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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진정한 치욕이란(경술국치)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진정한 치욕이란(경술국치)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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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치욕이란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에게로 넘어갔다.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러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군부가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는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1909년 가을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토벌작전으로 한반도 내의 의병운동은 완전히 진압되었으므로 남은 절차는 합병 조약을 비준하는 것뿐이었다.

 

일본의 통감은 교체되었어도 일본의 조선 측 파트너는 죽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이제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이완용이 바로 그 영원한 파트너다. 1910822일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비밀리에 만나 합병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건국한 지 519년 만에, 왕통으로 따지면 27대 만에 마침내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어찌 보면 1800년에 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죽으면서 망했어야 할 왕조가 100년 이상 쓸데없이 존속한 셈이니까 별로 통분해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때 망했더라면 새 왕조로 교체되었을 것을 오래 살아서 오히려 남의 손에 나라를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건전지가 아니라면 오래 간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병이라는 구체적인 저항 형태는 사라졌으나 워낙 큰일을 저지른 만큼 일본은 이완용을 제외한 조선 국민들의 반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조약을 비준해 놓고도, 정치단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조정 원로대신들을 연금하는 등 정지작업을 거친 다음 829일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이 사건으로 데라우치는 하마터면 전임자와 똑같은 길을 걸을 뻔했다.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 그 해 12월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신의주에 오는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는 실패했으나 데라우치는 안씨 형제와의 악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으리라. 보복에 나선 그는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이끄는 항일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타깃으로 삼아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였다(안명근은 신민회 소속이 아니었으니 엉뚱한 분풀이인 셈이다). 당시 105명이 검거되었기에 그것을 ‘105인 사건이라 부른다.

 

결국 조선의 국민들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일주일 동안이나 그런 사실조차 몰랐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는 한일합병(韓日合倂)이라 부르지만, 이 해가 경술년인 탓에 비공식적으로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적인 치욕을 결코 잊지 말고 길이 기억하자는 의미에서는 한일합병보다 경술국치라는 노골적인 이름이 더 나을 듯싶다(더구나 일본에서는 일한합병이라 부르는 것을 굳이 순서를 바꾸어 표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합병을 한국이 주도했다는 뜻일까?).

 

 

어쨌든 이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별도의 정부는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즉각 해체되고 그 대신 일본 제국정부의 위임을 받아서 한반도를 지배할 총독부(總督府)가 탄생한다.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자동 승격되었고,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그의 충실한 파트너인 이완용은 한 제국의 총리대신이란 직책에서 일개 총독부의 고문이 되었으니 강등된 것이었으나, 원래 제국보다 총독부가 높았으니 실은 승진인 셈이다. 또한 3년 전에 멋모르고 고종(高宗)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았던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지위가 한 급 낮아진다. 그래도 그로서는 왕실이 그렇게나마 존속하게 된 것에 감지덕지해야 했을까? 그렇게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이 조선 왕실의 문을 아예 닫아 버리지 않은 이유는 뻔하다. 한편으로는 왕실로 대표되는 조선 왕조의 상징적인 측면마저 없앨 경우 국민적 저항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순종(純宗)을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제국의 속국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황제(일본 천황)를 섬겨야 하니까.

 

우리 역사에서 이 한일합방은 일본이 조선 국민에게서 나라를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일본은 과연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우리 민족에게서 강제로 나라를 빼앗은 것일까?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일본은 분명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힘을 앞세워 조선을 병합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이완용이라고 하는 조선 측 파트너가 있는 한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국노든 뭐든 이완용은 엄연히 조선을 대표하는 관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는 분명 순종(純宗)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데라우치와 국제법상으로 하자 없이 합병을 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국가 사이의 정치적 행위를 진행한 데 불과하다(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는 것과 절차의 하자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만약 일본이 을미사변(乙未事變)에서처럼 물리력을 동원해서 순종을 살해하거나 자결을 강요한 다음 조선을 합병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일본은 교묘하게도 이완용이라는 조력자를 만들어내서 작업을 진행했으므로 도덕적 비난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 나라를 빼앗긴 데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당연히 순종(純宗)과 이완용에게 물어야 한다. 비록 일본의 압력 앞에 그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아무리 바지 저고리라고 해도 일국의 왕과 전권대신이라면 그 상징에 걸맞는 현실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이 점은 앞서 살펴본 사대부(士大夫) 시대의 조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에 불과했다. 따라서 사대부 세력이 권력다툼의 과정에서 국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집권을 공식적으로 추인받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국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상황의 반전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게 중요하다(비록 사대부들의 입김이 컸다고는 하나 예컨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조광조(趙光祖)를 최종적으로 단죄한 것은 중종中宗이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서 항복을 결심한 것은 인조仁祖였다), 이렇듯 상징은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게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직후 상징 조작부터 손대는 것은 바로 그게 권력의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고종(高宗)의 경우도 그랬듯이, 만약 순종(純宗)이 합병 조약에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했다면, 또 이완용 같은 적극적인 협력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상당한 난항을 겪었을 것은 분명하다(실제로 일본은 조약의 비준을 순종의 조칙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물론 당시의 정황에서는 합병이 불가피했다는 추론도 일리는 있다. 이를테면 누가 왕이라 해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어차피 매국노 몇 명쯤은 나오게 마련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책임 소재 자체를 따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필연성을 읽는 관점과 개별 사건의 책임을 묻는 관점은 서로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당시 조선의 정체(政體)가 왕국이라는 사실이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조선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조선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이 한일합병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빼앗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므로 그런 말은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굳이 표현한다면 한일합병은 조선의 지배층이 조선의 소유권과 지배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사건이라고 말해야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소유자는 바로 왕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도 역시 단지 형식적이거나 절차적인 것만이 아니다. 조선은 외형상 전제군주국이었기에 일본은 교활하게도 조선의 왕실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쉽게 나라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유럽 국가들처럼 의회가 있었다면 국가 권력과 주권 소유자가 분산되어 있으니까 일본으로서도 조선을 통째로 집어삼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0여 년 전에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던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뛰어난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독립협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형식적으로라도 의회와 헌법을 갖추었더라면 일본은 합병이 아닌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오직 사직을 보존한다는 일념으로 고종(高宗)순종(純宗) 부자는 다른 모든 것을 내주었지만,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오직 사직뿐이었으니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하긴, 조선! 왕국인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왕실 보존이니 그들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순종이 취했어야 할 태도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조약을 비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야 했다(그랬다 해도 순종이 죽는 일은 없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영웅적인 기개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국왕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만이라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맞았을 때 인조(仁祖)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더 많은 조선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겠지만, 일본의 압력을 순종(純宗)이 끝까지 거부한다고 해서 조선 국민들이 특별히 더 피해를 입는 일은 없다. 국치로 불릴 만큼 한일합병은 역사적이고 국가적인 치욕이지만, 진정한 치욕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런 못난 지배자를 두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통감에서 총독으로 전임 통감과 달리 군 데라우치가 새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것은 일본의 합병 전략이 막바지 단계에 왔음을 뜻한다. 1910723일에 데라우치가 마차를 타고 부임하는 장면인데, 다음 달에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총독으로 승진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때늦은 저항

진정한 치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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