의 발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흔히 생각하기로 정자세로 앉아 미동도 없이 한 시간을 버텨내는 것을 교육이라 생각하기 쉽다.  

 

 

 

한국적 보수의 진면목

 

이러한 논의를 끝없이 전개할 수도 있겠으나 우선 우리는 한국의 현황적 맥락에서 보수주의진보주의니 하는 개념의 명료한 근거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치에 과연 진정한 보수가 있는가? 그렇다고 쥐뿔개뿔 진정한 진보가 있는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한국정치에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다는 것을! 그럼 뭐가 있는가? 그것은 너무도 쉬운 얘기! 오직 기득권에 집착하여 개인의 부귀영달을 꾀하는 승냥이들의 완고한 집단만 있고, 그들의 폭압과 위압에 항거하여 그래도 다수의 민중이익을 방패막이로 내거는 투쟁집단이 있을 뿐이다. 자생의 이즘(ism)의 대결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육에 있어서도 이즘의 대결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여태까지 진보주의라고 표현한 것은 영어로는 리버랄리즘이 되는데, 리버랄리즘은 보통 자유주의로 번역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유주의라는 어감은 보수주의의 대칭이 아니라, 곧바로 보수주의의 이론적 보루가 되는 상황이 허다하다.

 

 

자유주의는 나쁜 말이 아니지만,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말로 바뀌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보수의 가치로 외치게 됐다. 

 

 

 

한국적 자유주의는 개인주의ㆍ이권주의ㆍ패권주의일 뿐

 

한국의 자유주의는 국가주의ㆍ시장주의를 표방하는데, 그들의 국가주의는 보편주의적 가치기반을 무시한 철저한 개인의 이권주의ㆍ패권주의의 둔갑형태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기존의 이권얼개일 뿐이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민족주의를 결하며, 친미적 종속주의와 반공론적 분열주의를 결탁시킨다. 따라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개인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론적 함수를 나열하여 한국의 정치ㆍ교육상황을 범주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보수주의란 무엇인가? 이 실체를 명료히 깨닫는 것은 실상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한국의 교육보수주의는 실상 입시교육주의이며, 입시교육에 성공적인 여건을 이미 보유한 기득권자들의 엘리트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엘리트주의의 실상을 깨닫는 데도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이 엘리트주의의 궁극적 근원은 일제식민지교육에 있었던 것이다.

 

 

 

교육은 엘리트주의로 입시교육이며, 그 뿌리는 일제식민지교육에 있다. 

 

 

 

3. 교육보수주의와 식민지 멘탈리티

 

 

한국의 보수는 식민지 멘탈리티의 연속태

 

우리 국민이 가난하고 힘없고 부당하게 억압받던 일제식민지시절! 그나마 구한말로부터 시작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까지 짧은 신교육의 각성기가 있었지만, 그 꿈은 산산이 좌절되었다. 독자적인 폴리테이아(πολιτεία, 플라톤이 국가라는 책에서 정부의 형태라는 의미로 씀)의 주체기반을 갖지 못한 우리 민중에게 있어서 교육을 받아 신분의 상승이나 확보를 성취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확고한 길이 의대를 가서 의사가 되거나,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 의사가 되면 돈 잘 벌고 일경에게 정치범으로 몰리지 않고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고, 법관으로 임관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면 일본인과 거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착각 속에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집요하게 만연하는 의대ㆍ법대병, 특히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에로의 집착병은 바로 이 식민지 멘탈리티의 완고한 연속태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교육의 가치가 서울대로 집약되고 그게 모든 가치를 점유하는 세상. 그 근본엔 식민지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식민지교육의 정체: 독립하면 안 된다

 

식민지교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독립을 가르치지 않고 영원한 의존과 굴종을 가르치는 것이다. 식민지교육은 식민지의 신민(臣民)을 가르치는 것이다. 누구든지 테라우찌(寺內正毅, 1852~1919: 육군 대장. 초대 조선총독)의 입장이라면 이 원칙을 당연히 고수했을 것이다. 그런데 독립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과연 교육이냐? 내가 기르는 닭을 보아도 병아리의 교육은 오직 병아리가 독립하도록, 다시 말해서 독자적인 삶을 스스로 살 수 있도록 환경과 싸우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도올에게 봉혜는 선각자처럼 깨달음을 주는 존재였다.

 

 

최근 고교 사회과목에서 헌법지식과 독자적인 삶의 판단의 방법론을 강화하는 건강한 교과서를 만드는 커리큘럼 개선의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헌법을 학생들이 배워 헌법정신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적 법률적 지식을 갖는 것조차도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세력에 의하여 그러한 노력은 좌절되었다. 역사교과서의 문제도 가급적인 한 다양한 역사해석을 가능케 하는 격조 높은 차원에서의 사관의 확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일제강점기의 모든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저급한 역사기술을 강요하려 했다. 사실 일제시대사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사의 기술만 보아도 아직도 매우 판에 박힌 조잡한 사관에 머물러 있다. 국사는 이러한 이념적 논쟁의 희생물이 되어 필수과목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겪고 있다. 도대체 자기역사를 필수로 가르치지 않고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하나의 역사만을 가르치려는 치졸함. 그대로 생각이 고정될 거란 어이없음.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와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헌장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우리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언어로써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민족의 독립을 두려워하는 식민지교육의 완고한 연속상에 불과한 것이다. 18861030일에 반포된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보라! 모든 학문적 성취와 덕성이 오로지 천양무궁(天壤無窮)의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는 것으로 구조 지어져 있다. 그리고 뒤이어 이러한 진술의 내용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이며, 천황 스스로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실천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1968125일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은 거의 동일한 사상구조와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굴종과 희생의 정신만을 강요하는 국민교육헌장은 한 시대의 병폐일 뿐만 아니라, 만고의 역적이다. 

