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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 4부, 7장 해체되는 중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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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 4부, 7장 해체되는 중세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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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군 시대인 11~13세기 무렵 유럽의 정세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즉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까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지역은 영국이다. 당시 영국의 역사는 유럽 봉건 체제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대륙에서 중세 초기에 프랑크 왕국이라는 강력한 중심이 생겨났다가 이후 프랑크가 무너지고 중세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권화가 전개되었듯이, 영국에서도 윌리엄의 정복으로 강력한 왕권이 성립했다가 이후 대륙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왕권이 무너지고 귀족들의 분권화가 전개되었다(그 결과가 마그나카르타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 영국 내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한 대륙의 봉건 체제가 단기간에 숙성되었으니, 여러모로 영국의 역사는 유럽 중세사의 축약판에 해당한다.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하면서 영국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앙주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영국 왕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그것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이었다. 대륙에서 중세 사회가 정점에 달한 시기에 대륙의 역사에 편입된 덕분에, 영국은 이 무렵부터 후발 주자의 이득을 톡톡히 보기 시작한다. 후발 주자는 선발 주자가 겪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영국은 대륙에서처럼 봉건제의 폐해가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과정을 우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변방에 위치한 덕분에 영국은 새로운 실험의 무대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 실험은 바로 의회 제도였다.

 

사실 마그나카르타로 왕이 귀족들에게 굴복한 선례부터가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왕마저도 프랑스 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 질서 속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우리 역사에 비유하면,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들이 국왕을 중국 황제의 제후로 간주한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의 왕이라 해도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황제를 섬기는 처지이므로 왕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다. 조선이 중기부터 신권(臣權)이 왕권을 능가하는 관료 국가로 변모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귀족들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존의 아들 헨리 3세가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수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멋대로 세금을 징수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외국인들을 중신으로 기용하고 로마 교황의 눈치나 보면서 실정을 거듭하는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또다시 왕과 귀족들의 대결이 벌어졌고, 또다시 영국 왕실의 체면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1258년 헨리는 40여 년 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귀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들이 제시한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ford)에 합의해야 했다. 이로써 왕권은 귀족들로 구성된 15인 위원회에 넘겨졌으며, 영국의 정치는 사실상 귀족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귀족들의 대표자는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unfor, 1208년경~1265)였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도 역시 프랑스 출신의 외국인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사의 한 쪽을 장식하는 데 그쳐야 할 이 사건을 세계사적으로 중요하게 만든 사람은 헨리 3세 자신이었다. 대를 이은 수치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반란(왕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체포됨으로써 더 큰 망신을 샀다. 1265년 몽포르는 아예 귀족 지배를 제도화하기로 하고 귀족·성직자 도시 대표자들로 통치 기구를 구성했다. 이것이 바로 영국 의회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몽포르는 새 정치 실험의 주역이 될 역사적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사실 몽포르의 개혁은 새로울 게 없다. 귀족ㆍ성직자ㆍ도시 대표들이 국정을 담당한다면 바로 옛 로마 시대의 공화정 체제와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그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도는 새로운 정치 실험이라기보다는 복고적 과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영국 의회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는 새 정치의 예고편이 된다. 이렇게 역사적 평가는 대개 후대의 관점에서 당대와 달리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존으로부터 시작된 무능한 왕들의 계보를 끝장 낼 인물이 출현한 것이다. 그는 바로 헨리 3세의 맏아들인 에드워드 1(Edward , 재위 1272~1307)였다. 그는 원래 몽포르를 지지했으나 귀족 지배를 제도화하려 하자 그만 꼭지가 돌아버렸다. 개혁은 찬성하지만 체제 변혁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했다. 왕실이 유명무실해지면 당장 피해를 볼 사람은 바로 왕위 계승권자인 그 자신이었으니까.

 

뛰어난 무장이기도 한 에드워드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몽포르의 군대를 무찌르고 왕권을 되찾았다. 이로써 몽포르의 정치 실험은 몇 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했고, 에드워드는 아직 왕이 아니었다. 일단 내전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응급조치를 취한 뒤 1270년 그는 십자군 전쟁을 떠났는데, 얼마 못 가 아버지 헨리 3세가 죽은 것은 그에게나 영국에게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1274년에 귀국해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는 숙제로 남아 있던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영국을 확실한 독립 왕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사법과 행정 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왕실 재판소를 설치하고, 각종 법을 제정하고, 귀족을 관료로 임명했다. 사실상 영국의 국제(國制)는 에드워드 시대에 확립되었기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영국은 앙주의 멍에에서 벗어나 비로소 영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에드워드 1세를 사실상 영국의 초대 국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영국이 후대에 길이 자랑하게 될 기구를 창설했다. 바로 의회였다.

 

아무리 귀족들을 관료 집단으로 육성한다 해도 마그나카르타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왕권은 안정되어야 하고, 귀족들의 요구는 수용해야 한다. 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에드워드는 몽포르의 개혁을 약간 변형시키기로 한다. 귀족들의 정치기구를 만들도록 허용하되 그것을 왕의 관할하에 두면 될 게 아닌가? 이리하여 창설된 것이 1295년의 모델 의회다(의회의 원형이라는 뜻인데, Model Parliament에서 ‘model’이라는 수식어는 후대에 붙인 것이다. 이것을 모범의회라고도 부르지만, 우리말의 모범은 원형보다 본보기를 뜻하므로 모델 의회라고 표기하는 편이 낫다).

 

아이디어는 몽포르에게서 빌렸지만, 에드워드는 의회의 구성을 달리했다. 고위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만 의회를 구성하면 하위 계층의 반발도 반발이거니와 자칫 예전처럼 특권 귀족들의 전횡이 생겨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각 지방의 기사들과 시민 대표들도 의회로 부르고 하급 성직자들도 포함시켰다. 그러나 지체 높고 자부심이 강한 중앙 귀족과 고위 성직자 들은 지방의 촌놈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회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고위층과 서민 대표로 나뉘어, 전자는 귀족원, 후자는 시민원(평민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이것이 상원과 하원으로 발전하면서 양원제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최초의 의회 마그나카르타의 실질적인 성과는 80년 뒤에야 생겨났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의 의회로 불리는 모델 의회다. 당시 영국이 유럽 문명의 중심지였다면 의회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13세기의 영국은 국왕조차 프랑스 왕을 섬기는 봉건 영주의 하나였을 만큼 유럽 정치 무대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기에 의회라는, 당시로서는 희한한 기구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에드워드 1(오른쪽)와 그가 창설한 모델 의회(왼쪽) 장면을 보여준다.

