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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

건방진방랑자 2022. 7. 1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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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李起浡)

 

 

자기 묘사

 

이 장에서는 송경운전에서 가장 정채를 띠는 한 단락을 검토하며 작가 이기발의 내면을 따라가 보고, 그에게 송경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사람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해당 단락은 본디 송경운전의 서사에서 가장 앞 부분에 배치된 것으로, 10년간의 서울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점의 작가가, 만년의 송경운과 마주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본격적 시작이 되는 해당 장면의 도 입부를 다음과 같은 자기묘사로 출발한다.

 

 

무심자(無心子)는 말한다. 나는 해진 베옷을 입고 여윈 말을 타고 노복(奴僕)도 없이 혼자 전주성 서쪽을 따라 얼음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無心子曰: 余嘗以弊布衣, 乘羸馬, 無蒼頭而獨傍完城西, 登冰峙.(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일반적인 전이 입전인물의 인적사항 및 일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위 인용문은 좀 이례적인바 그 서술의도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기발이 스스로를 칭한 무심자는 그의 호 중 하나다. 그의 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서귀자’(西歸子)인데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중화의식이 투영된 이 말에 대한 지향을 유년기부터 지니고 있었거니와 병자호란(1636)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서귀를 자호로 삼아 평생의 뜻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음을 이기발은 여러 차례 술회한 바 있다.

 

이에 비해 무심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사용한 호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귀유고(西歸遺稿) 수록작 가운데 무심자로 자칭한 글은 송경운전을 포함해 모두 4편인데, 그 중 하나인 참봉 원가원을 보내며(送元參奉可遠)는 죽은 아우의 벗 원근(元近)1641년 경기전 참봉으로 부임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써 준 글이고원근이 경기전참봉으로 임명된 데 대해서는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가 16391220일에 사재참봉으로, 1645425일에 서부참봉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경기전참봉으로 재직한 시기가 1641년 이후 1645년 이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나머지 둘인 감사 목성선의 <형제 상회도> 뒤에 희제하다(戱題睦監司性善兄弟相會圖後)양사룡전(梁四龍傳)은 작품 안에 을유년(1645)으로 창작시기가 밝혀져 있는바 모두 1645년 및 그 가까운 시점에 쓴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송경운전의 창작시기 역시 그 즈음이 아닌가 추정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이 점은 앞서 송경운의 몰년을 1640년대 후반으로 비정한 것과 대략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거나, 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를 표상하는 말로서 무심은 이기발의 생애 가운데 1640년대 중, 후반의 시간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는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심해지길 희구했던 것일까?

 

이기발은 해진 베옷을 입고 경마잡이도 없이 혼자서 여윈 말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다. 이 자기 묘사에서는 사회 경제적 몰락의 징후가 느껴진다. 벼슬 없고 종도 없는 사대부의 외양으로 스스로를 그려 넣은 데서, 무심에의 희구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가누려는 것과 관련되지는 않았나 추측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가 있는 장소는 完城西’, 즉 전주 도성의 서쪽이다. 이기발의 생애 이력을 떠올려 본다면 이 인물과 배경의 조합은 금의환향과 반대되는 어떤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 「도판4이기발의 집이 있던 황방산 기슭에서 도성 서문까지는 약 7km 떨어져 있다. 그가 지나던 얼음고개란 다가산 근처 용머리고개가 아닌가 한다.

 

 

시조와 이기발

 

