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앞서 송경운의 생애를 개략하며 밝힌 것처럼, 송경운의 삶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변화했다. 그 이전의 삶이 부유한 상류층에게 각광 받는 비파 연주자로서 화려한 명성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은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곁에 언제나 머물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악사 송경운의 후반생은 음악의 본질 깊숙한 곳에 나아간바, 한층 높고 빛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악가로서의 성숙은 정묘호란 이후 송경운의 거주 공간이 달라진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본절에서는 악사 송경운을 성장하게 한 공간의 면모를 그의 생애와 결부시켜 구체적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1) 서울에서 흘러간 반생
① 宋慶雲乃京城人也. 송경운은 서울 사람이다.
송경운의 인적사항과 관련하여 가장 명확한 지점은 ‘京城人’ 즉 서울 사람이라는 언급이다. 송경운이 73년의 생애 가운데 50년을 보낸 곳이 바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서울이라는 데 대한 추론이 이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기발은 서울의 악사 송경운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두 계열의 선행연구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원문을 먼저 분석한 후 적절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②-1 繡棟瓊筵, 是其居也; 腰金頂玉, 是其伴也; 花髻雲鬟, 是其左右也. 逢逢之鼓, 鏘鏘之筦, 是其所以贊威儀者也. 如河之酒, 如山之肴, 千束之綾, 萬貫之錢, 是其供具也.
②-2 孰家之食, 誰人之衣, 度日是也, 度月是也, 以之度年是也, 以之度半生亦是也.
②-1의 화제는 악사 송경운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다. 호화로운 고급주택에서 이루어지는 화려한 연회자리, 금인을 차고 옥관자를 단 고위관료들, 풍성한 머리채에 꽃장식을 한 아름다운 기녀들, 장구와 피리의 떠들썩한 소리가 먼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나열되었다.
그런데 이 모두는 송경운의 주변에 잦은 빈도로 나타나긴 하지만 항구적으로 그를 구성하는 것은 못 된다. 잔치자리는 그의 집이 아니고 고위관료나 기녀들도 그의 가족이나 벗이 아니다. 이 모두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며 그는 환대를 받고 있으나 이 자리의 객(客)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취지는 뒤의 “如河之酒, 如山之肴” 이하에 대한 해석과 내면적으로 이어지는데, 해당 구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계열의 번역을 찾아볼 수 있다. ‘강 같은 술이며 산 같은 안주, 일천 속(束)의 비단과 일만 관(貫)의 돈’이 과연 누구에게 주어졌는가의 문제로 견해가 갈리는데, 최초의 연구에서는 이 막대한 재화를 연회에 지출된 비용으로 본 반면, 최근의 번역본 2종에서는 그것을 악사 송경운에게 지급된 사례비로 본 것이다.
②-1을 관찰하면 “是其居也” 이하로 ‘是其○○也’라는 문형이 모두 5번 반복되고, 그중 앞의 4번에 해당하는 ‘是其’의 ‘其’가 모두 송경운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5번째 ‘是其’의 ‘其’ 역시 송경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도 같으며, 후자의 번역본에서도 이런 연유에서 그와 같은 해석에 도달한 듯하다. 그에 따르자면 이 구절에서는 송경운이 막대한 출연료를 받았음이 강조된다.
