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북벌론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이 온통 오랑캐에 대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무렵, 그들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오히려 오랑캐 나라의 심장부에 머물면서 오랑캐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오랑캐를 통해 멀리 서양의 문물까지 열심히 익히려 한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대부 신분이 아니었기에 고리타분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이면 그가 누군지는 명확해진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청나라의 선양(瀋陽)【랴오둥 한복판에 자리잡은 선양은 누르하치 시대에 청나라의 수도였다.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면서 수도는 베이징으로 옮겼으나 그 뒤에도 동북 지역의 주도로 기능했으며, 현재도 랴오닝성의 성도(省都)다. 선양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심양이 되는데, 심양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바로 몽골 지배기 고려의 심양왕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심양왕은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 왕조에게 만주의 관할권이 귀속된 기회이기도 했으나 고려 정부는 그 기회를 스스로 팽개쳤다.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생활한 소현세자는 한 번쯤 그때의 아쉬운 역사를 회상해보지 않았을까?】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다.
아버지와 함께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 앞에서 항복의 예를 올리던 때만 해도 그는 조선의 어느 사대부보다도 치욕에 온몸을 떨던 젊은이였다. 그러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과 함께 8년 여를 청나라에서 지내면서 그는 그동안 자신을 포함하여 조선의 지배층이 얼마나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1644년 청군이 베이징에 입성할 때는 그도 직접 따라가서 두 달 동안 머물기도 했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의 선교사인 아담 샬(Adam Schall)과 만나 서양의 각종 과학 서적들과 지구의, 망원경 등의 문물, 그리스도교의 경전과 그리스도상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중에서 아마 그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지구의가 아니었을까? 공처럼 둥근 지구의 모습과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 게다가 거대한 바다와 광활한 신대륙을 보면서 아마 그는 중화세계만이 문명 세계라는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여지없이 부서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진 한복판에서 보인 세자의 행동은 본국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그들이 볼 때 그것은 좋게 말해서 방종이고 나쁘게 말하면 추태다. 당연히 그들은 인조(仁祖)에게 부지런히 상소를 올려 세자를 단속하라는 압력을 가한다. 그들은 세자가 적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적국에서 지나치게 많은 경비를 쓰고 있다는 비난까지 퍼붓는다. 하지만 오히려 소현세자는 열심히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한편 청나라 황족 및 장군들과 시귀면서 두 나라의 외교를 도맡아 청이 무리한 요구를 하려 할 때면 현지에서 무마시키고 차단하는 성과도 올렸으니 사대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인조(仁祖)는 사대부들의 편이다. 그 자신이 국치의 주인공이기도 한 데다가 처음부터 반정을 통해 즉위한 왕이었으니, 생리적으로 그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반정의 선배인 중종中宗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벌써 몇 차례나 궁궐과 백성들을 버리고 사대부들과 함께 전란을 피해 도망쳐본 경험이 있는지라 사대부들과는 끈끈한 공범의식(?)과 유대감도 있다. 그런 그에게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를 사실상의 왕으로 간주한다는 소문조차 아들의 능력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들린다. 여러 가지로 못난 왕이다. 게다가 청나라에 아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밀정까지 보냈으니 못난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소현세자가 1645년 2월 오랜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국내의 반응이 어땠을지는 뻔하다. 사대부들의 부추김을 받은 인조(仁祖)는 아들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들이 가져온 서양 문물에 대해서는 더욱 강렬한 혐오를 보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각오는 했지만 너무나도 차디찬 아버지의 냉대에 못 이겨 소현세자가 귀국 후 2개월 만에 병석에 눕게 되자 사대부(士大夫)들은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바로 세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세자는 학질에 걸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앓아 누운 지 나흘 만에, 그것도 처참하게 피부가 썩은 상태로 죽었다면 그가 과연 진짜 병사했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의 잔인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과부가 된 세자빈 강씨에게까지 뻗친다. 인조가 그것까지 내버려둔 이유는 아마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꺼린 탓일 게다. 게다가 여기에는 그가 총애하는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이 강빈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단단히 한몫을 했다. 평소에도 세자 부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모함했던 그녀는 인조가 먹을 음식에 강빈이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를 꾸민다. 결국 이듬해 강빈은 사약을 받았고 비운의 부부가 남긴 어린 세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역시 사약을 받고 부모 뒤를 따랐다(막내는 너무 어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한 가족사로서는 슬픈 이야기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당시 조선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도한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이겠으나 인조(仁祖) 역시 알면서도 묵인한 듯하다. 이렇게 왕위계승자가 음모로 살해될 정도라면 조선은 분명히 왕국이 아니라 사대부 국가다. 소현세자의 정치적 잘못이라면 그런 조선의 정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아마 그는 선양에 머물 때 장차 귀국해서 조선에 선진 문물을 적극 도입할 꿈을 꾸었을 테지만, 조선은 국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일가가 몰살됨으로써 세자 자리는 자연히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어갔다. 형과 함께 선양에서 8년 동안 생활하며 국내와의 마찰이 있을 때마다 형을 거들던 그였지만 인물됨은 아마 형과 달랐던 듯하다. 하기야, 설사 그가 형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살벌한 조정의 분위기에서는 마음을 바꿔먹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아예 형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애초에 왕위계승과는 인연이 없다가 예기치 않게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 실록이 되었어야 할 일기 선양에 머물던 시절 소현세자의 행적을 담은 『심양일기(瀋陽日記)』다. 세자가 즉위했더라면 당연히 나중에 실록을 편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세자는 사대부(士大夫)들의 모함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못난 아버지로 인해 그동안 배운 선진 문물과 새로운 세계관으로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1649년 인조(仁祖)가 죽자 봉림대군은 효종(孝宗, 1619~59, 재위 1649~59)으로 즉위했다. 서인 정권으로서는 2대째 연이어 국왕을 옹립한 셈이다. 인조도 반정으로 즉위했다는 약점 때문에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그는 형이 죽음으로써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형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의식도 있었으니 여러 가지로 왕권을 내세울 수 없는 처지다. 사대부들은 그런 효종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소현세자를 살해한 음모보다 더 크고 더 황당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북벌(北伐)이다.
