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3부, 2장 열하로 가는 ‘먼 길’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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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열하로 가는 먼 길

 

 

요동에서 연경까지

 

 

압록강에서 연경까지가 약 2천여 리. 연경에서 열하까지가 약 700. 토탈 육로 2700여 리.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다.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은 언제나 모험의 대상이다. 공간적 이질성이 주는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여행은 불가능하리라. 다른 한편 두려움과 경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여행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스릴도, 서스펜스도 없다면, 대체 뭐 때문에 여행을 한단 말인가?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벌판을 지나 성경(지금의 심양)을 거쳐 북경 관내에 이르는 약 2천여 리의 여정은 어드벤처의 연속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 몸서리 쳐질 만큼 엄청난 폭우, 산처럼 몰아치는 파도 등 대륙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강을 건너는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소낙비는 이후에도 내내 일행을 괴롭힌다. 천 리 밖에 폭우가 내리면 하늘이 더없이 청명해도 시내에는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친다니, 강의 스케일이 우리의 상상으론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땅의 기운도 거칠기 짝이 없어 요동 진펄 천리는 이른바 죽음의 늪이다.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워 비를 맞으면 반죽이 되어 시궁창이 되어버린다. 산서성 장사꾼 20명이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 한꺼번에 빠져 졸지에 사람도 말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었건만 지척에서 뻔히 보면서 구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특히 연암은 비대한 몸집에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라, 그 괴로움은 몇 배 더하였다. 중국인 뱃사공의 등에 업혀서 건너기도 하고, 강 한가운데 모래사장에 갇힌 채, 뱃사공이 없어 쩔쩔 매기도 했다. 연암은 그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포착한다.

 

도강록(渡江錄)에서 파도가 산처럼 밀려오는 강을 건널 때의 광경이다.

 

 

창대는 말 대가리를 꽉 껴안고 장복은 내 엉덩이를 힘껏 부축한다. 서로 목숨을 의지해서 잠시 동안의 안전을 빌어본다.

昌大緊擁馬首 張福力扶余尻 相依爲命以祈.

 

말이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말 몸뚱이가 왼쪽으로 쏠린다. 대개 말의 배가 물에 잠기면 네 발굽이 저절로 뜨기 때문에 말은 비스듬히 누워서 건너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다.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둥둥 떠서 흩어져 있다. 급한 김에 그걸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빠지는 걸 면했다. ~ 나도 내 자신이 이토록 날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창대도 말 다리에 차일 뻔하여 위태로웠는데, 말이 갑자기 머리를 들고 몸을 바로 가눈다. 물이 얕아져서 발이 땅에 닿았던 것이다.

馬至中流 忽側身左傾 盖水沒馬腹則四蹄自浮 故臥而游渡也 余身不意右傾 幾乎墜水 前行馬尾散浮水面 余急持其尾 整身一坐 以免傾墜 余亦不自意蹻捷之如此 昌大亦幾爲馬脚所揮 危在俄頃 馬忽擧頭正立 可知其水淺著脚矣.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아슬아슬함에 손에 땀을 쥐면서도, 한편으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창대, 장복이, , 그리고 연암이 서로 뒤엉켜 물을 건너는 모습은 그렇다치고, 물에 빠질뻔하자 잽싸게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말꼬리를 잡고 몸을 가누는 연암의 순발력은 정말 한 편의 만화 아닌가. 또 자신의 재빠름에 감탄하는 모습은 더 가관이다. 스릴과 유머의 기묘한 공존!

 

책문에 들어선 뒤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길에서 비를 만나 5~6일을 여관에서 허비하게 되자 연암의 삼종형인 정사 박명원의 마음은 점점 초초해진다. 마침내 그는 결단을 내린다. “나랏일로 왔으니 설사 물에 빠져 죽는다 해도 그것이 내 본분이니, 다른 도리가 없네[吾爲王事來 溺死職耳 亦復柰何].” 이러니 누가 물이 많아서 건너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악천후를 무릅쓴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그 정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위급했던가를 연암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물을 건널 때면 모두들 눈앞이 캄캄하여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때 하늘을 우러러 잠깐이나마 목숨을 빌지 않은 자가 없었다. 간신히 건너편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돌아보며 위로하고 기뻐하기를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 듯이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앞에 있는 물이 이미 건너온 물보다 더 험하다는 말을 들으면 서로 마주 보며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其渡水之際 莫不震掉嘔眩失色 仰天潛禱其須臾之命者 數矣 旣至彼岸 方相顧慰賀 如逢再生之人 而又報前水尤大於此河 則相顧已索然意沮

 

 

한마디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 숨돌릴 틈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하긴 그 광대무변한 중원천지를 오직 말과 배, 발품만으로 관통하려니 이 정도의 모험이야 감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터, 이때 여행은 삶 그 자체가 된다. 생사가 엇갈리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일상의 따분함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삶의 새로운 경계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정사는 멈추지 않는다. 최고 책임자의 입장으론 제날짜에 연경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건 곧 왕명을 거역한 반역행위이기 때문이다. 수행원들의 두려움과 불평을 제군들은 걱정말게나. 이번에도 왕령(王靈)이 도우실 게야[諸君無慮也 莫非王靈也].”하고 잠재워가면서 전진을 계속한다. 하지만 불과 몇 리도 못 가서 다시 물을 건너게 되고, 어떤 땐 심지어 하루에 여덟 번이나 건너기도 하였다. 하루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다니! 공수특전단 지옥훈련도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긴 열하로 갈 때는 하룻밤에 아홉 번을 건너기도 하니, 그 정도는 약과인 셈이다. 이리하여 쉴참(중간 휴게소)을 건너뛰어가며 쉴새없이 달리니, 말들은 더위에 쓰러지고, 사람 역시 모두 더위를 먹어 토하고 싸면서 마침내 연경에 도착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그러나 황제는 연경(북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가 있었던 것이다. 사신 일행은 그저 제날짜에 도착하여 예만 표하면 그뿐이라고 여긴 탓에 이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정사만은 연경에 오는 도중 혹 열하까지 오라는 명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을 놓지 않긴 했다. 그러나 연경에 도착하여 나흘 동안 별일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는 순간, 사태는 예기치 않게 꼬이기 시작했다. ‘예부에 가서 표자문(表咨文)을 내고숨을 돌리는 사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 벌어진다.