그러나 앞서 파악한 맥락에 따르자면 이 단락에서 제시된 화려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든 것들은 송경운을 스쳐 지나가는 외물(外物)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여기 언급된 막대한 재화는 출연료라는 명목으로 송경운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연회에 쓰인 비용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게다가 5번째 구절의 서술어인 ‘供具’는 특정 개인에게 바쳐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절에서 올리는 재와 같은 큰 행사의 비용에 더 어울리는 말로서, 초기 연구의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맥락을 이렇게 파악한다면 이 단락은 고관대작의 고급주택에 열린 화려한 연회를 표상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술과 안주가 차려지고, 송경운을 위시한 악사들과 기녀들을 소집해 흥을 돋우는 데 막대한 비단과【여기서 ‘일천 속(束)의 비단’은 ‘전두’(纏頭)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전두’란 광대나 기생, 악공 등 예인(藝人)에게 사례의 뜻으로 주는 금품을 뜻하는 데, 원래 공연이 끝난 뒤 비단을 내려 주어 머리에 묶도록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돈이 소비되는 사치스러운 잔치인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송경운은 이 자리의 객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들은 그의 소유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몹시 화려하고 흥성스럽지만 덧없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런 부질없음의 기색은 이어지는 ②-2의 “孰家之食, 誰人之衣”[누구의 집에서도 밥을 먹고 누구의 집에서도 옷을 얻어 입었다]라는 구절에서 짙어진다. 송경운이 서울 어디서든 의식을 제공받을 정도로 환대의 대상이었음을 알려주는 이 구절은 박지원(朴趾源)의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 온 서울 사람들의 신뢰를 샀으나 집도 절도 없었던 거지 노총각 광문이 ‘한양 8만 호가 다 내 집인데 평생 채 다 들를 수도 없다’[漢陽戶八萬爾, 吾逐日而易其處, 不能盡吾之年壽矣]고 너스레를 떨 때와 비슷하게 쓸쓸하다. 송경운에게도 한 곳에서 옷과 밥을 지어 주는 아내가 없었던 듯하다.
이처럼 대중의 환대를 받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서울의 빛나는 중심부를 전전하는 송경운의 반생이 주는 부질없음의 느낌은 “度日是也, 度月是也, 以之度年是也, 以之度半生亦是也”에 보이는 ‘度’의 반복에서 더욱 강화된다. ‘悠悠度日’ 등의 관용어구에 사용되는 이 동사는 보통 아주 보람 있게 살 때에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송경운의 화려한 서울 생활이 내포한 공허함이랄까 수동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이런 해석에 따라 해당 단락에 대한 번 역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아로새긴 대들보 아래 화려한 잔치 자리가 그의 거처였다. 금인(金印)과 옥 관자를 한 고위관료가 그의 동반자였다. 꽃 장식을 하고 구름 같이 풍성하게 머리를 올린 기녀들이 그의 좌우에 있었다. 둥둥 울리는 장구와 삘릴리 하는 피리가 그 위의를 도왔으며 강물 같은 술에 산과 같은 안주, 일천 속(束)의 비단과 일만 관(貫)의 돈이 그 잔치의 비용으로 쓰였다. 누구의 집에서도 그에게 밥을 주었고 누구든지 그에게 옷을 주었다.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고 한 달이 이렇게 지나갔다. 한 해가 이렇게 지나갔거니와, 반평생 역시 이렇게 지나간 것이다.
繡棟瓊筵, 是其居也; 腰金頂玉, 是其伴也; 花髻雲鬟, 是其左右也. 逢逢之鼓, 鏘鏘之筦, 是其所以贊威儀者也. 如河之酒, 如山之肴, 千束之綾, 萬貫之錢, 是其供具也. 孰家之食, 誰人之衣. 度日是也, 度月是也, 以之度年是也, 以之度半生亦是也. (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권7)
요컨대 이 단락은 송경운이 속한 공간으로서 서울의 잔치 자리를 묘사하는 데 집중되었다. 송경운을 둘러싼 공간은 화려하게 빛나지만 그 구성원은 죄다 익명의 존재로서 구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송경운의 곁에 늘 머물지도 않는데, 이는 기실 송경운이 그런 잔치 자리들을 전전하며 스스로 정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고 말들이 서로 발굽을 밟으며 서로 밀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곳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곤 했다.
“송 악사 어딨나?”
“아무 궁가(宮家)에서 불러갔다지.” “송 악사 어딨나?”
“아무개 상공(相公)이 불러갔다는군.”