이기발은 전주 사람이다. 전주부의 서쪽 외곽지역인 황방산 기슭에서 나고 자란 그는 24세가 되던 1625년에 상경하여 그로부터 대략 10년간 서울에서 학업과 벼슬살이를 해나갔다. 그러다 병자호란(1636) 이후로는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고 돌아와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에서 남은 생을 오롯이 보냈다. 몰락한 모습으로 고향의 북적이는 도성에 다가가는 중년 남성 이기발의 내면은 썩 유쾌하기 어려울 듯하며 그의 초라한 행색은 이런 마음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여기서는 처사의 삶을 선택한 뒤 황방산의 집과 전주 도성 사이를 오가는 이기발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귀유고2에 수록된 해당 작품의 제목은 저녁에 돌아오다[暮歸]이다: “朝傍東城行 아침에 동쪽 성곽 곁에 갔다가 / 暮向西山歸 저녁에 서산(황방산: 인용자) 향해 돌아오 네. / 東城多甲第 동쪽 성곽에는 큰 저택 많아 / 歌吹隨風飛 풍악소리 바람따라 날아오네. / 豪奢豈終極 호사스러움 어찌 끝이 있으리 / 酒盈兼魚肥 가득한 술에 살진 생선. / 西山最寂寞 서산은 가장 적막하여 / 孤店長林依 외로운 주막이 긴 숲에 의지해 있네. / 妻子恒飢色 처자식은 언제나 굶주린 기색 / 有年啼饉饑 몇 년을 배고파 울었지. / 如何捨都市 어째서 도시를 버리고 / 必須竆翠微 기필코 산중턱에 몸을 두냐고. / 性忄辟 異世人 별난 성격 세상 사람들과 달라 / 丘山甘采薇 산에서 고사리 캐길 달게 여기지. / 向來十數年 근래 십수 년 동안 / 紅塵未拂衣 붉은 티끌을 옷에서 떨지 못했네. / 孤踪竟何爲 외로운 자취 끝내 무엇을 하려는가 / 七尺身空頎 칠 척의 몸이 헛되이 헌걸차네. / 不可徒衣食 일 없이 입고 먹을 수 없는데 / 君民計已非 군민의 계책은 이미 글렀네. / 一朝卷而懷 일조에 경륜 거두어 간직하니 / 胡馬蹐郊圻 호마가 도성 밖을 걷누나. / 籊籊理竹竿쭉쭉 벋은 대나무 낚싯대 다듬어 / 重上舊苔磯 이끼 낀 옛 물가에 다시 올랐네. / 興亡與得失 흥망과 득실은 / 一夢同依俙 한바탕 꿈과 같이 희미하구나. / 涇渭未容混 경수와 위수는 섞일 수 없고 / 不曾嫌謗誹 일찍이 비방도 괘념치 않았네. / 愛敬致家伯 우리 형님께 사랑과 존경 다하고 / 溫凊勤庭闈 우리 어머니 부지런히 잘 모셔야지. / 此外復何望 이 밖에 또 무얼 바라랴 / 谷蘭生芳菲 골짜기의 난초에서 향내가 나네. / 暮歸豈不好 저녁에 돌아오니 이 얼마나 좋으냐 / 稺子候荊扉 어린 자식이 사립문에서 기다리니.” 이기발의 문집에는 이 시와 같은 자기서사적(自己敍事的) 술회시가 많은 편인데 이에 관해서는 별고를 준비 중이다.. 자신이 발 디딘 얼음 고개라는 지명 역시 그의 스산한 내면과 닿아 있다한편 전주 도성의 서쪽이라면 송경운의 전주 집이 있던 곳과 겹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이기발이 오르던 氷峙얼음고개는 전주 부서면(府西面) 빙고리(氷庫里)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지금의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에 해당하는 빙고리는 다가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 전주천에서 채 취한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가 있었던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이기발이 오르는 얼음 고개에서 전주성 서문 및 그 근처 송경운의 집이 있었을 동네까지는 고작 1km일 뿐이다. 요컨대 그가 지나가는 이 지점은 송경운과 마주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대목은 그런 분위기를 갑작스레 전환하며, 뜻하지 않게 송경운과 마주친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는지 그려낸다.

 

 

그때는 봄이고 삼월 상순(上旬)이라 복사꽃과 자두꽃이 온 성안에 가득 피어 있었다. 저 멀리 어떤 장부(丈夫) 한 사람이 보였다. 대지팡이를 등에 지고 짤막한 베옷을 입은 그는 마음껏 노래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살쩍과 머리칼은 눈처럼 희었다.

時則春三月上旬, 桃李滿城中. 遙見一丈夫, 負竹杖着短褐, 放歌而徐行, 其鬢髮白如雪.(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이기발이 눈 들어본 전주 도성의 풍경은 온통 봄이다. 만발한 분홍 복사 꽃과 하얀 자두꽃 사이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허름한 입성과 상관없이 봄날과 잘 어울리는 그 노인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정결한 백발과 흐드러진 노랫소리 덕분이다.

 

 

그의 노래를 들어보니 이러했다.

江湖有期約, 十年奔走 강호에 기약 두고 십년을 분주하니

不知之白鷗, 謂我遲來 그 모르는 백구는 더디 온다 하건마는

聖恩最至重, 擬報而來 성은이 지중(至重)하시니 갚고 갈까 하노라.”