 

 

 중심: 절대왕권의 시작

 

 

유럽의 변방에서 새로운 정치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대륙의 중심 프랑스에서는 카페 왕조의 권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앙주를 접수해 프랑스를 강국으로 만든 필리프 2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삼고 카페 왕조의 세습제를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 조치가 빛을 본 것은 그의 손자 시대였다. 아버지인 루이 8세가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죽자 왕위를 계승한 루이 9(재위 1226~1270)의 시대에 카페 왕조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카페 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그는 별명도 그럴듯하게 성왕(聖王), 즉 생 루이(saint Louis)였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전성시대라고 해야 할까? 비슷한 시기 프리드리히 1세와 2세가 독일을 강국으로 만들었다면, 프랑스에는 필리프 2세와 그 손자인 생 루이가 있었다. 그러나 조손간에 손발이 더 잘 들어맞은 것은 프랑스였다. 둘 다 정복 군주인 독일의 조손에 비해 프랑스의 조손은 자연스런 분업을 이루었으니까. 할아버지 필리프 2세는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하는 대외적 성과를 올렸고, 손자 생 루이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대내적 안정을 취했던 것이다.

 

외형만 성장한 불안정한 왕국의 내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권의 확립이다. 생 루이는 왕실 내에 법 전문가를 두고 직접 재판소를 운영했다근대의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행정관(왕이나 지방의 수령)이 사법 업무도 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점은 동양과 서양이 마찬가지다(조선 사회에서도 관찰사에서 현감에 이르기까지 행정관이 지방의 행정과 재판을 함께 담당했다). 다만 입법의 권한은 왕이나 고위 귀족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근대 공화정의 이념을 제시한 존 로크는 입법부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의 권력을 일차로 위임받은 기관이 입법부이고, 입법부의 권력을 위임받은 기관이 행정부라고 규정했다(초기의 의회는 상설 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행정부에 권력을 위임해야 했다). 공화정이 외부로부터 이식된 우리의 경우에도 19485월 총선을 통해 의회가 먼저 구성되고 여기서 정부조직법이 제정됨으로써 행정부의 구성이 가능했다. 하지만 보통 8월의 정부 수립은 잘 알아도 의회가 먼저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오랜 왕정의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정의롭고 현명한 판결이 이름을 떨치자 프랑스 전역에서 지역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항소 사건이 중앙으로 몰렸다. 밀려닥치는 소송 사건들을 소화하기 위해 생 루이는 파리에 아예 항구적인 법정인 고등법원을 설치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의회가 탄생했다면 프랑스에서는 법원이 탄생한 것이다(어찌 보면 옛 로마의 공화정이 브리타니아의 의회로, 로마의 법정이 갈리아의 법원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생 루이의 법적 정의와 균형 감각은 프랑스의 내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외 분야에서도 발휘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황제가 벌이고 있던 패권 다툼, 영국에서 헨리 3세와 귀족들이 맞선 분쟁에도 그는 일일이 개입해 현명한 중재를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이득을 얻어냈다. 가장 큰 이득은 툴루즈, 랑그도크, 프로방스 등의 남프랑스를 획득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종교적 이단이 많았는데, 십자군 시대에는 알비파가 툴루즈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연히 로마 교황으로서는 눈엣가시였으므로 12009년 인도 켄티우스 3세는 프랑스의 귀족들에게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을 명령했다. 곧 알비 십자군이 조직되었고, 이때부터 이 지역은 또 다른 작은 십자군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지루하게 끌어오던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생 루이였다. 그는 툴루즈 백작과 극적인 타협을 이루고 남프랑스 일대를 프랑스 왕국에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생 루이는 이미 깊은 신앙심으로 교황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사태를 쉽게 해결한 데는 교황이 독일 황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미처 이 지역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던 덕분이 크다). 이로써 로마 시대부터 북프랑스와 문화적 이질감이 있었던 남프랑스는 처음으로 북프랑스와 한 몸이 되었다. 생 루이가 아니었더라면 이 지역은 오늘날 독립국이 되었거나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생 루이는 영국 왕실과의 오랜 갈등도 해결했다. 1259년 영국 왕 헨리 3세와 파리 조약을 맺어 아키텐의 일부인 가스코뉴를 영국령으로 내주는 것과 동시에 헨리 3세에게서 충성의 서약을 받아낸 것이다. 이 성과로 그는 카페 왕조만이 아니라 그 이후까지 포함해, 즉 프랑스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영국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왕이 되었다.

 

왕의 업적은 왕권의 강화와 직결된다. 생 루이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둘 다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했다. 맏아들 필리프 3(재위 1270~1285)용담왕이라는 별명답게 공세적인 자세를 취해 툴루즈와 푸아투에 국부적으로 남아 있던 영국령을 하나씩 접수했다(이제 프랑스 내의 영국령은 가스코뉴만 남게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대외 정책을 계승했다면, 그의 동생인 필리프 4(재위 1285~1314)는 아버지의 대내 정책을 충실히 계승했다. 아버지가 설치한 법원에 이어 그는 근대를 예감케 하는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든다. 그것은 바로 삼부회(三部會, États-Généraux)였다.

 

미남왕이라는 필리프 4세의 별명은 혹시 그의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말해주는 게 아니었을까? 그는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왕권에 대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 내에서 자신은 황제라고 선언함으로써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비위를 거슬렀다(미우나 고우나 교황은 교황청에서 임명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황제라는 직함을 허용하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영토 확장에 나선 그는 플랑드르영국 동화 플랜더스(플랑드르의 영어명)의 개로 유명한 플랑드르는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에는 독자적인 플랑드르 백국(伯國)이라는 영방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지역은 상업과 무역, 모직물 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일찍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 4세의 대결은 그 예고편이고, 본편은 14세기에 벌어지는 백년전쟁이다. 특히 영국 왕실의 입장에서는 플랑드르가 더욱 절실히 필요했다. 플랑드르의 양모 수출 관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영국 왕이 사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와 아키텐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 싸웠다. 기백은 좋았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전비가 달리자 그는 화폐를 새로 주조하고(위조화폐라는 설도 있다)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정책으로 재정난을 극복하려 했는데, 그것이 교황과 충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란의 프로방스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는 로마 속주 프로빈키아에서 나온 명칭이며, 로마 시대부터 중북부 프랑스와는 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따라서 알비파가 준동한 것은 오히려 프랑스가 남프랑스를 합병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이때 합병하지 않았다면 남프랑스라는 말을 쓸 수도 없겠지만). 그림은 루이 8세가 프로방스를 점령하는 장면이다.