 

깊은 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온다. 자다가 놀라 깨어나면서 연암은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 그래도 관문이 깊이 잠긴 것을 생각하면서 역사적인 변고를 떠올렸던 참이다. ()나라가 망할 때, 마지막 황제 순제가 북으로 도망가면서 그제야 고려의 사신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니 사신이 관문을 나온 뒤에야 비로소 명나라의 군대가 온 천하를 점령한 줄 알았고, 가정제(嘉靖帝) 때에는 달단족(韃靼族, 타타르족)이 갑자기 수도를 에워싼 일이 있었으며 등등, 식자우환(識字憂患)!

 

아무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변고는 변고였다. 누군가 이제 곧 열하로 떠나게 되었답니다[卽今赴熱河矣].”라는 전갈을 알려왔다. 통관을 비롯한 사행단원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고 난리가 아니다. 겨우 목숨을 걸고 왕명을 수행했는데 다시 저 아득한 북쪽 땅 열하까지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런데 연암은 이 상황에서 느닷없이 악동기질을 발휘한다. 수행원인 내원과 변계함이 놀라 깨어서, “관에 불이 났소[館中失火耶]?” 하자, “황제가 열하에 거둥하여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오[皇帝在熱河 京城空虛 蒙古十萬騎入].”하고 장난을 친다. 앞서 떠올렸던 불길한 예감들을 십분 응용(?)하여 불난 데 부채질을 한 것이다. 속아 넘어간 수행원들은 기절초풍하기 직전이다. 이어지는 통곡소리 아이고!”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았을 때 대체 어떤 표정들을 지었을지.

 

바삐 상방으로 가니 온 객관이 물끓듯 한다. 역관들이 달려와 모두 황급하여 얼굴빛을 잃은 채, 혹은 제 가슴을 두드리고 혹은 제 뺨을 치며 혹은 제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이젠 카이카이(開開)[乃今將開開也]” 한다. ‘카이카이목이 달아난다[斬斷]’는 말이다. 연유를 캐고 보니 그럴 만했다. 황제가 사신을 기다리다가 예부가 멋대로 결정하여 표자문만 올린 것을 알고서는 노하여 감봉 처분을 내렸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황제의 분노 앞에서 상서(尙書) 이하 연경에 있는 예부관원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진동이 열하에서 연경까지 삽시간에 전해져 지금 이 객관까지 도달한 것이다. 황제의 분노를 가라앉힐 방법은 오직 하나, 얼른 짐을 꾸려 떠나는 것뿐이다.

 

 

 북경성(北京城)

세계제국 청나라의 궁성답게 장쾌한 스케일과 화려한 스펙터클을 한껏 뽐내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경복궁이나 창경궁은 후원쯤으로 느껴질 정도다. 지금 봐도 그러니, 18세기 당시 조선 사행단이 이곳을 통과할 때 얼마나 압도당했을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제행무상이라고, 불과 150년도 안 돼 제국은 무너지고, 자금성은 한낱 관광지로 전락하게 될 줄이야 누군들 짐작이나 했을까. 열하일기』 「황도기략(黃圖紀略)에 당시 북경의 곳곳이 손금보듯 상세히 스케치되어 있다.

 

 

 

비약과 단절의 연암식 기법

 

 

열하로 가는 길은 연경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다. 지리지에는 450여 리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700, 그것도 험준한 산과 물을 수도 없이 지나야 하는 코스다. 길은 멀고 일정은 빠듯한지라 인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했다. 연암은 비공식수행원이라 가도 되고 안 가도 상관없는 처지다. 그래서 연암은 머뭇거린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요해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북경에 남아 이국(異國)의 친구들을 사귈 것인가. 정사이자 삼종형인 박명원은 그에게 중국에 온 뜻을 되새기면서 이번 길이야말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라며 꼭 가야 한다고 충고한다[汝萬里赴燕爲遊覽 今此熱河 前輩之所未見 若東還之日 有問熱河者 何以對之 皇城人所共見 至於此行 千載一時 不可不往]. 연암도 그 결정에 따른다.

 

이 과정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이때야말로 연암의 생애, 아니 18세기 지성사의 새로운 획이 그어지는 클리나멘(clinamen)의 순간이다. 만약 연임이 그냥 북경에 남았더라면? 물론 그것만으로도 연암의 연행록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을 테지만, 그것이 주는 충격과 효과의 진폭은 비교적 평이했을 것이다. 그만큼 연암과 열하의 만남은 천고에 드문 마주침이라 할 만하다.