聽其歌曰: “江湖有期約, 十年奔走, 不知之白鷗, 謂我遲來. 聖恩最至重, 擬報而來.”(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또렷하게 다가온 노래는 시조다. 강호에 대한 지향과 성은의 지중함에 따른 책임감을 함께 강조함으로써, 물러남과 나아감의 조화를 추구한 사대부의 보편적 정서를 드러낸 이 시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구(鄭逑, 15431620)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김진영 외, 한국시조감상, 보고사, 2012. 174~175.. 강호에 돌아갈 기약을 두고도 사대부의 책무를 등지지 못해 10년을 분주했다고 노래 한 정구처럼, 이기발 역시 20대 중반부터 10년을 중앙 관료로 치열하게 살 았었다. 지금은 고향에 돌아와 포의(布衣)의 처사(處士)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대부로서의 강한 책임감을 잊지 못한 이기발에게, 이 노래는 바로 자신에게 건네는 목소리로 육박했다. 노인의 얼굴보다 그가 부르는 시조의 노랫말이 먼저 식별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말미에서 세상에 가곡이 몹시 많은데 유독 강호곡(江湖曲)을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생각건대 그의 늙은 눈으로도 멀리서 무심자를 알아보고 군신(君臣)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넌지시 충고한 것이리라[世之歌曲最多, 特唱江湖曲何歟? 意者老眼能遠記無心子, 而諷之以不可忘君臣之義者歟!]”이 구절을 통해 이기발이 해당 시 조의 장르를 가곡으로, 그 제목을 강호곡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서술태도는 가창되는 국문시가에 대한 그의 식견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하여 원래 알던 이 노래를 귀담아 들었으며, 결국 이 시조가 강호로 돌아온 자신에게 사대부의 책무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조는 한역(漢譯)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江湖’, ‘期約’, ‘十年’, ‘奔走’, ‘白鷗’, ‘聖恩’, ‘至重등 원래의 노랫말에 사용된 어휘를 가급 적 그대로 쓰고 있는 것에서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으며, 아울러 초장, 중장, 종장이 저마다 5자와 4자가 더해진 형식으로 규칙성을 추구한 것을 통해 번역자의 전문성을 엿볼 수 있다. 기실 이기발이 시조를 한역한 것이 이번 한 번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무신(武臣) 이덕일(李德一, 1561~1622)의 시조 우국가(憂國歌) 28장을 모두 한역하여 전하도록 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덕일의 문집 칠실유고(漆室遺稿)에 수록된 우국가에는 西歸居士李起渤이름이 李起渤로 표기되어 있으나 과 동의자이고 서귀거사라는 호가 일치하므로 동일인으로 간주한다. 이기발의 이름자가 李起渤로 표기된 예가 이외에도 간혹 있다.飜辭및 번역 취지를 표명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이기발은 이덕일의 노래에 나타난 깊은 슬픔이 시대에 아파하는 굴원의 강직한 진심을 연상시키는바 곡조를 찾아 읽어가노라면 저도 모르게 감발되어 지극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으며, 이에 초사체(楚辭體)를 본떠 구말(句末)를 붙여 한역했다고 그 글에서 밝혔다盖聞長歌之哀甚於慟哭, 歌闋之數多至二十有八則, 公之哀亦甚矣. 余觀其歌也, 鬱悒慷慨, 有屈太夫傷時耿介之忱, 尋其調閱其章, 不覺令人感發嗟惜之至耳. 于以效楚辭, 係之以些.”(이덕일, 칠실유고1 憂國歌二十八章) 이기발의 이 글은 學文을 후리티오 反武으로 시작되는 우국가1수 앞 제하(題下)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이래 국문시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한역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시조의 한역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시기 동안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고되었다조해숙, 시조 한역의 사적 전개양상과 그 시조사적 의미, 한국시가연구15, 2004. 189~227.. 정구(1543~1620)가 지은 시조를 그보다 약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전문 악사가 17세기 중엽에 가창하며 향유한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노래에 공감한 이기발(1602~1662)이 능숙하게 한역한 결과가 담긴 이 장면은 시조 한역이 보편화되는 시기를 조금 올려 잡을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이 장면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다수의 시조를 접하고 한역한 작가로서 이기발을 학계에 알릴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퍽 이상한 두 사람의 만남

 

이상과 같이 이기발이 시조를 즐겨 듣고 사대부의 내면을 담은 그 메시지에 공감하는 적극적인 향유자이자 그 노랫말을 한문으로 정확하게 옮길 역량을 지닌 번역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송경운의 본격적 등장에 앞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서사 모두(冒頭)에서 송경운과 전주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재현하며, 자신의 존재감 역시 강하게 스며들도록 공을 들였다.

