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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모두가 침묵한 때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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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모두가 침묵한 때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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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침묵한 때

 

 

총독부의 치졸한 일체화 정책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의 역사 전체를 식민사관으로 도배한 조선사(朝鮮史)37권을 간행한 것은 그나마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이름으로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배하도록 한다거나, 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외우도록 한 것은 정책이라기보다는 조잡의 극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968년 박정희는 독재정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걸 만들어 국민들에게 외우도록 강요했는데, 필경 황국신민서사에서 커닝한 구상일 것이다). 그에 비해서는 차라리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이나 동척의 활동이 오히려 식민지 지배에 어울리는 정책이 아니었을까?

 

사실 당시 일본은 정책의 멋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곧이어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세계 최강 미국마저 끌어들인 판에 이제는 더 이상 교활한 방식으로 식민지 수탈을 포장할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이전까지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했던 인력 충원도 이때부터는 노골적인 강제 징발로 대체된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전장으로(징병), 일할 수 있는 자는 광산으로(징용), 심지어 젊은 여성들마저 위안부로 만들어 전장과 광산으로 보내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전쟁 수행을 위한 전면적 수탈 체제로 편제했다. 이제 한반도는 식민지의 어둠을 넘어 캄캄한 암흑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그때 항일운동의 맥이 뚝끊겨 버렸다는 사실이다. 조선공산당이 유명무실화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930년대에 그토록 치열했던 항일무장투쟁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사그러든다. 가장 어둠이 짙을 때, 나라와 민족이 가장 깊은 도탄에 빠져 있을 때, 항일투쟁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할 때 항전이 중단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멀리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강점한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유고, 체코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정작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인 한반도에서는 짙은 어둠에 깊은 침묵으로 대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완전한 침묵은 아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는 1940년에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해서 처음으로 무력 항전의 기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성립한 지 20년 뒤에야 비로소 창설된 군대가 제 기능을 하기는 어렵다. 사령관과 참모를 정하고 지휘 체계와 편성을 갖추느라 부산을 떨다가 정작 필요한 병력은 군대 창설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300명 정도 모집하는 데 그쳤으니 광복군은 그저 임시정부도 군대를 거느렸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당시 유일하게 항일투쟁을 지속한 사람들은 중국 홍군에 속한 조선 유격대원들뿐이었으나 이들은 일단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항전한 것이었으니 논외다1942년 김두봉은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무력 투쟁을 계속했다(공교롭게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군대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다. 하지만 이 군대는 주로 정보전과 테러에 주력했으니 전투를 위주로 한 조선의용군과는 다를뿐더러 나중에는 광복군에 흡수되었다). 당시 항일투쟁에서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종전 후 정치적 구도에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홍군의 해방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홍군 지휘부의 지휘를 받았던 조선의용군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머지는 모두 뭘 했을까?

 

 

 징병 그리고 징용 전쟁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전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했다. 위는 아들을 학병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이고, 아래는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긴 피 맺힌 절규다. 학병은 형식적으로는 자원이었으나 총독부는 각 학교를 통해 사실상 강제동원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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