 

 

교황과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를 다스려야 했다. 비록 십자군 전쟁 이후 많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로마 교황은 서유럽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었고 프랑스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맞수에게서 한 수 배운 걸까?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모델 의회를 창설한 지 7년 뒤인 1302년에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와 같은 목적과 같은 구성을 지닌 삼부회를 소집했다. 모델 의회처럼 삼부회도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위해 소집되었고, 성직자·귀족·도시 대표들의 세 가지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목적과 구성이 같았으니 그 성과도 모델 의회와 다르지 않았다. 삼부회는 필리프 4세의 의도대로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영국과 프랑스에서 초기 의회가 왕권 강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달리 보면 강력한 왕들이기에 그런 제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필리프는 교황과 정면 대결에 나섰다. 그런데 그가 취한 방법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담한 것이었다. 교황을 납치하는 것이었으니까. 1303년 그는 측근인 노가레를 보내 갈등을 빚고 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납치한 다음 이단자로 몰아 아나니의 교황 별장에 가두었다(아나니는 보니 파키우스의 별장이 있는 곳이자 그의 고향이었으니 교황은 자기 고향, 자기 집에 갇힌 셈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노가레는 교황의 뺨까지 때렸으니 필리프가 교황의 권위를 어떻게 봤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비운의 교황 보니파키우스는 원래 프랑스로 납치될 예정이었으나 시민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한 달 만에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최대의 난적을 제거한 필리프는 프랑스인으로 다음 교황(클레멘스 5)을 세우고(물론 추기경들의 선출이라는 형식은 유지했다) 1309년에는 교황청마저 프로방스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것이 아비뇽 교황청의 시작이다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친다면 1000년이 넘도록 교황청은 로마에 있었는데, 이것을 옮겼으니 필리프 4세의 배짱도 어지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루이 9세가 성왕으로 불릴 만큼 신앙심이 깊고 덕이 큰 인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필리프의 성격과 행동은 훨씬 더 파격적이다. 사실 그가 교황 납치극을 시도한 데는 교황의 자극도 한몫했다. 필리프가 삼부회를 소집하자 보니파키우스는 1302년 우남 상크탐이라는 교서를 내려 모든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필리프의 사적ㆍ공적 원한이 얽혀 시작된 아비뇽 교황청은 1377년에 잠시 로마로 복귀했으나 곧 또다시 아비뇽으로 와서 1423년까지 유지된다. 로마 교황청 측에서는 이 시기를 옛 바빌론의 유수(253쪽 참조)에 비유해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른다.

 

십자군 전쟁 기간 하늘을 찌를 듯했던 교황권은 땅에 떨어졌고, 영국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왕권은 전에 없이 강력해졌다. 문제는 이제 두 나라가 모두 눈치를 볼 대상이 없 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밀린 숙제를 할 차례다. 플랑드르와 아키텐 문제가 바로 그 숙제다.

 

 

아비뇽 시대 교황청이 설치된 것은 조그만 소도시인 아비뇽이 크게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 아비뇽은 종교와 행정에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가 모여들어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은 아비뇽 교황청이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아비뇽 시의 모습이다.

 

 

 변방과 중심의 대결

 

 

프랑스와 영국의 분쟁은 사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에서 그 씨앗을 찾을 수 있다. 이민족이 왕실의 주인이 되었으니 애초부터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에 앙주 왕조가 들어선 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키운 격이었다. 앙주 가문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륙 영토의 소유권이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이 앙주의 것인가, 아니면 앙주의 프랑스 영토가 영국의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정복한 것은,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되찾은 것이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빼앗긴 것이었다. 일단 생 루이의 조정안으로 분쟁이 표면화되는 것은 넘겼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왕들은 가스코뉴를 영국에 공식적으로 넘겨준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영국의 왕들은 그들대로 영국령이 가스코뉴만으로 국한된 데 대해 불만을 품었다. 파리 조약이 유효한 시기에도 양측의 대립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플랑드르의 주도권 다툼이라든가, 대공위 시대 독일 제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신경전이 그것이다. 이렇게 뿌리 깊은 문제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총알이 발사되지 않듯이 전운이 감돈다고 해서 곧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근원은 영토 문제에 있었으나 방아쇠는 엉뚱한 곳에서 당겨졌다.

 

로마 교황마저 휘하에 거느린 일세의 효웅 필리프 4세는 불행히도 자손 복이 없었다. 세 아들이 모두 차례로 왕위에 올랐는데 자손 복이 없다니? 하지만 그의 세 아들, 루이 10, 필리프 5, 샤를 4세는 다 합쳐도 재위 기간이 14년에 불과한 데다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300년이 넘도록 존속해온 카페 왕조는 1328년 샤를 4세가 죽으면서 대가 끊기고 말았다.

 

 

프랑스의 귀족들이 새 왕조의 창건자로 선출한 인물은 샤를의 사촌형이자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였다. 그는 발루아(Valois) 백작이었으므로 이때부터의 프랑스 왕가를 발루아 왕조(1328~1589)라고 부른다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에서도 사촌이 왕위를 계승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에서는 아예 다른 성씨가 들어서지 않는 한 왕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반드시 직계가 아니더라도 왕가의 혈통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 반면 서유럽 봉건 왕조들은 동양식 왕조와는 달리 혈통에 못지않게 통치 지역을 중시했다. 필리프 6세는 카페 왕조의 혈통이지만 발루아의 봉건 귀족이었으므로 카페 왕조의 계승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동양식 승계에서 혈통과 친족의 개념이 훨씬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왕조 교체는 당연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죽었어도 딸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딸 이사벨라는 영국 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고 아들도 두었다. 그 아들이 바로 당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였다. 게르만법에 따라 딸은 왕이 될 수 없으므로 이사벨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위를 욕심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필리프 6세에 못지 않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영국의 왕이 프랑스의 왕위를 노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당시 영국 왕은 발루아 백작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봉건 영주 신분이었으니까).