 

 

내가 탄 말 바로 앞에 다가와 그제야 자세히 보았더니, 바로 장안의 옛 악사 송경운이었다. 무심자는 예전에 그와 인연이 있었기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지팡이를 짚은 건 늙어서일 테고, 짤막한 베옷을 걸친 건 가난해서일 테고, 그냥 걸어가는 건 말이 없어서일 텐데, 그렇게 마음껏 노래하는 건 어째서인가?”

경운은 이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 이제 나이가 일흔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소인은 예전에 음악을 좋아 했지요. 그러니 소인은 늙은 악사입니다. 노래란 음악 중에 으뜸가는 것이지 요. 늙은 악사로서 봄날의 흥에 겨워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게 이상하신지요?

及至馬頭, 乃熟視之, 長安舊樂師宋慶雲也. 無心子嘗有分, 笑而語曰: “竹杖老也, 短褐貧也, 不騎無馬也, 至於放歌, 何也?” 慶雲乃揚眉而對曰: “小人時年七十有餘, 而小人嘗好樂, 則小人乃老樂師也. 而歌乃樂之宗, 以老樂師, 乘春乘興而歌, 夫子惟是之異乎?”(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앞서 이 절에서 검토하고 있는 단락이 송경운전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작품의 본격적 도입부가 된다고 언급했었다. 그 중 자세히 보았더니 장안의 옛 악사 송경운이었다라는 첫 구절은 작품에서 입전인물의 이름과 신분을 최초로 언급한 대목으로, 작가가 예전에 서울에서 보았던 한 악사와 오랜만에 해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기발이 서울에 머문 것이 1625년부터 대략 10년간이고, 송경운이 전주에 온 것이 1627년이므로 두 사람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던 것은 햇수로 3년에 불과하다. 이런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2장에서 수군절도사 이담(李憺)이 매개가 되었으리라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인맥은 시간이 흐른 지금 희미해져 버렸다. 송경운은 일찍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바 이담은 더 이상 그의 주인이 아니었고, 이기발은 아우 이생발이 1629년 서울에서 병사한 이래 사돈 이담과 멀어졌을 터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인연에는 인맥을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었다. 이기발이 송경운을 알아보자마자 웃으며 말을 건넨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웃음은 다소 착잡하다. ‘가난하여 말도 못 타고 걸어가는 노인네가 무엇이 좋다고 노래를 불러제끼는가?’라는 속물연(俗物然)하는 질문 이면에는, ‘나는 당신이 가난하지도 늙지도 않았을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빈곤하고 노쇠한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고 하는 서글픔이 개입해 있다. 그의 마음은 백거이(白居易)비파행(琵琶行)이나 두보(杜甫)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에서처럼 뜻밖의 장소에서 해후한 늙은 음악가에게서 인생의 무상함과 비애를 발견한 시인(詩人)의 상황과 맥이 닿는다. 하물며 그 자신도 해진 베옷에 여윈 말로 혼자 가는 신세임에랴.

 

그러나 늙은 악사 송경운은 떠돌이로 영락한 비파 연주자나 지는 꽃 같은 옛 명창 이구년처럼 처량하지 않다. 그는 짐짓 위악을 가장한 이기발의 질문에도 그늘 한 점 없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삶을 긍정할 따름이다. 송경운의 대답에는 이기발이 걱정한 가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임을 밝혔다. 노인이 되었어도 악사라는 고유한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취지다.