그가 이미 한 군데에 불려가 버리고 나면 남은 자리가 쓸쓸해져 즐거워하는 이가 드물었다. 온 도성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人磨肩馬疊足, 至於不可排, 而曰: “宋樂師何在?” “某宮家邀之.” 已曰: “宋樂師何在?” “某相公邀之.” 已見邀於一, 則落莫而鮮其歡者, 滿城皆是.
우선 위 인용문 중의 “人磨肩馬疊足, 至於不可排”하는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뉘고 있어 계속 주의를 요한다. 최초의 선행연구에서는 그곳을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규모의 연회 자리’로 보았고, 최근의 번역본 2종에서는 ‘송경운의 집 앞’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해당 단락의 주지가 약간 달라지는데, 전자의 경우 송경운이 빠진 연회에서 사람들이 느낀 섭섭함을, 후자의 경우 송경운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그의 부재에 느낀 실망감을 향하게 된다.
물론 온 서울 사람들이 그의 비파 연주를 사랑하지만 늘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 정도로 송경운의 인기가 높았다고 보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두 견해 모두 수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의 단락에서 송경운이 부귀가의 잔치 자리를 전전하는 수동적이고 부질없는 삶을 살았던 것, 그래서 집을 소유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의식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서울살이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것과 연관 지어 본다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 장소는 역시 대규모 연회 자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
송경운이 서울 도성 안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풍요로운 곳에 주로 머물렀다는 점은 앞서 언급한 ‘繡棟瓊筵’에 잘 드러난다. 호화로운 고급주택에서 열린 화려한 연회를 뜻하는 이 말은, 위 인용문에 보이는 ‘某宮家’와 ‘某相公’이라는 익명의 최상위계층에 대한 지칭과 조응하며 송경운이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속해 있었음을 처음부터 알려준다.
요컨대 이상의 단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서 이루어졌 던 익명의 호화로운 연회 장소로 점철되어 있다. 그 가운데 송경운은 왕족과 최상층 관료들을 주된 고객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했고 그들의 연회를 빛내는 가장 귀한 장식으로 존재했다. 다시 말해 송경운은 이 추상적인 공간을 뿌리 뽑힌 화초와 같이 떠돌며 반생을 보냈다.
2) 전주에 뿌리박은 여생
50대에 접어든 송경운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전주로 이주했다. 이로써 ‘서울 도성 안’이라고 지칭될 수 있지만 그 익명성과 한시성(限時性)으로 인해 어디라고 적시하기 어려운 오랜 거주지를 벗어나게 된 송경운의 후반생은, 상당한 공간적 구체성을 얻게 된다. 이기발은 처음 송경운이 전주로 흘러들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는 정묘년(1627)의 난리 때 전주성 서쪽으로 흘러들어와 집을 빌려 거처했다. 집과 마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이내 화초를 가꾸는 데 마음을 두어 사람들에게 널리 구하였다. 그러자 친한 사람, 잘 모르는 사람, 멀리 사는 이, 가까이 사는 이 할 것 없이 모두, 아무리 희귀하고 특별한 화초라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저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치지도 않고 가져다주었으니, 천만 가지 화초가 빠짐없이 그의 뜰에 갖춰지게 되었다. 게다가 괴석(怪石)을 많이 가져다가 화초 사이에 두기도 했다. 경운은 꽃이 활짝 핀 아침이나 달빛이 좋은 저녁이면 언제나 비파를 안고 꽃길을 거닐었다. 그 우아한 정취는 조그만 화단과 잘 어울렸고 맑은 운치는 향기로운 꽃들 사이로 흘러내렸다.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을 도시 한복판에 옮겨다 놓은 것과 같았고, 시끌시끌한 곳임에도 속세에 찌든 생각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경운은 언제나 스스로 이렇게 즐겁게 지냈다.