 

사실 프랑스의 귀족들은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에드워드 3세를 제외한 것이었다(봉건 지배층에게서 국민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까?). 에드워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필리프 6세가 즉위한 이듬해에 충성 서약을 강요하자 에드워드는 일단 분노를 꾹 참고 명령에 따랐다. 신분이야 아무렴 어때, 실익이 중요하지. 그는 이런 심정이었지만, 머잖아 그 실익마저 문제가 될 것은 뻔했다. 필리프 6세 역시 서열상으로만 에드워드를 굴복시키는 데 만족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양측의 충돌은 차츰 가시화되었다. 1330년부터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과연 필리프는 즉각 스코틀랜드의 지원에 나섰다.

 

이래저래 참을 수 없게 된 에드워드는 양측의 쟁탈지인 플랑드르로 건너가 프랑스의 왕을 자칭했다(마침 플랑드르 백작은 노동자와 수공업자 들이 부자 상인들을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폭동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독일, 네덜란드의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해 공동전선을 펼쳤다. 이 노골적인 반역 행위에 필리프는 특단의 조치로 맞섰다. 마지막 남은 영국령인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몰수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전쟁이 100년이 넘도록 질질 끌어 후대에 백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1337년 필리프가 가스코뉴를 몰수하자 에드워드는 그를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는 발루아의 필리프라고 부르면서 이해부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1339년에는 플랑드르에서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고, 해상에서는 양측 함선들이 수시로 교전을 벌였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한 것은 1340년이었다. 따라서 1337, 1339, 1340년을 모두 백년전쟁의 시작으로 잡을 수 있다.

 

 

전쟁을 통한 해결 14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가스코뉴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대립한 사건이지만, 분쟁의 씨앗은 200년 전 영국에 앙주 왕조가 성립할 때 생겨났다. 앙주 가문의 프랑스 내 영토는 원래 서프랑스 전역이었으나 12세기 이후 계속 줄어들어 가스코뉴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결국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의 방식을 택했다. 그런 점에서 백년전쟁은 전쟁을 통해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근대적 방식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백년전쟁은 1452년까지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지만, 실제로 이 기간 동안 내내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고 상당 기간의 공식 휴전도 있었다. 그러나 싸움터는 줄곧 프랑스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 규모에서나 인구에서나 생활수준에서나 영국은 프랑스에 미치지 못했다(1328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호구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1300~1700만 정도로 추산되며, 영국은 약 350만 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실력으로 하는 승부, 막상 군사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고 무기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영국이 앞서는 형편이었다. 특히 영국이 자랑하는 무기는 긴 활이었다. 게다가 관료제가 발달하고 왕권이 느슨한 프랑스에 비해 영국에는 후발국 특유의 응집력이 있었다.

 

도버 해협에서 몇 차례 해상전을 벌이던 양국은 1346년 크레시에서 대규모 지상전으로 맞섰다. 여기서 영국은 탁월한 전술에다 긴 활이 큰 위력을 발휘한 덕분에 병력에서 우세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다. 승점을 올린 영국군은 이후 프랑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노르망디에서 아키텐에 이르는 프랑스 서부 영토를 거의 점령했다. 특히 검은 갑옷을 즐겨 입어 흑태자(Black Prince)라는 별명으로 불린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 에드워드는 프랑스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유린했다. 심지어 1356년 프랑스는 흑태자에게 왕까지 납치되는 수모를 겪었다(당시 프랑스의 왕은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였는데, 이로써 흑태자는 30년 전 필리프에게 굴복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셈이다).

 

이후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며 양국 모두 국내 문제에 힘을 쓰다가 1396년에는 정식으로 20년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유는 1347년부터 유럽 전역에 번져간 페스트 때문이었다. 형세가 불리했던 프랑스는 전염병의 덕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페스트는 서구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조연쯤은 된다. 중요한 갈림길, 특히 전쟁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아테네의 몰락을 가져왔는가 하면, 2세기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을 쇠퇴기에 접어들게 만드는 데도 일조했으며, 십자군도 괴롭혔다. 특히 백년전쟁 중에 퍼진 14세기의 페스트는 역사상 최대 규모로서, 1347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이후 1350년 북유럽까지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감소시키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묘하게도 유럽에 퍼진 페스트는 모두 아시아에서 유입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그리스, 로마, 십자군의 경우는 모두 아시아의 군대에서 전염되었고 14세기의 페스트는 지중해 상인들을 거쳐 이탈리아로 전염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시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무섭고 불결한 곳으로 여긴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시아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 페스트균이 유럽에서 위력을 발휘한 이유는 사실 중세 유럽의 도시들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었던 탓이 더 크다(한 예로, 아시아와 달리 유럽에서는 인분을 거름으로 쓰지 않고 도시 외곽에 쌓아두었으므로 전염병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1415년에 재개된 후반전도 역시 영국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흑태자가 전반전의 영웅이었다면, 후반전의 최우수 선수는 프랑스의 처녀 장군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경~1431)였다. 후반전 초반 영국은 거세게 프랑스를 몰아붙여 거의 항복을 받아낼 즈음까지 이르렀으나, 1429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군을 극적으로 격파하면서 전세를 반전시켰다. 오를레앙은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은 이곳을 함락시키면 전쟁 초반부터 점령하고 있던 노르망디와 아키텐을 연결할 수 있었다. 한편 프랑스로서는 이곳을 빼앗기면 루아르 강 유역으로부터 훨씬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오를레앙 공방전은 전쟁 전체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운명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다지만, 이 전설은 오를레앙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이 사기를 회복하고 역전하게 된 탓에 이후 생겨난 이야기일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승리한 잔 다르크는 그녀의 공로를 시샘한 프랑스 귀족들과 영국 측의 공작으로 1431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만다. 그녀의 종교적 지위는 20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녀로 추서함으로써 500년 만에 복권되었다. 프랑스의 역전은 그 무렵부터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한 대포의 덕택이 컸다. 이후 프랑스군은 1437년에 파리를 탈환했고, 계속해서 영국 점령 하에 있던 성과 도시를 하나씩 수복하면서 1452년에는 마침내 가스코뉴를 손에 넣어 기적 같은 역전극을 엮어냈다.