 

사람과 말을 점고(點考)해보니, 사람은 발이 모두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서 실로 대어갈 것 같지가 않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없애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하여, 연암도 하는 수 없이 장복이를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려가기로 했다[人皆繭痡 馬盡尩羸 實無得達之望 行中皆除馬頭 只帶控卒 余亦不得已落留 張福獨與昌大行]. ‘환상의 2인조가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기는 하나, 그래도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왔는데, 막상 떼어놓으려니 연암의 가슴이 미어진다. 장복이는 또 어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미운정 고운 정다 든 두 사람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창자가 끊어질 듯이 서러워한다.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손을 놓지 못한다. “장복아, 울지 말고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내가 이렇게 타이르자 다음에 창대의 손목을 잡고 더욱 구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 오듯 한다.

張福執鐙 悲咽不忍捨 吾喩令辭還 則又執昌大手 兩相悲泣 淚如雨下

 

 

연암은 문득 말 위에서 생각한다. “인간사 중에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 생이별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다[念人間最苦之事 莫苦於別離 別離之苦 莫苦於生別離].”.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그거야 사람마다 겪는 것이고, 천하의 순리가 아닌가. 또 죽은 이에겐 괴로움이 없을 터. 그러나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질 때, 그것도 흘러가는 물을 사이에 두고 헤어질 때의 그 애달픔을 무엇에 비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연암의 이별론이 시작된다. 어떤 소재든 그에 알맞은 리듬과 악센트를 부여하는 것이 연암의 장기 아니던가.

 

장복이와 이별하는 장면에서 시작된 이별론은 어느 사이 평양의 배따라기곡에 대한 해설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왔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조선 사신단 일행 사이의 이별장면으로 변주된다. 소현세자는 효종의 형으로 오랫동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청문명의 정수를 배우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국하자마자 아버지 인조와 불화하면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소현세자의 생애 전반에 드리운 비운의 그림자를 떠올려서였을까. 이 대목에 이르면 연암은 이제 장복이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상념에 도취되어 격정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한다.

 

 

당시 처지가 곤궁하고 위축된 것이 매우 심하고 의심스러워 꺼려지는 것이 너무 깊어서 눈물을 참고 소리를 삼키며 얼굴에 참담함을 드러내지 못했으니, 그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당시 남아 있는 신하들이 떠나가는 이들을 멀리서 바라볼 때 요동벌판은 끝없이 펼쳐지고 심양의 우거진 나무들은 아득한데, 사람은 콩알만큼 작아지고 말은 지푸라기처럼 가늘어져 눈길이 닿는 곳에 땅의 끝, 물의 끄트머리가 하늘에 잇닿아 그 경계가 사라져버리고, 해는 저물어 관문을 닫아걸 때 그 애간장이 어떠했을꼬 (중략)

當時臣僚去留之際 使价往來之時 何以爲懷 主辱臣死 猶屬從容 何留何去 何忍何捨 此吾東第一痛哭時也 嗚呼痛哉 蟣蝨微臣 試一念之於百年之後 猶令魂冷如烟 骨酸欲摧 而况當時離筵拜辭之際乎 而况當時畏約無窮 嫌疑旣深 忍淚呑聲 貌藏慘沮者乎 而况當時從留諸臣之遙望行者 遼野茫茫 潘樹杳杳 人行如荳 馬去如芥 眼力旣窮 地端水倪 接天無垠 日暮掩館 何以爲心 (중략)

 

저 화려한 기둥에 채색한 문지방이나 봄날의 푸르고 맑은 날씨라 해도 애달픈 이별의 풍경이 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雖畵棟綉闥 春靑日白 盡爲吾別離之地 盡爲吾痛哭之時

 

 

그런데 아뿔사! 멋진 이별론을 펼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 몰두하느라 연암은 엉뚱한 길로 들어서버렸다.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수레바퀴를 쫓아간다는 것이 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벌써 수십 리나 돌림길을 걸었다[日旣暮 迷失道 誤追車跡 迤西益行 已迂數十里矣 ].” 게다가 양편 옥수수가 하늘에 닿을 듯 아득하고 길은 함 속에 든 것 같은데, 웅덩이에 고인 물이 무릎에 빠지며 물이 가끔 스며 흐르는 바람에 구덩이를 파놓았어도 물이 그 위를 덮어서 보이지 않는다[左右薥黍 接天微茫 路如凾中 而停水沒膝 水往往洄洑 鑿爲坑坎 而水被其上 不可見也].” 사태가 이러니, 따라 잡느라 죽을 고생을 다한 건 말할 것도 없다. 마음껏 상념에 젖어도 좋을 만큼 길이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목도 갈 데 없는 한편의 시트콤이다. 생각해보라. 이별은 생이별이 가장 슬프다느니, 그것도 강에서 이별을 해야 제격이라느니, 배따라기가 어떻고, 소현세자가 어떻고 하면서 비장한 테마뮤직이 흐르다가 느닷없이 길을 잘못 들어 좌충우돌하며 따라잡는 꼴이라니. 하지만 이런 식의 비약과 단절이야말로 연암식 기법의 진수다. 판소리로 치면, 긴장과 이완의 변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열하로 가는 험난한 여정

 

 

물론 이건 수난의 서곡에 불과했다. 북방의 기후는 한마디로 예측불허 그 자체였다. 느닷없이 구름이 덮여 하늘은 깜깜해지고 바람이 삽시간에 모래를 날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으니, 하루에 도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오르내려야 했다.