丁卯之亂, 流寓於完山城西, 僦屋而居. 灑掃庭宇, 乃復留心於花卉, 旁求之人, 無親疎遠邇, 皆不惜其奇與異也, 各以其有致之不勞, 而千名萬彙, 無不畢具於一庭之內. 又多取怪石, 間置花卉間. 慶雲每以濃花之朝, 好月之夕, 抱琵琶逍遙於花卉之逕, 雅趣適於小壇之上, 淸韻落於衆芳之中, 仙區移於都市之境, 麈念絶於諠囂之域, 慶雲以此常自娛. (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권7)
‘객지에서 임시로 살다’라는 뜻의 ‘류우’(流寓)와 ‘전세 등으로 세 들어 사는 것’을 뜻하는 ‘추옥’(僦屋)은 송경운이 전주에 온 것이 우연적이었고, 그가 애초부터 정착할 의도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 「도판1」 전주성. 왼쪽 가운데 ‘패서문(沛西門)’이라 적힌 곳이 그 서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그가 자신의 셋집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전망을 보여준다. 송경운은 자기 집을 청소하고 정원을 가꾸는 데 정성을 기울인다. 그 는 정원에 심을 화초를 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주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이내 그들의 친절을 경험했다. 여기에는 이기발이 묘사한 바 송경운의 인간적 매력도 작용했겠지만【이기발은 “체구가 훤칠하게 컸고, 풍채가 좋고 피부가 희었으며, 가느스름한 눈은 별처럼 빛나는 데다, 수염이 아름답고 담소를 잘 했으니, 말하자면 참으로 호 남자였다”[身頎而長, 貌豐而白, 眼細而明如星, 美鬚髥善談笑, 眞所謂好男子也]라 하여 송경운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좋은 인상을 공들여 묘사했다.】 위 인용문에 더 부각된 것은 외지인인 송경운에게 다가간 전주 사람들의 환대하는 태도다. 송경운의 이웃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낯선 중년 남성에게 저마다 가진 희귀한 화초들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송경운은 아마도 생애 최초로 집다운 집을 얻게 되었고 자신과 잘 어울리는 뜰을 갖게 되었다. 이웃들의 친절과 스스로의 정성으로 가꾼 정원에 꽃이 피고 달이 뜰 때 비파를 연주하는 송경운의 모습은, 예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천상의 아름다움과 지복(至福)을 현현하는 장면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이 모습이 아마도 예술가로서 그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을 터인데, 전주에 오자마자 얻은 셋집이 곧장 이런 선물을 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그는 스스로 화초를 심어 가꾼 이곳을 자신의 뿌리 내릴 장소로 삼을 것이었다.
▲ 「도판2」 전주성 서문 근방의 다가동.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다가산과 이어져 있으며 남부시장과도 멀지 않다. 도시 한복판의 시끌시끌한 곳이다.
화제를 약간 전환하여 송경운이 여생을 뿌리내리게 될 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해 조금 더 구 체적으로 접근해보도록 하겠다. ‘전주성 서쪽’에 있었다고 소개된 이 집은 도성의 서쪽 구역, 즉 서문(西門)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지만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의 구지(舊址)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송경운의 집은 그 서문 근처이면서도 도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도시 한복판에 신선세계를 옮겨 놓은 것 같고’, ‘시끌시끌한 곳임에도 속세 생각을 끊게 했다’는 말이 참조되는데, ‘도시’라든가 ‘시끌시끌한 곳’이라는 표현이 도성 안과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정원이 아름다운 송경운의 집은 아마도 전주 도성 안이자 서문 부근인 지금의 다가동 어름에 마련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연주를 듣고자 누군가 찾아오면 그저 고마워서 하던 일을 황급히 내려 놓고 “소인같이 하찮은 것을 귀하께서 좋게 보아주시는 이유는 소인의 손에 있습지요. 소인 어찌 감히 손을 더디 놀릴 수 있겠으며 소인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小人賤品也, 而多見以貴下者, 其功在小人手中, 小人豈敢遲下手乎? 小人豈敢不盡心乎?(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권7)]라며 신분고하와 상관없이 누구든 평등히 환대하고 진심을 다해 비파를 연주하던 곳도 바로 전주성 서문 근방의 그 집이었을 터이다. 또한 그렇게 찾아오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비범한 음악가로서의 내적 고민을 이기발에게 토로하며, 그래도 ‘음악에서 중요한 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자신의 음악론을 표명하고, 홀로 추구하는 예스러운 곡조와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조를 조화시켜 이상과 현실을 화해시키는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곳【이와 같은 송경운의 음악론에 대해서는 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360~363면 참조.】 역시 이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송경운이 임종하며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긴 곳도 그 집이었던 듯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다음과 같다【이 단락에는 결자(缺字)로 인 해 해석이 소연하지 않은 곳이 있다. 