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모순의 집약지②
사실 조선에서는 10년 동안 일본의 강압적 지배에 대한 반일 감정이 축적되어 왔거니와 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될 만한 분위기도 팽배해 있었다. 1919년 1월 고종(高宗)이 70년에 가까운 욕된 삶을 마감하고 죽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던 것이다. 물론 근거없는 소문이었고 또 고종에게 조선 민중이 애정을 품을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식민지 세상에서 겪는 설움은 설사 헛소문이라 해도, 설사 못난 국왕이라 해도 폭발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가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저명 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는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원래 거사 일자는 3월 3일 고종(高宗)의 장례에 맞췄으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틀 앞당겨졌다).
이른바 민족대표로 불리는 33명은 음식점에서 나와 순순히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그들도 총독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미리 소식을 듣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분노한 조선 민중은 각 종교계 인사들의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사건을 엄청나게 증폭시켜 이후 몇 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 나아가 만주와 연해주까지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 뒤덮는 대형 사태로 엮어냈다. 그러나 식민지가 된 이래 처음으로 일본의 지배에 대규모로 항거한 탓일까? 이 운동은 산발적으로 이어졌을 뿐 전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전쟁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당시의 세계 정세에 비하면 순진하다고 할 만큼 철저히 비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일본은 소수의 기마경찰과 군대로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남긴 중대한 교훈은 한 가지, 바로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면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정치 망명객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름은 비록 정부' 라고 해도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에서 도망쳐나온 인물들이 제대로 항일투쟁을 지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45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가 그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저 명패만 내리지 않은 데 가장 큰 의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물론 윤봉길尹奉吉과 이봉창李基昌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작품’이지만,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도 아무런 군대 조직도 없이 테러만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면 ‘정부’라는 이름이 오히려 사치스럽다).
▲ 뒤늦은 함성 나라를 빼앗길 때도, 의병들이 들고 일어날 때도 기층 민중은 앞에 나서지 않았으나, 토지조사사업과 동척의 활동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지자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은 3ㆍ1운동 당시 광화문의 비각 앞에 모인 군중의 모습이다. 비록 뒤늦었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 부대들이 속속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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