 

 

죽음의 전염병 흑사병이라고도 부르는 페스트는 유럽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에서 여러 차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페스트는 항상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퍼지는 식이었는데, 이는 유럽의 도시들이 아시아의 그것들보다 불결했던 탓이 크다. 그림은 페스트로 죽은 시신들을 매장하는 장면이다.

 

 

 영광을 가져온 상처

 

 

전장이 프랑스였던 만큼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쟁 기간 동안 고용한 용병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은 탓에 이들이 도적 떼로 변하면서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프랑스만큼은 아니어도 영국 역시 피해가 컸다. 우선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 위기를 맞았을 뿐 아니라 도버 해협 연안의 칼레 지방을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전부 잃었다(이것으로 프랑스 내의 영국령에 관한 두 나라 간의 분쟁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경제적으로는 피해가 막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전쟁을 계기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잔 다르크 덕분에 왕위에 오른 샤를 7세는 용병의 폐해를 막기 위해 참전 기사들을 위주로 상비군을 편성했는데, 영국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왕을 중심으로 영주들이 뭉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샤를 7세 자신은 유약한 성품이었으나 그가 닦아놓은 기반을 밑천으로 삼아 이후 프랑스에 강력한 군주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이는 장차 15세기에 절대주의가 성립하는 밑거름이 된다사실 샤를 7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휴전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호전적인 영국의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1415년에 프랑스를 무찌르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당시 프랑스 왕자였던 샤를 7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그 대신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과 결혼해 낳은 아들(헨리 6)에게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의 공동 왕위를 잇게 한다는 것이었다. 1422년에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따라 죽으면서 영국 왕실에서 갓난아기인 헨리 6세를 공동 왕으로 삼으려 하자 프랑스 왕실에서는 반발했다. 이에 따라 부르고뉴 측은 영국과 결탁하고 오를레앙 측은 샤를 7세를 앞세워 백년전쟁의 후반전을 재개한 것이다(따라서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샤를이 즉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후 부르고뉴 문제는 프랑스가 영토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과제로 삼게 된다(2, 112~114쪽 참조).

 

영국에서는 한 차례의 진통이 더 필요했다. 오랜 전쟁은 영국의 귀족들에게 서열화를 가져왔다(봉건적 전통이 약한 영국에서는 원래 대륙에서처럼 귀족들의 서열이 별로 없었다). 전쟁 시기 프랑스에서 용병이 주로 활약했다면,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각자 자신의 사병 조직을 동원해 전쟁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중소 귀족들은 점차 대귀족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는 중에 이미 대귀족들의 발언권은 왕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으며, 왕위 계승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력은 이미 전쟁 중에 발휘되었다. 사실 1396년에 휴전이 이루어진 것은 양측이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양측의 왕실이 격심한 권력 다툼에 시달린 탓도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 2(그는 형인 흑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귀족들을 무시하고 전제정치를 일삼다가 1399년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이것으로 중세 영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플랜태저넷 왕조는 단절되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4세가 왕위를 계승해 랭커스터 왕조를 개창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 한 번 왕통이 구겨졌으니 누구라도 왕위를 노릴 것은 당연하다. 특히 에드워드 3세의 말 아들로 전공이 드높았던 흑태자의 후손들이 이룬 요크 가문은 억울함이 더했다. 흑태자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들이 영국의 왕가가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1455년 랭커스터 가문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고, 6년 뒤에는 드디어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자기 가문의 에드워드 4세를 즉위시켜 요크 왕조를 열었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권력을 빼앗긴 랭커스터 가문이 가만 있을 리 없다.

 

 

구세주를 얻은 샤를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맞이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아래 ‘la pucelle(처녀)’이라고 표기된 인물이 잔 다르크다. 여기서는 아직 몰랐겠지만, 나중에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샤를은 거의 잃었던 프랑스 왕위를 되찾게 되니, 샤를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두 가문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여 년 동안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데, 둘 다 장미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으므로 이것을 장미전쟁이라고 부른다(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은 흰 장미였다). 이는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겨룬 것이라는 점에서는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사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영국의 왕권이 그만큼 먹음직스런 실세로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가 승자가 되든 강력한 왕권을 누릴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승자는 랭커스터도, 요크도 아니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 3세는 형이 죽자 조카인 에드워드 5세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조카 형제를 런던탑에 가두어 죽였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 있었던 원판을 능가하는 영국판 수양대군이었다(1455년에 조선의 수양대군도 열네 살의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았다). 수양대군 세조10년 이상 재위하며 치적을 쌓아 그런대로 명예를 만회했지만 리처드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1485년 비정한 숙부는 조카들의 피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랭커스터 가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 헨리 튜더(Henry Tudor)에게 패하고 죽은 것이다. 죽은 에드워드 4세는 아들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그에게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동생(리처드 3)을 죽인 범인이라고 비난해야 할까?

 

다소 지루하게 전개된 장미전쟁을 끝내고 왕위에 오른 헨리 튜더, 즉 헨리 7(재위 1485~1509)는 모계만 랭커스터 가문이고 아버지는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였다. 헨리는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해 양가의 통합을 꾀했으나, 성씨가 바뀌었으니 왕조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헨리 7세부터 영국 왕조는 튜더 왕조(1485~1603)로 바뀌게 된다. 예상대로 튜더 왕조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크게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절대왕권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영국 절대주의의 시작이다.

 

이렇게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을 통해 왕권 강화라는 소득을 얻었지만, 전리품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두 나라의 국민 의식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백년전쟁은 양국의 봉건 영주들 간의 싸움이었으나, 워낙 오래 지속된 탓에 일반 국민들에게까지도 근대적 애국심이 자라났다. 특히 영국은 선진국 프랑스와 대등한 경기를 벌인 덕분에 대륙에 대한 열등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백년전쟁은 신흥 세력인 영국과 전통의 강호 프랑스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겠다.

 

백년전쟁은 내내 파괴와 방화, 약탈을 일삼는 소모전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의 확고한 지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부분의 전쟁이 승리한 국가에조차 상처뿐인 영광을 가져왔다면 이 경우는 영광뿐인 상처랄까?