 

 

 

 

4. 교육의 지향점은 자유가 아닌 협력이다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 역사이념의 체현

 

교육이란 그 교육이 처한 역사가 체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상적 상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교육은 인간형성(Human Building)이다. 빌딩에는 설계도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 역사사회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념의 체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희랍인들의 교육은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폴리스는 전쟁국가였다. 도시국가간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전사(Warrior)들을 길러내지 못하면 존속이 불가능한 커뮤니티 형태였다. 따라서 희랍의 모든 교육이념은 어떻게 이상적인 전사를 길러내느냐 하는 명제로 집약된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보면 너무도 끔찍한 전체주의적 사유에 치를 떨게 된다. 가혹한 몸 규율의 강요, 철저한 재산공유, 우생학적 목적을 위한 가족관계의 철저한 파기, 엄마ㆍ아버지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결혼은 완벽하게 국가가 조종한다, 애조풍(哀調風)의 리디아 음악이나 흥겨운 이오니아 음악이 금지되고 용기를 북돋는 도리아 음악, 극기와 절제를 자아내는 프리지아 음악만 허용된다, 시인이나 비극적 드라마는 추방된다. 이러한 괴이한 교육론도 그가 처한 아테네의 현실 속에서는 매우 리얼한 현실적인 이상이었다.

 

서양 중세사회가 지향한 인간상의 이념은 전사가 아닌 종교적 성직자였으므로, 그 교육철학도 중세보편성을 지향하는 종교교육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의 교육은 뿌리 깊은 중세기의 종교적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문주의적 전략(humanistic strategy)이었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귀족국가였다. 조선조의 교육철학은 바로 그러한 사회의 귀족관료를 수급하기 위한 군자(君子)를 길러내는 방편으로서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때의 교육엔 그 시대의 인간상이 들어 있다. 미국의 전쟁영웅이 되어야 했던 캡틴 아메리카, 그처럼 우린 독자생존하는 인간형을 바란다. 

 

 

 

시민이란 무엇인가

 

자아!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은 무엇일까? 전사일까? 성직자일까? 군자일까? 인문학자일까?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을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민주시민인 것이다. ‘시민(市民)’이란 무엇인가? ()의 민()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의 사람이다. 한마디로 장돌뱅이인 것이다. 장돌뱅이를 서구 역사학에서 부르죠아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상행위의 자유를 보장받기를 원하는 개체들이었다. 이 부르죠아가 프롤레타리아로 확대되고, 프롤레타리아가 20세기 민족국가에서 다시 국민으로 확대되어 오늘의 보편적 시민의 개념을 형성한 것이다.

 

 

2016년에 있었던 교컴 수련회. 여기서도 시민성이란 말이 등장한다.  

 

 

 

20세기 대중교육의 등장

 

이 시민의 개념과 더불어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할 개념이 대중교육(mass education)’이다. 한 국가에 소속한 구성원 전체를 국가의 돈으로 집단적으로 교육시킨다고 하는 발상은 산업혁명의 고도의 발전과 그에 수반된 20세기 민족국가의 성립, 그 이후에나 성립한 인류의 새로운 체험이다. 1세기의 실험으로는 아직도 인류가 이 체험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현재 국방비의 2배 가까운 돈을 대중교육에 쏟아 붓고 있다. 대중교육의 소이연은 대중사회 즉 민주사회의 균질된 인력의 형성, 그리고 평균적 가치의 보편화라는 테제로 집약될 수밖에 없다.

 

 

대중교육이 잘못 흐르면 전체교육이 된다. 어떤 가치를 중시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시민의 제1덕성: 자유 아닌 협력

 

그런데 이러한 평균적 가치의 시민상의 핵심을 자유(libertas)’로 생각하는 것은 거대한 오류이다. 민주는 오직 성숙한 인간의 관계망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도덕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민주사회 제1의 명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시민의 제1의 덕성은 자유가 아니라, 협력이다.(The primary virtue of a citizen is not freedom, but cooperation.)” 자유는 소극적 가치이며 협력은 적극적 가치이다.

 

바로 시민사회를 형성해가는 주축수단인 대중교육의 소이연은 바로 협력하는 인간(homo cooperativus)’에 있는 것이다. 시민은 개인의 모든 덕성을 포섭하지만, 반드시 협력을 전제로 해야만 시민다움을 구현할 수 있다. 협력이란 유기적 전체에 대한 부분의 복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는, 칸트 미학의 과제상황이 시사하듯이, 부분들의 협력을 위하여 가설적으로, 유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대중교육의 구현체인 공교육의 장은 고등한 지능(high intelligence)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협력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제1원리를 우리는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협력은 자기절제와 대의의 존중을 전제로 한다.

