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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 국가(State) 본문

어휘놀이터/개념어사전

개념어 사전 - 국가(State)

건방진방랑자 2021. 12. 17.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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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State

 

 

1917년 러시아 임시정부의 탄압을 피해 잠시 핀란드로 도피하고 있던 시기에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국가와 혁명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1963년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될 차비를 갖추던 시기에 박정희(朴正熙, 1917~1979)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을 썼다. 레닌이 말하는 국가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전 일시적으로 존재하게 될 프롤레타리아 국가이며, 박정희가 말하는 국가는 오랜 왕조 시대를 거쳐 공화국으로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다. 레닌이 말하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을 가리키며, 박정희가 말하는 혁명은 군부독재 체제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를 가리킨다. 제목은 비슷해도 두 사람의 책은 전혀 다르며, 같은 개념이라도 좌파인 레닌과 우파인 박정희가 그 개념에 실은 의미는 정반대다. 국가란 정의하기 나름인 것일까?

 

흔히 국가를 조국(祖國)이라고 표현하면서 민족과 거의 동일시하는 우리 사회의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인 풍토에서는 국가의 개념에 비하하는 의미를 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국가는 나라 자체라기보다는 통치 기구를 뜻하는 개념이다. 한나라는 지배체인 국가와 피지배체인 시민사회로 나뉜다.

 

 

처음으로 국가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플라톤(Platon, BC 427~347)이다. 그는 국가를 세 가지 집단이 완벽한 조화와 분업을 이룬 하나의 커다란 개인으로 보았다. 지배자는 지혜를 덕목으로 삼고 국정을 수행한다. 전사는 용기가 덕목이며 국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의 경제력을 담당하는 생산자는 절제를 덕목으로 한다. 이 세 집단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마지막 덕목인 정의가 구현된다. 플라톤은 이런 국가를 철학자가 다스리는 이상국가라고 믿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도 대동소이한 국가관을 가졌으나 결론은 반대였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으로 지배하는 국가를 모델로 삼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정치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으로 구분하고 그 가운데 공화정이 으뜸이라고 여겼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의 국가란 인구 1만 명이 넘지 않는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일찌감치 도시국가의 시대가 끝나고 영토국가의 개념과 중앙집권 체제가 자리 잡은 동양의 국가는 사뭇 다른 양상을 취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지속된 춘추전국시대에는 도시국가들이 발달했으나, 진 시황제(秦 始皇帝, BC 259~210)가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2천여년 동안 제국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 따르면 군주정을 취한 왕국에 해당하겠지만,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국가이므로 개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동양의 국가에서는 국토와 국민보다 사직(社稷)이 가장 중요했다. 사직은 원래 농경을 관장하는 신이었으나 점차 왕조의 조상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설사 외적이 침략해서 국토와 국민을 유린한다 해도 사직을 보존하면 국가는 유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 북쪽의 거란(契丹)이 침략했을 때 고려의 현종이 남쪽의 나주까지 도망친 일이나 16세기에 일본이 남쪽에서 침략했을 때 조선의 선조가 북쪽의 의주까지 도망친 일은 그래서 정당화된다. 공화국 시대인 20세기에까지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 그 수치스러운 전철을 밟은 것은 이해와 용납이 불가능한 일이지만그럼에도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받들자는 황당한 발상이 지금도 있다.

 

 

서양의 왕조에 비해 동양의 왕조가 훨씬 오래 존속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같은 왕국이라도 서양의 국가는 일찍부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고 국토와 국민을 우선시했다. 왕조의 혈통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사가 끊기거나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을 경우에는 쉽게 왕조가 교체되었다. 중세에 접어들면 정치와 종교가 더욱 확연히 분리되어, 신성의 영역을 교회가 관장하고 세속의 영역을 국가가 지배하는 분권 체제가 성립되었다.

 

중세가 해체되면서 교회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세속군주들이 힘을 얻음에 따라 유럽에는 군주가 절대 권력을 가지는 절대주의 시대가 개막된다. 17세기 초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왕의 권력을 신이 부여한다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장했는데, 만약 그가 중국이나 한반도 군주들의 권력을 알았더라면 몹시 부러워했을 법하다. 동양의 군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절대 권력을 지녔고, 심지어 중국의 황제는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로 군림했으니까.

 

 

정치적 절대주의와 경제적 중상주의가 각각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바뀌자 국가의 의미는 크게 달라졌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국가의 역할이 개인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있다고 보았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주권이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 즉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적 질서가 해체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유럽의 국가들은 저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루고 부국강병을 도모했다. 그 양상은 일단 전쟁으로 드러났으나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조약으로 전쟁의 결과를 정리했는데, 이 관습이 점차 국제 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는 대외적으로는 국제 질서의 주체로 활동했고 대내적으로는 국부(國富)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법치국가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변하고 전 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완료되자 국가는 새로운 임무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이제 성장의 엔진이 멈출 지경에 처한 자본주의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국가 유형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국가 개념은 원래 레닌이 밝혔듯이, 다수에 대한 소수의 독재(부르주아 독재)를 소수에 대한 다수의 독재(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바꾸고, 일정 기간이 지나 자본주의적 착취의 흔적이 제거되고 나면 계급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소련은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욱더 사회의 모든 부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경제의 효율성을 잃고 관료제의 병폐에 시달리던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은 20세기 말에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국가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계급 지배의 도구로 파악한 레닌과, 긍정적인 관점에서 사회 발전의 수단으로 간주한 박정희는 둘 다 자신의 국가관을 현실에서 완전히 정당화하지 못했다. 극좌와 극우가 실패했다면, 새는 역시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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