북벌이라면 청나라를 친다는 계획이 아닌가? 그런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복속된 조선으로서 감히 생각할 수 있는 구상일까? 물론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청나라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내의 반대 세력, 즉 친청파(親淸派)를 제거해야 한다.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오래 지속되면서 서인들도 두 파로 갈렸다(파를 갈라 다투는 건 조선 사대부들의 전매특허다). 인조(仁祖)의 치세에는 반정에 직접 가담한 이른바 공서파(功西派)가 주류였고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가 비주류였다. 두 차례의 전란에서 주화론자가 다수였던 탓으로 자연히 공서파는 친청파가 되고 청서파는 반청파로 편제된다. 1647년에 최명길이 죽으면서 공서파이자 친청파의 단독 보스에 오른 자는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었다【그는 바로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과 세 아들을 제거하는 음모의 총지휘자였다. 그런 그가 친청파를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수준’을 읽을 수 있다. 소현세자야말로 청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을 발전시키려 했던 ‘친청파’가 아닌가? 하지만 불행히도 김자점의 친청파는 그와 크게 다르다. 그들은 오로지 청나라와 결탁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게 목적이었으니, 정치 철학이나 이념 같은 게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비록 편협한 성리학적 세계관이나마 나름대로 학문적인 자세에서 논구하려 했던 당쟁 초기, 100년 전의 사대부(士大夫)들에 비해 크게 퇴보한 모습이다】.
병조판서로 병권을 장악한 데다 손자를 인조의 소생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떨치던 김자점, 그러나 그는 인조가 죽은 뒤 곧바로 청서파의 송준길(宋浚吉, 1606~72)로부터 탄핵을 받아 실각한다. 사실 공서파는 반정으로 집권한 이상 인조의 사후에는 권력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운명이었으나, 그래도 그로서는 권좌에서 물러난 게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가 매달릴 것은 오로지 청나라뿐, 그래서 그는 청서파가 북벌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알려 권토중래를 꿈꾼다. 예상한 대로 청나라는 군대와 사신을 보내면서 신속한 반응을 보였지만 청서파의 대응은 더 신속했다. 효종(孝宗)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자 김자점은 곧바로 반역자가 되어 버린다. 그가 처형당함으로써 조정은 청서파와 반청파의 독무대가 되었다(불행히도 전란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던 말만의 역모가 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단독 콘서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인물은 바로 송시열(宋時烈, 1607~89)이다(송준길은 그의 친척인데, 둘은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게 된다). 그는 청서파에게서 명망이 높았을 뿐 아니라 봉림대군이 왕위와 무관하던 시절인 1635년에 그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니만큼 효종(孝宗)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그가 중용된 것은 당연하다【인조(仁祖) 때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재야에서 직접 인물을 추천받아 관직에 등용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흔히 산림(山林)이라 부른다. 송시열과 그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 1548~31), 김집(金集, 1574~1656) 부자가 그런 케이스다. 이들이 청서파의 주력으로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산림이 등용되었다는 것은 곧 그만큼 반정공신 세력이 약했다는 뜻인데, 이 점이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차이이기도 하다. 사대부(士大夫)들의 공분을 자아냈던 연산군(燕山君)에 비해 광해군(光海君)은 그와 같은 부류의 폭군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이제 송시열(宋時烈)이 이끄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아무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북벌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북벌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다. 그러나 그렇듯 거창하게 드라이브를 건 북벌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다. 주요 사업이라 할 만한 것은 남한산성의 방어를 강화하고, 어영청의 군사를 세 배로 늘리고, 중앙군의 대부분을 기병화한 정도였다. 북벌론자들은 아마 수도를 가급적 오래 방어하고 정부가 남한산성에 피난했을 때 가급적 오래 버티는 걸 북벌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나마 북벌에 어울리는 사업이라면 북도에 성들을 새로 쌓고 농민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백성과 지방 수령들에게 반발을 사서 역효과를 빚는다(게다가 그것 역시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엄밀히 말해 북벌 준비라 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결국 효종(孝宗)이 재위 10년 만인 1659년에 죽으면서 북벌은 흐지부지 되고 만다. 그 이념부터 소아병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것이었으니 출발부터 예고된 결과였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체 이미 사라진 중화세계를 되살리려 한다는 게 올바른 일일까? 적어도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하지만 북벌을 추진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성과를 얻는다. 역시 잃어버린 중화세계를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새 중화세계를 건설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들은 허망한 북벌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조선을 중화세계로 만드는 작업으로 선회하게 된다. 성리학의 소아병은 이제 집단적 정신병으로 발전했다. 조선의 병은 마침내 정점에 이르렀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벨테브레, 훈련도감, 하멜) (0) | 2021.06.21 |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소중화의 시작(현종, 기해예송, 갑인예송, 실학) (0) | 2021.06.20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시대착오의 정신병(소중화) (0) | 2021.06.20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정묘호란, 병자호란) (0) | 2021.06.20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수구의 대가(이괄)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