 

 

중류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남쪽에서 한 조각 검은 구름이 거센 바람을 품고 밀려왔다. 삽시간에 모래를 날리고 티끌을 말아올려 자욱한 안개처럼 하늘을 덮어버리니,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배에서 내려 쳐다보니 하늘빛이 검푸르다. 여러 겹 구름이 주름처럼 접힌 채, 독기를 품은 듯 노여움을 발하는 듯 번갯불이 번쩍번쩍하고 벽력과 천둥이 몰아쳐 마치 검은 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모습이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方渡至中流 忽有一片烏雲裹黑風 自西南漂轉而來 飛沙揚塵 如烟如霧 頃刻晝晦 莫卞咫尺 旣下船 仰視天色 黝碧紺黛 而層雲襞摺 亭毒弸怒 電縈其間 如縢金線 爲千朶萬葉 霆車雷鼓 旋輾鬱疊 疑有墨龍跳出也

 

 

납량특집 뺨치는 배경 아닌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선 사신들을 빨리 오게 하라는 황제의 재촉이 들이닥치자, 그야말로 일행은 눈썹을 휘날리며달려가야 했다. 조선에 대한 황제의 과도한 편애가 오히려 화근이었던 셈이다. 황제는 조선 말이 좀 질이 떨어지는 종자라 판단하여 건장하고 날랜 말을 제공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연암이 보기에도 중국 말은 조선 말과는 종자가 달랐다. 한 시간에 70리를 간다는 중국의 말은 노래하듯이 선창을 하면 뒤에서는 마치 범을 쫓듯이 응한다. 그 소리가 산골과 벼랑을 울리면 말이 일시에 굽을 떼어 바위나 시내, 숲이며 덩굴을 가리지 않고 훌훌 뛰어오르며 쏜살같이 내달린다. 그 달리는 소리가 마치 북을 치듯 소낙비가 퍼붓듯 거침이 없다[前者唱聲若歌 後者應號 如警虎者 響震崖谷 馬乃一時散蹄 不擇岩壑磎磵林木叢薄 超躍騰踏 如鼓聲雨點].” 이름하여 비체법(飛遞法), 그런 반면, 조선의 말은 마치 쥐처럼 잔악한 과하마인 데다 견마 잡히고서도 오히려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실정이다. 그러니 만일 황제의 명령으로 청국의 말이 제공된다 한들 누가 바람처럼 달리는 역마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말이 제공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불행 중 다행!

 

밀운성 밖에서 또 한번 위기에 직면한다. 밀운성 밖을 감돌아서 7~8리를 갔을 즈음 별안간 건장한 호인(胡人) 몇이 나귀를 타고 오다가 손을 내저으며, “가지 마시오. 앞으로 5리쯤에 시냇물이 크게 불어서 우리도 모두 되돌아오는 길이오[勿去也 前去五里所 溪水大漲 吾們還來也 ].” 한다. 이에 서로 돌아보며 낯빛을 잃고 모두 길 가운데에 말을 내려 섰으나,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로는 땅이 질어서 잠시 쉴 곳도 없다. 그제야 통관과 역관들을 시켜서 물에 가보게 하였다. 그들이 돌아와서는, “물 높이가 두어 발이나 되어 어찌할 수 없습니다[水高二丈 無可柰何].” 한다. 버드나무 그늘이 촘촘하고, 바람결이 몹시 서늘한 데다 하인들의 홑옷이 모두 젖어서 덜덜 떨지 않는 자가 없다.

 

결국 밀운성으로 다시 들어갔으나 밤이 깊어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갔으므로 백 번 천 번 두드린 끝에 간신히 한 아전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겨우 지친 몸을 추스리고 있던 차, 또 다시 황제의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들이닥친다. “황제께옵서 사신을 고대하고 계시오니 반드시 초아흐렛날 아침 일찍 열하에 도달하여 주시오[皇帝苦待使臣 必趁初九日朝前 達熱河].” 두세 번 부탁하고는 쏜살같이 돌아간다. , 이 스트레스를 뭐에 비할 것인가.

 

마음은 한층 바빠졌건만, 때는 바야흐로 새벽녘이어서 물도, 땔나무도 없으니 밥을 지을 길이 없다. 하인들은 모두 춥고 굶주려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연암은 그들을 채찍으로 갈겨 깨웠으나 일어났다가 곧 쓰러지곤 한다. 하는 수 없이 몸소 주방에 들어가 살펴본즉 하인 영돌이만 홀로 앉아 공중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뽑는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종아리에 고삐를 맨 채 뻗어서 코를 골고 있다. 마침 간신히 수숫대 한 움큼을 얻어서 밥을 지으려 했으나 한 가마솥의 쌀에 반 통도 못 되는 물을 부었으니 끊을 리가 없다. 결국 밥 한숟갈도 들지 못한 채, 연암은 형님인 정사와 함께 술 한 잔씩을 마시고 곧 길을 나섰다. 먼데 닭이 홰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 와중에 연암의 견마잡이 창대가 강을 건너다 말굽에 밟히는 사고가 발생한다. 마철(말 편자)이 깊이 들어 쓰리고 아파 촌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게 되었다. 연암은 하는 수 없이 기어서라도 뒤를 따라 오게 하고 스스로 고삐를 잡는다. 동정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길을 나서자마자 사나운 물결이 길을 깊이 파간 바람에 어지럽게 흩어진 돌들이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손에는 등불 하나를 가졌으나 거센 새벽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리하여 다만 동북쪽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별빛만을 바라보며 전진하였다. 몹시 춥고 주린 데다 발병까지 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창대가 이 차가운 물을 또 건널 생각을 하니 연암의 마음은 쓰라리다.