 

 

왕비의 야심 헨리 6세의 왕비 마거릿이 솔즈베리 백작에게서 책을 선물로 받는 장면이다. 남편이 정신병에 걸리는 바람에 요크 가문에서 섭정을 맡게 되자 마거릿은 불만을 드러냈다. 그뒤 아들을 낳은 그녀가 섭정을 바꾸면서 요크 가문을 자극한 게 장미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조연들의 사정

 

 

왕실에서는 절대주의가 성장하고 일반 백성들에게서는 국민 의식이 싹텄다면, 이미 중세 봉건국가의 특성은 거의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는 프랑스와 영국에 불과했다. 그럼 이 두 주인공을 제외한 서유럽 세계의 나머지 조연들에서는 중세의 해체가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조연인 독일은 대공위 시대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가 새로 들어섰어도 통일은커녕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실제로 당시 독일 지역의 판도에서는 오늘날 통일 국가인 독일의 모습을 전혀 읽어낼 수 없다. 남부인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대는 대체로 황제 직할령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영방국가들로 쪼개져 있었으며, 발트 해와 북해에 면한 북부의 도시들은 14세기 중반부터 한자동맹(Hansibund)이라는 동맹 체제를 구축했다. 영방국가들은 서로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영방국가의 제후들은 사실상 독립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를 선출한다거나 공동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는 함께 모여 논의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그 밖에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미 왕위 세습제가 뿌리를 내렸지만, 독일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껍데기와 영방국가 체제라는 알맹이가 어울린 특수한 상황에서 여전히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물론 각 영방국가 내에서는 왕위가 세습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각각의 영방국가는 규모는 작아도 프랑스나 영국 같은 단위의 나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일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의 역사를 아우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는 지역인데도 은연중에 일국적인 통합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합적인 시각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는 오늘과 연관 지어 살펴봐야 한다. 오늘날 이 지역은 독일이라는 단일한 나라로 통합되어 있고, 우리에게는 그 독일의 역사가 중요하다. 둘째, 영방국가들은 비록 약하게나마 독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느슨한 울타리로 묶여 있었고, 어느 정도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했다. 한때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제위를 세습한 것은 다른 나라 같으면 정상적인 일이었겠지만 독일에서는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대공위 시대는 그 점을 분명하게 입증한 셈이다.

 

물론 제후들도 서열이 있었으므로 모든 제후가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 선출권을 가진 제후들을 선제후(選帝侯)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유력한 영방국가의 제후(세속제후)와 대주교(성직제후) 들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점차 왕권이 강화되는 데 경계심을 품은 선제후들은 독일에서도 황제 선출 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독일은 그 나라들처럼 세습제를 채택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선출제라도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선제후들의 생각이었다.

 

특히 대공위 시대 이후 특정한 왕조도 없이 이 가문, 저 가문에서 황제가 마구 배출되는 현상은 그들에게 더욱 위기감을 조성했다. 그들은 독립성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최소한의 통합성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분열되면 프랑스나 영국에 얕잡아 보일 테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합리적 선출제란 그때까지 관습적으로 인정되어오던 선제후를 법으로 확정하는 것이었다. 1356년 그들은 그런 내용을 합의하고 금인칙서로 제정했다(황금으로 된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플랑드르의 번영 십자군 전쟁으로 지중해 항로에 숨통이 트이자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더불어 지중해 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쌓았다. 그림은 플랑드르의 항구에서 배에 물건을 선적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세가 해체의 조짐을 보이자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한자동맹이라는 기구를 결성하고 자체적으로 무장까지 갖추었다.

 

 

칙서는 선제후의 자격과 특권을 명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선제후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세 명에다 작센 공작, 라인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 등 일곱 명으로 한정되었으며, 황제는 이들이 다수결로 선출하기로 정했다(보헤미아왕은 독립 군주였으므로 황제의 선출에는 참여했으나 제국의 내정을 결정하는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또한 선제후들은 자기 영지에서 독립적인 사법권, 징세권, 화폐 주조권 등을 보장받았다.

 

물론 칙서의 내용은 예전부터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었으므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관습과 공식적인 제도는 성격이 크게 다른 법이다. 100년 전 프리드리히 2세가 영방국가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을 때 그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영방국가는 그것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마찬가지로, 선제후 역시 13세기에 생겨났으나 금인칙서를 계기로 공식성을 획득함으로써 지위와 특권이 더욱 공고해졌다. 선제후를 통한 황제 선출 방식이 문서로 추인됨으로써 이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반대로 향하는 독일의 분권화는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또 다른 조연인 스칸디나비아의 역사는 독일의 역사와 맞물려 전개된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은 마치 영국과 프랑스처럼 후발주자가 대륙의 선진 문명을 흡수하는 관계에 있었다(엄밀하게 말하면 스칸디나비아가 교류한 것은 독일이라기보다 한자동맹의 도시들이었지만), 스칸디나비아가 본받은 서유럽의 봉건제도 바로 독일의 봉건제였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독일의 특수성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으므로 스칸디나비아는 독일을 모델로 삼았음에도 대륙의 보편적인 봉건제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대륙의 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자 스칸디나비아도 역시 대륙이 앓는 몸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기나긴 전쟁을 준비하던 14세기 초반 덴마크(노르웨이 포함)와 스웨덴에서도 왕과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둘 중 먼저 안정을 찾은 것은 덴마크였다. 1340년 발데마르 4세는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오랜만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다. 이런 경우 정작 그 혜택을 보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가 그 주인공이었다. 1353년 겨우 열 살의 나이에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와 결혼한 그녀는 1375년 아버지가 죽자 일단 자신의 어린 아들 올라프에게 덴마크의 왕위를 잇게 한 다음 5년 뒤 남편이 죽자 자신이 직접 노르웨이의 여왕이 되었다앞서(426~427) 노르웨이가 19세기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고 했는데, 마르그레테가 노르웨이 여왕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비록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그 지배란 서유럽의 봉건 왕조가 으레 그렇듯이 왕들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일 뿐 두 나라가 완전히 한 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마르그레테 이전까지 노르웨이는 종속된 상황에서도 별도의 왕실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와 나라 간에 은 지어져도 어느 한나라로 완전히 통합되지는 않는 게 서구 역사의 특징이다.