최초의 선행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싣지 않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는 유언을 남긴다. 쓸쓸히 타향에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음악을 직업으로 하였으니 장례시에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자기의 혼을 즐겁게 하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라 하여 송경운의 유언 내용을 요약한바, 본고에서는 이 해석을 계승했다. 한편 최근의 번역본에서는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내가 죽거든 나를 아무 산 양지쪽에 묻어다오. 그리고 도리로 보아 너희들은 다 내가 업으로 한 악기를 가지고 와서 나의 혼령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혹시라도 시속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 제자들이 그의 유언대로 새벽달 아래 서천을 건너 상여는 아무 산 남쪽으로 갔다. 뭇 비파에서 나는 상엿소리와 어울렸다”라고 했는데, ‘나를 보낼 때 음악을 연주해 달라’고 했던 유언의 초점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을 우려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해당 부분에 대한 번역을 다시 해보았다. 인용문의 밑줄 친 부분에 의문이 있어 필자의 해석에 따라 수정한 결과가 아래에 제시된 번역이다.】.
평소에 아픈 적이 별로 없었는데 갑자기 기궐(氣厥)을 앓아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임종 무렵 제자들을 모두 불러 이렇게 말했다.
“불행히도 나는 자식이 없다. 내가 죽으면 (내용 결락) 나는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으로, 자식도 없이 고향도 아닌 곳에서 죽게 되었으니, 어찌 쓸쓸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내가 죽으면 나를 아무 산의 양지에다 묻어주되 그 가는 길에 너희들이 모두 나의 업인 음악을 연주하여 나의 정신을 즐겁게 해 다오. 혹시라도 해괴한 풍속이라 여기지 말고. (내용 결락)”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나이가 일흔 셋이었다. 제자들은 그의 말대로 했으니, 새벽달 아래 서천(西川)을 건너 상여 행렬이 산 남쪽을 향할 때 여럿이 연주하는 비파 소리가 상엿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것이었다. 성안 가득 나와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生平小疾病, 猝患氣厥不能起. 將死盡招其弟子, 言曰: “不幸我無子. 我死 缺 我流人也, 無子而死於流, 豈不草草乎? 且我業樂也, 我死埋我於某山之陽, 其在道也, 若屬皆執吾業, 以娛我神. 毋或以駭俗 缺 .” 言訖而逝. 時年七十有三. 弟子如其言, 以曉月涉西川, 輿行指山南, 衆琵琶聲, 雜於薤歌. 滿城觀者, 莫不涕泣曰: “世安得更見如夫人者?”(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권7)
송경운은 자식도 없이 타향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된 데 대해 약간의 회한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에는 삶에 대한 긍정이 훨씬 더 도드라져 보이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음악의 힘이다. 그는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는 자기정의를 내리며 자신의 마지막 길에 제자들이 “나의 업인 음악을 연주하여 나의 정신을 즐겁게 해” 주길 부탁했다. 살아 있는 동안 음악과 함께였기에 행복했다고 홀로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 이후까지 음악이 함께 할 것을 기원하는 담담한 이 말은, 송경운이 온 존재를 담아 음악에 바치는 사랑 고백으로 들린다. 그는 죽음 앞에 음악을 연주하는 낯선 행동에 대해 제자들이 상례(喪禮)에 어그러진 것이라【이와 유사한 행동을 한 이로는 아내가 죽었을 때 ‘고분이가’(鼓盆而歌: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름)한 장자(莊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 구절은 작품 말미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비파를 합주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보내도록 한 것을 보면 그는 역시 마음에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고 속박을 훌쩍 벗어 던진 뜻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使弟子共彈琵琶以送終, 其亦有自得於心, 而脫落不拘檢之志者歟!]라는 논평과 조응한다. 즉 상례(喪禮)에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한 것은 장자의 ‘고분이가’와 마찬가지로 예속(禮俗)에 어긋나지만 초탈한 행동으로서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여길까봐 걱정하는 말을 덧붙여 자신의 소망을 한 번 더 확고히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송경운의 유언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자신이 떠나는 길에 음악을 연주 해달라’는 것이라 하겠다.