 

하지만 창대를 걱정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야 할정도로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이다.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고 나서야 겨우 물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물 밑바닥의 돌에 이끼가 끼어서 몹시 미끄러운 데다 물이 말의 배까지 넘실거리는 바람에 다리를 옹송그리고 두 발을 모은 채 한 손으론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론 안장을 꽉 잡았다. 끌어주는 이도 부축해주는 이도 없건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凡一水九渡 水中石苔滑 水沒馬腹 攣膝聚足 一手按轡 一手握鞍 無牽無扶 猶免墜跌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라는 유명한 문장은 이런 어드벤처를 대가로 해서 탄생한 것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체험 속에서 획득된 삶의 지혜,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문(), 거기에 비하면 삶과 유리된 채, 그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쪼가리 지식들을 엮는 우리들의 글쓰기는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애꿎은 나무들만 고달프게 만드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따름인저!

 

그나마 다행인 건 창대가 다시 일행에 합류한 것이다. 열하에 가까워질 즈음 별안간 창대가 말 앞에 나타나 절한다. 사연인즉, 청나라 제독이 지나갈 때 길가에서 서럽게 울부짖으니 제독이 말에서 내려 위로하고 친히 음식까지 권한 뒤, 자기가 탔던 나귀를 주어 가게 했다는 것이다. 나귀가 어찌나 날래던지 다만 귓가에 바람소리가 일 뿐이었다나. 연암은 이국의 한 마부를 위하여 극진한 친절을 베푼 제독의 대국적 풍모에 감탄한다. 덕분에 큰 사고가 없었으니 그나마 운이 좋았던 셈이다.

 

 

 

 

천신만고(千辛萬苦)’

 

 

그러나 가장 힘든 건 뭐니뭐니해도 야간비행이다. 일정을 당기기 위해서는 쉴참을 건너뛰는 것, 밤을 도와 행군하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온 나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리는 마지막 난코스가 시작되었다. 무박나흘의 지옥훈련’!

 

 

하인들이 가다가 발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존다. 나 역시 졸음을 이길 수 없어, 눈시울은 구름장을 드리운 듯 무겁고 하품은 조수가 밀려오듯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눈을 빤히 뜨고 사물을 보긴 하나 금세 기이한 꿈에 잠겨버리고, 옆사람에게 말에서 떨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깨워주면서도 정작 내 몸은 안장에서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곤 한다.

下隷行且停足者 皆立睡也 余亦不勝睡意 睫重若垂雲 欠來如納潮 或眼開視物 而已圓奇夢 或警人墜馬 而身自攲鞍

 

창대가 가면서 뭐라뭐라 떠들어대기에, 나 역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잠꼬대가 그토록 생생하였다.

昌大行且語 吾初與酬酢 細察之 譫囈鄭重也

 

 

얼마나 졸리웠으면 연암은 길가의 돌에다 대고 이렇게 맹세한다.

 

 

, 장차 우리 연암 산중에 돌아가면, 일천 일 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희이선생(希夷先生, 한번 잠들면 천 일씩 잤다는 도사)보다 하루를 더 자고, 또 코 고는 소리를 우레처럼 내질러 천하의 영웅이 젓가락을 놓치게 하고, 미인이 기절초풍하게 할 것이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내 기필코 너와 같이 돌이 되고 말 테다

吾且歸吾之燕岩山中 當作一千一日睡 要勝希夷先生一日 鼾聲若雷 使英雄失箸 美人象車 不者有如石

 

 

맙소사! 아무리 졸리기로 이런 맹세를 하다니.

 

이 정도면 가히 전시 상황이라 할 법하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시가 아니고서야 이런 식의 강행군을 어찌 감내한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황제의 명령이 어떤 것인지 이보다 더 실감나게 말해주는 것도 드물다. 당시인들에게 있어 황제의 명이란 전쟁을 치르듯 지엄한 일이었던 것이다. 객점에 이르기 직전 연암은 창대를 말에 태운다. 여러 날 굶주린 끝에 오한까지 들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수역의 마부도 크게 앓으므로 병든 두 마부를 각기 말에 싣고, 흰 담요를 꺼내어 창대의 온몸을 둘러싸고 띠로 꼭꼭 묶어서 수역의 마두더러 부축하여 먼저 가게 하고, 수역과 더불어 걸어서 객점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마침내(!) 열하에 도착한 것이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한마디로 파김치가 되어.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졸린 것보다 더 간절한 괴로움은 없었나 보다. “객점에 이르니 곧 밥상을 내왔다. 허나 심신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피로하여, 수저는 천 근이나 되는 듯, 혀는 백 근이나 되는 듯 움직이기조차 힘들다[至店卽進食 而身倦神疲 擧匙若千斤 運舌如百斤].” 수저가 천 근이고, 혀가 백 근이라? 나흘을 자지 못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배고픈 사람 눈에는 모든 게 먹을 것처럼 보이듯, 졸린 사람 눈에는 세상 모든 게 잠을 돋우는 것으로 보이는 법. “상에 가득한 나물이나 구이 요리가 모두 잠 아닌 것이 없을뿐더러, 촛불마저 아롱아롱 무지개처럼 뻗쳐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곤 한다[滿盤蔬炙 無非睡也 燭焰如虹 芒角四孛].” 눈이 가물가물 잦아드는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그렇다고 그냥 쓰러질 수야 없지. 연암은 이 와중에도 먼 길 나그네의 벗인 술 한잔을 잊지 않는다. “청심환 한 개로 소주와 바꾸어 마시니, 술맛이 기가 막히다. 마시자마자 곧 취하여 나도 모르게 스르르 베개 위로 곯아떨어졌다[於是以一淸心丸 易燒酒痛飮 酒味亦佳 飮輒醺 頹然抵枕矣].” 천신만고 끝에 오는 달콤한 잠, 그것에 견줄 수 있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

