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폴리스의 시대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이오니아는 오리엔트와 가까운 만큼 그리스 본토보다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데 유리했으나, 원래 그리스 땅이 아니라 이민족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개척이 쉽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이오니아에 온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딜까? 바로 해안이다. 그리스인은 원래부터 바다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무슨 사태라도 벌어지면 언제든지 배를 타고 도피해야 했으므로 해안에 근거지를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피난 살림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거지 주변에 튼튼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다. 밀레투스와 에페소스 같은 도시들이 이 무렵에 건설된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인데, 특히 밀레투스는 예전부터 있던 도시였으나 그리스인의 이주로 활발한 해상무역 기지가 되었다(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가 바로 밀레투스 사람이다).
한편 아티카로 모여든 그리스 본토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도리스인들은 펠로폰네소스에 안주했으니, 그리스인들로서는 비록 안방을 내준 격이기는 해도 일단 큰 충돌의 위험은 넘긴 셈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민족 간의 갈등은 나중에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해외로 떠난 사람들처럼 남아 있는 사람들도 역시 폴리스를 건설했다. 하지만 배경이 다른 만큼 이오니아식 ‘요새형’ 폴리스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본토의 폴리스에도 성벽이 있었으나 그것은 방어의 역할보다는 주로 경계선의 역할이었다. 폴리스의 한가운데에 있는 아크로폴리스(광장)와 아고라(시장)는 정치ㆍ행정ㆍ여론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 등이 그리스 본토의 대표적인 폴리스들이다(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는 200여 개였고, 이오니아를 포함해 지중해 전역의 폴리스들을 모두 합하면 1000개가 넘었다).
본토의 폴리스들은 미케네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케네의 고대적 봉건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귀족 세력이 토지 확장에 나선 탓에 이미 암흑시대 후반기쯤 되면 그리스에서는 토지의 사유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의 힘이 커질 것은 당연한데, 이들이 바로 폴리스를 이루는 주축이 되었다. 그러므로 폴리스의 시민이란 그냥 주민들이 아니라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예는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도 폴리스의 시민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폴리스는 처음부터 귀족정치 체제로 출범했다.
▲ 그리스의 폴리스들 그리스는 동쪽에서 생겨난 문명의 씨앗을 받아 뿌리로 키우기에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지형적 중심지가 없었다. 이 두 가지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그리스에는 오리엔트 문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폴리스들이 탄생하게 된다.
폴리스에도 왕은 존재했지만 왕권은 보잘것없었다(아테네에도 왕은 있었으나 점차 권력이 약해져 나중에는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에 불과했다.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게 남아 있던 곳은 그리스적 전통에서 이탈한 스파르타뿐이었다)【원래 왕권과 귀족 세력은 항상 대립하게 마련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취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귀족이 지배하는 과두정에 가까웠다. 국민주권의 관념이 없 는 고대 민주주의는 진보적인 체제이기는커녕 오히려 왕정보다 후진적인 체제다. 그리스 이후에 고대적 왕정인 로마 제국이 성립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후 서양의 역사는 중세의 분권 시대를 거쳐 근대의 절대왕정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가 근대 민주주의로 넘어간다. 인류 역사에서 왕정, 귀족정(과두정), 민주정 이외의 정치제도는 출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루소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정치사상가들은 모두 그 세 가지 정치제도를 원형으로 삼았다】. 더구나 미케네 시대의 공동체적 성격마저 사라졌으므로 귀족들은 마음대로 토지를 겸병했으며,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정치적 발언권도 컸다. 귀족들은 전차와 말 등 무기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사병들을 거느려 자기 땅에서는 군주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묘한 일은 귀족들이 지배하는 폴리스들 간의 다툼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리스의 귀족들은 서로 뭉쳐 집단 방위 체제를 구성했다.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에 제후국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도 국경선의 개념보다는 도시와 성곽 중심의 국가였으니 체제상으로는 그리스의 폴리스나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립한 비슷한 상황이었는데도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이 차이를 보인 이유는 중심의 유무로 설명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미 천자 사상이 확립되었고 주나라의 왕실이라는 권위의 중심이 있었다【주나라를 받드는 정치 이념은 유학으로 체계화되어 이후 20세기 초반에까지 이르는 오랜 제국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 특히 한족 왕조들은 저마다 주나라의 계승을 이데올로기로 내걸었으며, 서양의 세력이 밀려오는 근대까지도 존주양이(尊周洋夷: 주나라를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를 구호로 내걸었다】. 따라서 중국의 분열 시대는 수백 년에 달했어도 결국은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반면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애초부터 중심이 없었기에 통일을 지향하지 않았던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지리적 중심의 유무도 관계가 있다). 서양에서 중앙집권 체제가 첫선을 보이는 것은 로마 제국이지만, 로마 역시 중국만큼 중심이 강력한 체제는 아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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