 

더 나아가, 완숙의 경지에 이른 늙은 악사로서 송경운은 음악의 본령 하나를 무심히 건드린다. ‘노래는 음악의 으뜸’[歌乃樂之宗]이라는 그의 명제는, 송경운의 다른 음악론인 음악에서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樂以悅人爲主]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평이하면서도 음악의 본질에 닿고 있어 깊은 울림을 준다. 음악을 성악(聲樂)과 기악(器樂)으로 나눌 때 노래는 성악에 해당한다.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며 말을 필요로 하는 성악 이 음악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송경운의 말은 음악과 함께 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이 말은, 기악인 비파 연주로 거장(巨匠)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것을 훌쩍 넘어 음악 전체를 투시하는 통찰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음악가로서 도달한 정신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봄이다. ‘봄날이 나를 노래하게 한다는 송경운의 말에는 노년의 음악가가 보여줄 법한 삶에 대한 무한한 예찬이 담겨 있어 인상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송경운이 서울에 그대로 머물렀어도 이 같은 행복한 결말에 이르렀을까. 아마도 그러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려한 잔치 자리를 떠도는 삶은 그에게 부와 인기를 가져다줄 수는 있었을지언정 홀로 봄날의 산길을 걸으며 노래할 여유는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이에 송경운의 전주 이주는 타인의 시선에서 빛나 보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를 따른 적절한 선택으로 심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어지는 송경운의 말은, 자신이 보았던 이기발의 서울 시절을 떠올린 것이다.

 

 

소인이 알기로 선생님은 옛날에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인데, 수놓은 비단옷을 해진 베옷으로 바꿔 입고 멋진 청총마(靑驄馬) 대신 여윈 말을 타고 설랑 그 많던 뒤따르던 종들은 어찌하시고 노복 하나도 없이 서울의 큰길 대 신 산길을 가고 계시는지요? 어째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계십니까? 소인 은 선생님이 유독 이상해 보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 즐겁게 노닐며 한나절을 보냈던 것이다.

小人知夫子舊日近侍, 換綉衣以弊布, 替驄以羸, 易多騶以無蒼頭, 代紫陌以山蹊, 何自苦如此? 小人惟夫子是異!” 遂相與遊戲半日.(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송경운은 전주 사람들이 보지 못한 이기발의 과거를 목격했었다. 이기발이 역임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은 둘 다 대간(臺諫)에 속하는 벼슬로 백관을 규찰하고 시정(時政)을 논하여 국왕에게 간언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삼는다近侍之臣이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로 승지나 사관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기발은 1633년 정언에, 1635년 지평에 제수되어 1636년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승정원일기 16331125, 이기발을 정언으로 삼다; 16341112, 이기발을 정언으로 삼다; 1635116, 이기발을 지평으로 삼다) 지평을 포함한 대관(臺官)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가 막중했으며,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이기발 역시 그런 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기발 은 36세 되던 1637819일에 북청 판관에 부임하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더 이상 조정에 나타나기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실록에서는 이런 이기발에 대해 정축년(1637) 이후로는 마침내 나와 벼슬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점에서 1636년의 병자호란이 이기발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이라는 언급이 정확히 그 점을 가리킨다. 당시 이기발의 외양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던가. 그는 수놓은 비단 관복을 입고 청총마를 타고 여러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울의 대로를 누비는 잘 나가는 중앙관료였다. 이기발이 송경운의 늙고 가난한 모습 뒤로 화려한 시절을 보는 것처럼, 송경운도 이기발의 쓸쓸한 현재 너머, 세상을 바꾸겠다는 패기에 넘치던 신진 관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송경운은 이기발의 현재를 고생을 사서 하는 것’[自苦]이라 표현했고, 만약 지금의 삶을 선택한 자신이 이상하다면 이기발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농담을 건넨다. 이 말은 과거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둘의 현재가 닮았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현재에 이르게 된 동기나 경로, 두 사람이 지닌 삶의 지 향 역시 비슷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즉 두 사람은 저마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를 따르는 삶을 택했다. 이런 선택을 긍정한 송경운의 이야기와 그 선택의 결과로서 그의 모습은, 자신의 현재에 가끔 낙담하고 본래의 품은 뜻에 회의를 갖기도 했을 낙향한 전직 중앙관료에게 이해와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며 그 역시 삶의 길을 제대로 선택한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속인(俗人)이 보기에는 퍽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이상한사람은 서로 닮은 것을 알게 되어 퍽 유쾌했다. 그래서 봄꽃이 한창인 전주성 서문 근처에서 즐겁게 노닐며 한나절을 보냈다.

 

 

▲ 「도판5」 「전주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일부. 왼쪽에 표시된 서문 근처에서 송경운과 이기발이 만났을 터이다. 봄꽃이 만발한 전주 도성을 그린 이 지도는 두 사람의 만남과 퍽 잘 어울린다.

 

 

인용

목차 / 원문

1. 송경운전(宋慶雲傳),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李起浡)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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