 

1387년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은 그녀에게 사적인 불행이었지만 동시에 공적인 행운이기도 했다. 상국(上國)인 덴마크의 왕위마저도 그녀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키 걸마르그레테의 행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1389년 왕과 갈등을 벌이던 스웨덴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격이다. 마르그레테는 이것을 기회로 스웨덴 왕 알브레히트를 추방하고 스웨덴마저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칸디나비아는 200여 년 만에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깨어나는 스칸디나비아 중세의 해체는 실상 유럽 문명권의 확대였다. 14세기에 이르러 유럽 문명은 북쪽의 스칸디나비아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사진은 스웨덴의 칼마르 성인데, 이곳에서 스칸디나비아 3국의 원형을 확립한 칼마르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바야흐로 중세 후기를 맞아 서유럽의 각국이 개별 국가의 확립을 위해 일로매진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완전한 통합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애써 이룬 통합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마르그레테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 방식을 생각해냈다(독일의 영방국가 체제가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1397년 그녀는 스웨덴 남부의 항구도시인 칼마르에 세 나라의 귀족들을 불러 모으고, 여기서 언니의 외손자인 에리크를 공동의 왕으로 추대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군주 연합체가 칼마르 동맹이다.

 

마르그레테의 심정이야 당연히 자신의 친정이자 사실상의 맹주인 덴마크가 동맹을 주도하기를 바랐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은 나름대로 불만이었고, 특히 독립국이다가 느닷없이 주권을 상실한 스웨덴 귀족들은 더욱 박탈감이 심했다(그럼에도 그들이 칼마르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라이벌인 한자동맹의 도시들이 북해와 발트 해의 무역을 독점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삐걱거린 칼마르 동맹은 1448년 덴마크에 올덴부르크 왕조가 성립하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칼마르 동맹은 겨우 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으나 수배 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스칸디나비아를 한때나마 재통합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이 통합의 경험으로 이후의 역사에서 북유럽 3국은 지속적인 연대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웨덴의 귀족들이 자립권을 빼앗긴 것에 입이 부었다지만 그들이 그 동쪽의 러시아를 보았다면 칼마르 동맹에도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유럽 세계의 또 다른 조연인 러시아는 그 무렵 자립은커녕 막대한 조공을 바치느라 등골이 휠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공이라면 속국이 제국에 바치는 것이다. 제국의 시대가 간 지 오랜데 러시아는 어디에 조공을 바쳤을까?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 이래 제국다운 제국이 없었지만 동양에서는 당시 제국의 시대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러시아로부터 조공을 받은 제국은 바로 동양의 몽골 제국이었다.

 

 

정규군과 농민군의 차이 발슈타트 전투에서 슐레지엔과 폴란드의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일패도지한 것은 몽골군이 워낙 막강한 탓도 있었지만 군대의 주력이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역할은 기사들이 맡았지만 농민군으로 몽골의 정규군, 그것도 원정대로 선발된 정예군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림은 당시의 오합지졸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13세기 초반 중국 북쪽의 드넓은 초원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몽골은 순식간에 중국 대륙의 금과 송을 정복하고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뛰어난 정복 군주 칭기즈 칸(1162~1227)은 그전까지 간헐적으로 중국 대륙을 정복했던 여느 북방 민족들과 달리 애초부터 중국에 마음이 있지 않았다. 서역(중앙아시아)을 차지해 동서무역을 독점하려는 게 그의 원대한 구상이었던 것이다. 서역 정복을 눈앞에 두고 그가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의 꿈을 실현했으나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자 그 서쪽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1235년 서역보다 더 서쪽, 즉 유럽을 정복하기로 결정한다.

 

불과 20만 명의 몽골 원정군은 뛰어난 기동성으로 삽시간에 러시아 남서부인 킵차크(볼가 강 상류)에 이르렀고, 이어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등 러시아의 주요 공국들을 손쉽게 정복했다. 도망치는 러시아의 왕들은 자연스럽게 몽골군을 러시아의 중심인 키예프로 안내했고, 키예프마저 무너지자 비잔티움의 발칸을 제외한 동유럽 전역이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1241년 발슈타트 전투에서 슐레지엔과 폴란드의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참패하는 것을 본 서유럽의 귀족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폴란드가 정복되면 그다음은 독일의 심장부인 작센일 테고, 작센이 무너지면 서유럽 전체가 야만인의 세상으로 바뀔 게 뻔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서유럽 세계를 구한 것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이었다. 대칸(황제)이 죽자 칸위 계승에 발언권이 있는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가 말머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마터면 씨가 마를 뻔한 서유럽의 왕과 귀족 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러시아의 비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은 킵차크에 칸국을 두고 러시아의 공국들을 계속 지배하기로 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다. 말썽 많은 학급을 휘어잡으려면 반장을 잘 정해야 한다. 몽골은 모스크바 공국으로 반장을 삼고 러시아 지역의 조공을 거두어들였다. 모스크바는 이 반장 역할을 통해 러시아의 중심적 위치로 성장했으니, 이후 서유럽 귀족들의 멸시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서유럽인들은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것을 가리켜 타타르인의 멍에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타타르란 사실 몽골족이 정복한 부족이었지만 서유럽인들은 몽골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러시아로 옮겨간 제국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을 계승했다고 선언함으로써 공국을 제국으로 격상시켰고(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 생겨나는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그 자신도 대공에서 황제로 고속 승진했다. 이것이 러시아 차르의 시작이다. 황제가 종교의 수반도 겸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도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이반은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출세한 인물일 것이다. 사진은 이반이 이탈리아 건축가를 초빙해 지은 우스펜스키 성당이다.

 

 

러시아가 오랜 몽골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다. 반장이었던 모스크바는 몽골이 몰락하자 그 틈을 타 선생님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1472년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Ivan , 1440~1505)는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해 비잔티움 황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공에서 졸지에 황제가 되었으니 새 호칭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지은 호칭이 바로 차르(Tzar)였는데, 이것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 된다차르는 고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세기 독일 황제의 호칭이 된다. 카이사르의 독일식 이름은 카이저(Kaiser). 이렇게 카이사르의 이름은 오늘날 제왕절개 수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제외한다 해도 무려 2000년 이상이나 살아남았다. 곧이어 1480년에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 로스토프 등 주요 공국들을 통합하고 힘을 키워 마침내 킵차크 칸국을 멸망시키고 오랜 타타르인의 멍에를 벗었다.