 

 

 

 

열하, 그 열광의 도가니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을 실은 수레들이 앞다투어 달려간다. 서장관과 고삐를 나라히 하여 가는데 깊은 계곡에서 갑자기 범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두세 번 들려온다. 그러자 동시에 모든 수레가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친다.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하다. 아아, 굉장하구나!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少歇三道梁 渡哈喇河 黃昏時 踰一大嶺 進貢萬車 爭道催趕 余與書狀倂轡而行 崖谷中忽有二三聲虎嘷 萬車停軸 共發吶喊 聲動天地 壯哉

 

 

연암으로 하여금 수도 없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게 했던 열하는 이렇게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그 위용을 드러냈다. 열하는 동북방의 요새답게 수레들이 달리는 소리, 범의 포효를 효과음으로 선사한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서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 그리고 다시 연경으로 이어지는 이 대장정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열하다. 열하는 느닷없이 끼어든 선이지만, 순식간에 키워드가 되어 전체 여행의 배치를 바꿔버렸다. 거듭 말하거니와, 열하가 없었다면 아니 더 정확히는 연암과 열하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이 여행은 아주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장성 밖 요해의 땅인 열하는 지세(地勢)상으로 보면 천하의 두뇌와 같아, 황제의 피서(避署)행은 애초에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 것[壓腦而坐, 扼蒙古之咽喉而已矣]”이었다. 그러다가 해마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이 날로 늘어 그 화려하고 웅장함이 연경보다 더하고, 그뿐 아니라 산수의 경치도 연경보다 빼어나 방탕한 놀이터로 발전되었다.

 

피서록(避暑錄)에 나오는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친히 쓴 기를 잠깐 음미해보면 다음과 같다.

 

 

금산은 줄기차게 뻗어 내리고 따뜻한 샘은 넌출져 흐른다. 구름 잠긴 동학(洞壑, 동굴과 계곡)은 깊디깊고 돌 쌓인 못에 푸른 아지랑이 둘렀다. 경계가 넓고 초목이 무성하니 밭집에도 해롭진 않으리. 바람이 맑아 여름철도 서늘하니 사람이 수양할 곳으로 적당하구나.

金山發脉 暖溜分泉 雲壑渟泓 石潭靑靄 境廣草肥 無傷田廬之害 風淸夏爽 宜人調養之方

 

날개가 찬란한 새들은 푸른 물 위에 노닐되 사람을 피하지 않고, 노는 사슴들은 석양볕을 띠고 떼를 이루었구나. 솔개는 공중에 날고 고기는 물에 뛰노니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름이요, 파란 빛과 붉은 기운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오르내리는구나

文禽戱綠水而不避 麋鹿映夕陽而成群 鳶飛魚躍 從天性之高下 遠色紫氛 開韶景之低仰

 

 

그 산천경개의 빼어남을 예찬하고 있다. 정치적 요충지인 데다 이렇게 풍광이 빼어나니, 황제들이 즐겨 찾을밖에. 또 황제가 있는 곳이 천하의 중심이 되는 법이니, 연암이 방문할 당시에 열하가 바로 천하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과연 그러했다. 그 지세의 우뚝함에 걸맞게 열하는 가히 열광의 도가니였다.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들끓고, 낯선 것들이 교차하는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 기이하고 괴상한 볼거리를 열하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이름을 알지 못했고, 문자로 능히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모두 빼고 기록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平生詭異之觀 無逾在熱河時 然多不識其名 文字之所不能形者 皆闕不錄 可恨也哉

 

 

연암이 열하에 당도했을 때는 바야흐로 8, 북방의 더운 기운이 오히려 찌는 듯하여 그는 흰 모시 홑적삼을 입었는데도 대낮이 되면 땀이 흐르곤 했다. 무리한 행군으로 인한 피로함과 체질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귀, , 마음을 모조리 열어놓고서 그 이질성의 세계를 낱낱이 기록한다.

 

813일은 건륭황제의 천추절이었는데, 황제는 특별히 조선 사신을 불러 행재소까지 와 뜰에 참여하여 하례(賀禮)를 올리도록 은전을 베푼다. 노고를 치하하느라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는 여러 면에서 조선 사신단에 대한 편애를 감추지 않는다. 연암이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황제의 직ㆍ간접적 배려에 힘입은 바 크다.

 

 

 피서산장과 열하

피서산장은 거대한 인공호수다. 호수 곳곳마다 근사한 누각과 정자가 세워져 있다. 배를 타고 1시간쯤 돌아야 전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뱃삯도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먼 발치에서 주욱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놀랍게도 호수 한귀퉁이에 열하가 있었다. ‘열하 속의 열하? 밑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열하란다. 그 물에 손을 씻으면 도박에서 큰 돈을 딴다는 전설이 있다길래 우리들은 모두 정성껏 손을 씻었다. 결과는? 아는 바 없다.