제자들은 송경운의 진심을 이해했기에 그의 상여가 집을 떠날 때 비파 합주로 그를 배웅하여 유언을 이루어 주었다. 새벽달이 뜬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나와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전주 도성 사람들 역시 음악으로 진심을 다한 송경운의 생애를 십분 이해하고 그 특별함에 대해 공감하고 찬탄했던 것이다.
그런데 송경운이 이승을 떠나는 길을 묘사한 이 장면을 보면 그가 전주성 서문 쪽의 그 셋집을 임종 때까지 떠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 단서가 되는 지명이 바로 ‘서천’(西川)이다.
전주 사람들에게 ‘서천’은 다가산 기슭을 흐르는 전주천을 가리키는 말이다【완주군 상관면 슬치 북동쪽 산자락에서 발원한 전주천은 반곡천과 남고천을 받아들이며 전주교와 매곡교 밑을 지나서 서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오른쪽으로 꺾어져 다가산 기슭을 돌아 진로를 북서쪽으로 바꾸게 된다. 홍성덕 외 역, 『국역 전주부사』, 전주시 전주부사번역편찬위원회, 2014. 165면.】. 여러 차례 개건된 결과로서의 서천교가 현재 남아 있기도 한데【서천교는 본디 흙다리였기에 홍수 때마다 유실되었으며, 순조 33년(1833) 석교로 개건되어 1936년 대홍수 때까지 존속되었다. 홍성덕 외 역, 위의 책. 534면.】, 이 장소는 전주 서문 부근에서 멀지 않다. 그러므로 앞서 다가동 어름으로 비정했던 송경운의 집을 출발하여 산 남쪽의 장지로 향한다고 할 때 서천을 건너도록 동선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결국 송경운은 20년간 뿌리박은 전주 도성 서쪽의 동네를 영영 떠날 때 이 서천을 건넜을 터이며, 제자들이 비파를 합주하여 그를 배웅하고, 온 전주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물짓던 장소도 바로 이 서천교 부근으로 비정하기에 무리가 없다.
애초에 이기발이 “정묘년 난리 때 전주로 흘러와 성 서쪽에 집을 빌려 거 처했다”고 송경운의 이주를 언급했을 때, 이는 결과적으로 송경운의 전주살이 전체에 고스란히 해당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장소, 즉 전주 도성의 서문 근방으로 전주천의 서쪽 개울인 서천이 휘돌고 성문을 나서면 다가산으로 이어지는 이곳이, 전주에 내려온 서울의 악사 송경운의 후반생과 음악을 상상하고 결부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도판3」 다가산 기슭을 흐르는 서천(西川). 송경운의 상여가 서천을 건널 때 제자들이 비파를 연주했고 전주 사람들이 나와 배웅했다.
1. 「송경운전」(宋慶雲傳),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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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1. 「송경운전」,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0) | 2022.07.12 |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 - Ⅴ. 맺음말 (0) | 2022.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