 

이반 3세의 성공은 모스크바 대주교에게도 커다란 영광을 안겨주었다. 모스크바 교회는 비잔티움 정교회의 뒤를 이어 러시아 정교회가 됨으로써 동방교회의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이다서방교회의 교황에 해당하는 동방교회 수장의 지위는 러시아 황제, 즉 차르가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시작된 동방교회의 전통이다. 오늘날 그 지위는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3의 로마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비잔티움 정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니, 그보다도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왜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황제가 되었을까?

 

1261년 비잔티움 황제 미카일 8세는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을 간신히 물리치고 새로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열었다(결국 이 왕조가 제국 최후의 왕조가 된다). 그러나 그 무렵 비잔티움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 반도 정도만을 영토로 지배하고 있었을 뿐, 제국의 옛 영광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때는 제국이 아니라 서유럽의 보통 왕국보다 전혀 나을 게 없는 처지였다어쩌면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을 염두에 두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명패를 계속 유지하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즉 동로마 제국이 건재한 한 서로마 제국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비잔티움 제국이 12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도 로마 교황은 동방교회에 대한 경쟁심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제국의 시대는 갔다. 신성 로마 제국은 원래부터 무늬만 제국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도 제국에 필수적인 속국을 거의 잃었으므로 제국의 면모는 없었다. 그렇다면 중세에 동유럽과 서유럽에 하나씩 남아 있던 제국은 모양채를 갖추기 위한 의미에 불과했을까?. 이 굳이 서유럽 세계와 비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서쪽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언제 제국의 속국이었나 싶게 환골탈태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니까(그러나 이 나라들도 몽골 침략을 겪은 뒤에는 국력이 크게 약화된다).

 

 

쇠퇴하는 제국 동방제국은 전형적인 무늬만의 제국이었다. 서쪽에서는 중부 유럽을 로마 교회에 빼앗기고 동쪽에서는 강성한 이슬람의 침략에 시달려 제국은 나날이 약화되었다. 지도는 13세기 중반과 14세기 중반의 제국 영토를 비교해 보여준다.

 

 

게다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상인들에게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겨 국가 재정이 끊임없이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고질적인 권력의 불안은 여전했다. 그나마 소아시아라도 제국의 영토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시리아를 이슬람에 잃은 것은 이미 과거지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소아시아만은 유지하던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자 앞에 동방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수사자가 도전해왔다. 바로 튀르크의 오스만 제국이었다. 셀주크튀르크가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서 생겨난 힘의 공백을 틈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오스만튀르크는 1326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 바로 코앞에 있는 부르사를 수도로 삼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도전해온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침략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는 생각이었을까? 쇠약해진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계심으로 오스만 제국은 직접 공략에 나서지 않고 우회 전략을 택했다. 먼저 졸개들을 제압하고 나서 우두머리와 한판 붙겠다는 것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까지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를, 니코폴리스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르나에서 불가리아를 각각 물리쳤다. 이어 비잔티움 제국의 텃밭인 그리스마저 점령하니 이제 비잔티움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오스만 세력이 사방을 포위해올 때 비잔티움 황실에서는 서둘러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는 아비뇽 교황청 시절이었으므로 교황도 제 코가 석 자였다. 비잔티움 황제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그것은 300년 전에나 관심을 끌 법한 조건이었다당시 서유럽에서는 이미 한물간 동서 교회의 통합보다는 그리스도교권이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뇽의 교황은 실권을 잃었고, 또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의 와중에다 페스트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지원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설령 여력이 있었다 해도 비잔티움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동서 교회의 분열은 1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다른 종교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슬람 국가의 황제) 메메드 2(Mchined II, 1432~1481)는 이윽고 비잔티움의 명맥을 끊기로 결심하고 총공격에 나섰다. 수비 측과 공격 측의 병력 비율은 110, 결코 행운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예상대로 콘스탄티노플은 얼마 버티지 못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11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뒤로하고 멸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동방정교회에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나 아무래도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것만은 못했을 것이다. 모스크바가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플에 뒤이어 제3의 로마가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울러 오늘날 이스탄불이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도시로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라면, 콘스탄티노플보다는 못해도 한 군데가 더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그라나다가 그곳이다. 14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는 아라곤ㆍ카스티야ㅣ포르투갈의 그리스도교권 세 왕국과 반도 남단 그라나다의 이슬람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서유럽 중심지에서 일어난 중세 해체의 물결은 이곳에도 점차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성과는 이 지역의 쌍두마차에 해당하는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이었다.

 

1469년 이베리아에서는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그냥 선남선녀의 결혼식이라면 별일 아니었겠지만 신랑과 신부는 각각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Fernando, 1452~1516)와 이사벨(isabel, 1451~1504)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가 되었고, 다시 5년 뒤 페르난도는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가 되었다. 두 사람은 부부였으므로 함께 살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통합을 이루었다나중에 보겠지만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결혼은 서유럽 여러 왕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딸 후아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집을 가서 나중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하게 되며, 또 다른 딸 캐서린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왕비가 되어 영국 국교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로써 국가로서의 에스파냐가 출범했다(그전까지 에스파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부르던 지역 명칭에 불과했다).

 

새로 탄생한 에스파냐 왕국은 건국 기념행사로 레콘키스타의 마무리를 택했다. 1492년 에스파냐는 마지막으로 남은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800년에 이르는 이베리아의 이슬람 역사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런데 1492년은 또 다른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당시 에스파냐에 연감이 있었다면 올해의 사건’ 1위는 당연히 레콘키스타의 종료였겠지만, 세계사적으로 보면 1위는 따로 있다. 그해 봄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기쁜 나머지 이사벨은 몇 년 전부터 한 선원이 끈질기게 지원을 요청하던 계획을 허가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그 선원은 그해 가을 대서양으로 출발해 70일간 항해한 끝에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였다.

 

신대륙(서양의 입장에서만 신대륙이지만)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유럽의 중세는 완전히 끝났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전통적 항로인 지중해를 대체하는 대서양 항로를 개발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서유럽의 후발 주자에서 일약 세계화의 선두 주자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이제 그 과정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먼저 10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서양 문명의 줄기, 중세의 사회와 문화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무너지는 콘스탄티노플 오스만튀르크의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고 있다. 1100여 년 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천연의 항구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마침내 장구한 역사를 뒤로하고 이교도의 손에 함락되었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어 이름도 오늘날과 같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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