 

 

낯선 세계와의 만남

 

 

이때만 해도 그렇다. 황제의 70세 잔치인 천추절 당일날 황제가 있는 곳까지 부르는 바람에 엄청난 규모의 진공(進貢)행렬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연암이 보기에, 세계 곳곳에서 당도한 수레가 만 대는 될 듯하다. 사람은 지고, 약대는 신고, 가마에 태우고 가는데, 마치 형세가 풍우와 같았다. 거대한 바람이 움직이는 듯한 진공대열에서 연암의 눈을 사로잡은 건 억센 쇠사슬로 목을 맨 범과 표범, 그리고 길들인 사슴, 크기가 말만 하고 정강이는 학처럼 우뚝 선 악라사(鄂羅斯, 러시아의 옛이름) , 모양은 약대 같고 키가 서너댓 자나 되는데 하루 300리를 간다는 타계 등 기이한 금수(禽獸)들이었다.

 

반양(盤羊)이라는 동물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사슴의 몸에 가는 꼬리가 있으며, 두 뿔이 구부러졌고, 등에는 겹친 무늬가 있다. 밤이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자며, 떼지어 다니므로 티끌과 이슬이 서로 엉기어 뿔 위에 풀이 나기도 한다. 몽고에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가 다시 판첸라마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산해경혹은 걸리버 여행기에나 나옴직한 기이한 동물들은 그 뒤에도 자주 등장한다. 황제는 축하공연 중의 하나인 연극을 직접 관람할 기회도 주었는데, 그때 크기가 겨우 두 자에 몸빛은 황백색으로 갈기머리를 땅에 솔솔 끌면서 울고 뛰고 달리는 말을 보기도 한다. 또 행재소 문 밖에서 여관으로 돌아오다 보게 된 태평차(太平車)에서는 귀부인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은 원숭이를, 강바닥에선 비둘기보다 작고 메추리보다는 큰데, 사람의 말을 다 알아들어 갖은 재주를 부리는 납최조(蠟嘴鳥)라는 새를 목격하기도 한다.

 

코끼리 또한 연암에게는 진기한 동물 중 하나였다.

 

 

만일 진기하고 괴이하며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볼 요량이면 먼저 선무문 안으로 가서 상방(象房)을 구경하면 될 것이다. (중략)

將爲怪特譎詭恢奇鉅偉之觀, 先之宣武門內, 觀于象房可也. (中略)

 

소의 몸뚱이에 나귀의 꼬리, 낙타의 무릎에 호랑이의 발, 짧은 털, 회색 빛깔, 어진 모습, 슬픈 소리를 가졌다. 귀는 구름을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 같으며, 두 개의 어금니 크기는 두 아름이나 되고 키는 1장 남짓이나 되었다.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자벌레처럼 구부렸다 폈다 하며 굼벵이처럼 구부러지기도 한다. 코끝은 누에의 끝부분처럼 생겼는데 거기에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서 둘둘 말아 입에 집어넣는다. 상기(象記)

牛身驢尾, 駝膝虎蹄. 淺毛灰色, 仁形悲聲, 耳若垂雲, 眼如初月. 兩牙之大二圍, 其長丈餘, 鼻長於牙, 屈伸如蠖, 卷曲如蠐. 其端如蠶尾, 挾物如鑷, 卷而納之口.

 

 

지금 우리에게 코끼리는 낯익은 존재지만, 연암에게는 생김새 하나하나가 진기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크기와 생김새를 갖가지 동물에 비유하는 어조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상기(象記)라는 열하일기가 자랑하는 명문은 바로 코끼리에 대한 상상이다(그가 코끼리를 보고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5부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이렇듯 연암에게 열하는 가장 먼저 진기한 동물의 왕국으로 다가왔다.

 

물론 거기 몰려든 인간 군상들 역시 동물들 못지않게 기이하고, 다채로웠다. 그들에 대한 연암의 기록도 흥미롭다. 중앙아시아 근동의 회회교를 믿는 회회국(回回國)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며, 눈은 푸르고, 머리와 수염이 억세다고 적었다. 그런가 하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몽고왕에 대해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체 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무 보잘것이 없어 마치 장차 거꾸러지려는 썩은 나무등걸 같다고 했다. 그밖에도 아라사, 류큐, 위구르 등 청나라를 둘러싼 주변 이민족의 왕족들이 곳곳에서 출현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연암의 시선은 꽤나 복합적이다. 진지한가 하면 장난스럽고, 깔보는 듯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을 잊지 않는다. 연암의 두뇌로도 종잡기 어려울 만큼, 그들은 낯선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북구(古北口)를 지날 때는 진짜 괴상한 종족을 만나기도 한다. 그 종족은 대부분의 여인네가 목에 혹을 달고 있다. 큰 것은 거의 뒤웅박 정도의 사이즈인데, 더러는 서넛이 주렁주렁 달린 이도 있다. 말하자면,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옴직한 혹부리 종족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연암에겐 왜 저토록 큰 혹이 달렸는지, 또 어째서 여인네들한테만 혹이 있는지 신기하기 그지 없다.

