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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③: 병자호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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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③: 병자호란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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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세계의 막내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우선 16364월에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으로 바꿔 중원 정복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그래서 나중에 그의 묘호도 중국식의 태종太宗이 되니까 이때부터는 그를 청 태종이라 불러도 되겠다). 스케줄이 확실히 잡힌 만큼 후방을 다지는 일은 9년 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일단 그가 취한 조치는 외교의 형식이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그러나 그도 예상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 리 없다. 드디어 그 해 12월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략에 나서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전쟁의 양상은 9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불과 보름 만에 청군은 평양을 거쳐 개성 부근까지 내려왔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또 다시 도대체 뭘 믿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 가지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정부의 무능함을 익히 알고 있는 백성들이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샀다는 점이다.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백성들보다 더 잽싸게 짐을 꾸리는 한편, 지방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수도로 황급히 불러들였다. 강화도로 피난하는 동안 시간을 끌자는 전략이다. 그러나 왕실의 부녀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仁祖)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 45)와 함께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 한밤중에 급보가 전해졌다. 청군이 이미 홍제원(弘濟院)까지 들어왔으며,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서 강화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는 것이다홍제원은 말하자면 국립 호텔 격인데,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여기서 무악재만 넘으면 바로 영은문과 모화관이다. 위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홍제원은 주로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올 때 들러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곳이었다. 참고로, 서대문에서 홍제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금도 의주로(義州路)라고 부르는데,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도로가 멀리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의 의주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 도로는 정치ㆍ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가 의주로 도망칠 때도,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군이 남침할 때도 이 도로를 이용했으니까.

 

결국 인조(仁祖)와 조정 대신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방에서 오는 군대도 자연히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면서 이곳은 조선의 임시 수도가 되었는데, 일찍이 옛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이래 무려 1300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피난처였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1만 명 넘게 불어난 성의 수비대를 감안할 때 비축 식량으로는 두 달을 채 버틸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청 태종은 굳이 성을 공략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20만으로 늘어난 군대로 성을 포위한 채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선군을 경기도 일대에서 차단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산성 내의 임시정부에서는 뻔한 결론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항복하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는데도 항복과 항전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승산이 제로인데도 청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대부들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주의자인 최명길을 비롯해서 다수는 주화론의 입장이고, 이른바 청서파(淸西派,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들)의 보스인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 등 노장 세력은 주전론자다. 주화론을 취할 바에야 애초에 왜 전란의 빌미를 만들었을까? 또 주전론을 주장할 바에야 왜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까지 기어들어갔을까?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라면 전란이 있기 전에 진작 합의할 일이지 왜 이제 와서 그런 논쟁을 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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