 

어느 회장님이 아주 특별한 엘리트 고등학교를 만들기 이전에 상의를 하러 나의 서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의 구상의 부당함을 계속 지적했다. 그러한 소수 엘리티즘의 구상, 사교육의 최고급의 가능성을 정규교육에 포섭하고자 하는 그의 구상은 결코 미래를 크게 내다본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기관에서 배출된 인재가 국가에 유용한 인물로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것을 뛰어넘는 진정한 혁신적 발상을 나는 제시했다. 당시 그 회장님은 나의 언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재웹툰이야말로 협력을 제대로 보여준 경우라 할 수 있다.  

 

 

 

 

5.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 아닌 보통을 위한 교육

 

 

식민지교육이 폐허에서 피어난 혁신학교운동

 

일제식민지교육의 폐해를 극복한 것은 우리 학생들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었다. 3·1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그들이 산 시대에 항거했지만 그 항거를 억누르려는 식민통치자의 후손들은 식민지배를 계속 강화해나갔다.

 

그 변통을 모르는 타락의 소돔과 고모라의 현장에서 민중 스스로의 각성에 의하여 솟은 불길이 바로 해공 신익희가 다닌 바 있었던 너무도 초라한 남한산초교에서부터 시작한 혁신학교운동이다. 이 학교는 1912년 개교한 이래 해공 신익희가 다닌 바 있는 유서 깊은 학교였으나 20003월 기준으로 학생이 26명밖에 남지 않았다. 폐교의 위기상황에 몰린 교장과 교사들은 의기투합하여 혁신적 발상으로 창의적인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방에서 이 학교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에 학생수가 150명이 넘는다.

 

 

혁신이란 단어의 무게감이나 중압감에 대해 동섭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빠져선 안 되는 함정이다.  

 

 

 

특목고ㆍ자사고는 결코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다

 

혁신학교는 현재 우리 민족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 희망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그러나 혁신학교혁신학교로 머무르면 안 된다. 혁신학교의 모습이 우리나라 중ㆍ고등학교 전체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특목고ㆍ자사고는 폐지되는 방향에서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 특목고ㆍ자사고의 자율적 특성이 오직 입시교육의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다는데 그 근본적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특목고ㆍ자사고의 존재가 공교육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망치고 있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엘리트주의가 공교육을 슬럼화하고 특권계층의 그릇된 선민의식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민주사회의 보편적인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엘리트도 평범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야만 진정한 엘리트가 되는 것이다. 모든 공교육 하나하나의 교실의 장이 다양한 사회 전체상의 축소판이 되어야만 한다.

 

 

도배가 끝나고 신나는 햄버거 파티. 교실의 이런 장면들이 다양하게 펼쳐져야 한다.  

 

 

 

대학입시가 과연 절대적인 장벽일까

 

이러한 모든 논의는 대학입시라는 막강한 벽을 놓고 생각하면 무기력한 공론처럼 들린다. 서울대학교가 엄존하는 한 중ㆍ고교 체제의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약 공교육 전체가 혁신학교가 되면 역으로 대학입시가 저절로 중ㆍ고교의 요구에 의하여 규정되는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대학이 고교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교의 교육체제가 대학의 정당한 모습을 요청하는 것이다.

 

서울대학은 학부가 폐지되고, 그 전체가 새로운 고등교육기관으로 승격되어야 하며, 전국의 국립대학이 국립서울대학 부산캠퍼스, 광주캠퍼스, 전주캠퍼스, 대전캠퍼스, 춘천캠퍼스……로 통합된다. 그리고 전국 국립대학의 등록금은 사립대학의 3분의 1 이하가 된다. 그리고 교수들에게는 정당한 재원이 지원되며 주기적으로 각 캠퍼스를 따라 이동되며 대학을 평준화시킨다. 그리고 학생은 통합시스템 속에서 학점을 자유롭게 트랜스퍼할 수 있다. 서울시립대학이 반값등록금을 실천한 후 곧 선망의 대학으로 격상되어간 모습을 보라!

 

 

교육의 기득권이 와해되어야 하고, 대학은 선택에 의해 갈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을 서열화하지 말라

 

그리고 대학을 서열화하는 일체의 평가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하나의 사적이익단체(신문사)가 자의적ㆍ물리적 기준에 의하여 전국의 대학의 서열을 매긴다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다! 그들의 기준이라는 것이 도무지 대학의 본질적 개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는, 지금과 같은 의미 없는 평가제도는 폐기되어야 한다. 대학은 자율체이다. 타율적 기준에 의하여 서열화될 수 없다. 우리나라 헌법 31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명시되어 있다: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혁명은 눈앞에 오고 있다! 우리 민족의 밝은 앞날이 혁신학교의 불길, 백제 금관의 염화문양처럼 장엄하게 타오르는 그 모습 속에서 개벽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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