 

물론 연암을 비롯한 조선 사행단에게 있어 가장 쇼킹한 것은 바로 서번, 즉 티베트와의 마주침이다. 이것은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가 아니라, 낯선 우주와의 충돌에 비유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그저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 이 여행기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연암이 그것과 접속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렇듯 열하는 천신만고를 보상해주기라도 하듯, 온갖 퍼레이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연암은 이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위구르족

열하로 가는 길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위구르족은 중국에 의해 탄압 받고 있는 소수민족 중의 하나고, 노새는 자동차의 홍수 속에서도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이동수단이다. 둘 다 이질적이고 소수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대단원

 

 

열하에서 보낸 시간은 모두 엿새였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연암의 심정은 못내 아쉽다.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하찮은 진사 하나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별안간 나라를 떠나서 만 리 밖 머나먼 변방에 와 엿새 동안을 노닐다 이제 다시 돌아가자니, 감회가 없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떠나고 머무는 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항이다. 국가간 외교사절단을 쫓아온 것이니만큼 공식일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열하는 정녕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거기다 황제의 특별한 배려까지 더해져 연암은 생애 가장 특이한 엿새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황제의 편애는 조선 사신단에 예기치 않은 불운을 안겨다준다. 바로 티베트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접견하도록 은혜(혹은 명령)를 베푼 것이다. 황제 쪽에서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준 것이나, 조선 사신단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유학자가 불교, 그것도 사교(邪敎)에 가까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베푼 영광을 거절한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변명이 거듭될수록 상황은 한층 악화되었다.

 

처음엔 은전이었던 것이 이제는 지엄한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접견을 마쳤으나, 조선 사신단의 불공함은 황제를 노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나라는 예()를 알건만 사신은 예를 모르네그려.” 따지고 보면, 황제 쪽에서도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스승으로 떠받드는 존재에게 한낱 변방의 국가 사절단이 오랑캐니 어쩌니 하면서 예를 표할 수 없다고 뻗대었으니.

 

황제가 그만 북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자 예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트러블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곧 떠날 것을 재촉한다. 분위기가 이렇듯 싸늘하니, 돌아오는 여정이 고달플 건 당연하다. 백하(白河)를 지날 때다.

 

 

이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근신의 보호와 전송은커녕 황제 또한 한마디 위로의 말씀도 없다. 사신들이 번승(판첸라마) 접견하기를 꺼려한 탓이다. 열하로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이토록이나 달랐다. 저 백하는 며칠 전에 건너던 물이고 모래 언덕은 지난번에 서 있던 곳이다.

今玆還京 旣無近臣之護送 皇帝亦無一語勞勉之諭 盖由使臣不肯見佛 而有此不承權輿之歎 察其氣色 來往頓異 彼白河向日所渡之水也 彼沙岸去時所立之地也

 

제독이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나 물 위에 떠 있는 배도 그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제독은 말 한마디 없고 통관 그저 머리를 숙이고 있다. 저 강산은 유구한데 세상 인심은 삽시간에 달라져버렸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提督手中之鞭 汎彼河上之船一也 然而提督無聲 通官垂頭 江山不殊 擧目有炎凉之異

 

 

바로 얼마 전 그곳을 지날 때는 군기가 나와서 우리를 맞이해주고 낭중은 강을 건너는 일을 감독하고 황문(黃門)은 길을 인도해주었다. 제독과 통관들이 친히 강가에서 채찍으로 지휘하여 그 기세가 산을 꺾고 강을 메울 만큼 당당했는데[軍機道迎 郞中護涉 黃門探程 提督通官氣勢堂堂 臨河擧鞭 有摧山塡河之形]”, 이제 돌아가는 길은 이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다. 서글픈 귀환! 갈 때는 일정이 빠듯하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아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여정이 느긋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북경에 돌아오니, 뒤에 남았던 역관과 비장, 하인들이 모두 길 왼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투어 손을 잡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한다. 기쁨의 상봉! 다만 내원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일행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찍 밥을 먹고 동문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길이 서로 어긋난 것이다. 창대가 장복이를 보더니, 그 사이 서로 떠났던 괴로움을 말하기 전에 대뜸, “너 별상금 얼마나 챙겼니[汝有別賞銀帶來]?” 한다. 장복 역시 안부를 나누기 전에 얼굴에 가득찬 웃음으로, “, 상금이 몇 냥이더냐[賞銀幾兩]?” 하니, 창대는, “천냥이야. 의당 너와 반분해야지[一千兩 當與爾中分].” 한다. 헤어질 땐 곧 죽을 듯이 울고불고 난리더니, 죽을 고비를 다 넘기고 다시 만나서는 고작 돈타령이라니. 과연 환상의 2인조답다! 이어지는 황제에 대한 농짓거리들, 거짓말 아닌 것이 없으나 장복이를 포함하여 제법 똑똑한 하인들도 창대의 에 다 속아넘어간다.

 

여러 역관이 연암의 방에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이 연암이 가져온 봇짐을 흘겨보곤 한다. 그 가운데에 먹을 것이나 없을까 하는 표정이다. 곧 창대를 시켜 보를 끌러서 속속들이 헤쳐 보게 했으나, 별다른 물건이 없고 다만 붓과 벼루가 있을 뿐이었다. 두툼하게 보인 것은 모두 필담과 난초(亂草, 갈겨 쓴 초고)로 된 메모 노트였던 것. 그제야 여러 사람이 모두 허탈하게 웃으며, “어쩐지 이상하더라. 갈 때엔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돌아올 젠 짐이 이렇게 부풀었잖아[吾果怪其去時無裝 歸槖甚大也].” 한다. 장복이는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창대더러 별상금말야, 어디다 두었어[別賞銀安在]”하며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페이드 아웃(fade out)’! 무협영화 뺨치는 대장정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라마교 사원

열하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 티베트식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 갑자기 노스님이 나타나셨다. 사진 실력 미달로 자비로운 미소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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