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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라 -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하라 -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건방진방랑자 2022. 7. 1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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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발(李起浡)의 송경운전(宋慶雲傳)17세기 전주 재현

역사지리를 접목한 한문수업의 모색

 

김하라(전주대)

 

 

국문초록

 

 

송경운전(宋慶雲傳)17세기의 비파 연주자 송경운(宋慶雲)을 입전한 한문 산문으로, 한국의 문학사와 음악사에서 공히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그 작가인 이기발(李起浡, 1602~1662)은 송경운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바탕으로 이 빼어난 음악가의 생애를 재현했다. 이기발은 전주에서 나고 자란 사대부 문인으로, 20대 중반이던 1625년부터 10년 남짓 서울에 거주하며 공부와 벼슬살이를 했고 1636병자호란 이후로는 모든 관력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한편 송경운은 1580년대 중, 후반의 서울에서 이담(李憺, 1567~1644)으로 추정되는 종친(宗親)의 노비로 태어났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면천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50대 중반까지 악사로 활동하며 서울과 그 인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으나 정묘호란(1627)을 계기로 전주에 이주하여 향년 73세로 타계할 때까지 20년 남짓의 여생을 보냈다. 본고에서 이와 같이 송경운의 생애를 추정하게 된 데는 이기발의 아우 이생발(李生浡)이 수군절도사 이담의 사위였던 점이 단서가 됐다.

 

이 인연에 더해 서울에 있는 동안 송경운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기발은, 전주로 낙향한 후 송경운을 다시 만나 이 악사의 마지막 10년을 같은 공간에서 가깝게 지켜봤다. 송경운전은 이처럼 입전인물과 작가가 시공(時空)을 함께 한 경험의 결과로서, 작가가 입전대상을 만나 대화를 나눈 기억을 장면 재현의 방식으로 생생하게 제시한 예가 많다. 그 중 구체적으로 거론된 전주의 지명을 통해 송경운의 거주지를 전주성 서문 안쪽의 다가동 어름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전주에서 보낸 송경운의 여생이 담고 있는 다채로운 내러티브를 다가산과 용머리고개, 서천(西川) 등의 현전하는 장소에 고스란히 결부시킬 수 있다. 이러한 성과는 송경운전을 생동감 있는 한문수업의 자료로 삼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17세기 전주의 역사지리를 재구하는 데에도 일정한 참조가 되리라 기대된다.

 

핵심어 : 송경운전(宋慶雲傳), 송경운(宋慶雲), 이기발(李起浡), 전주성(全州城), 악사(樂師)

 

 

 

1. 송경운전(宋慶雲傳),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송경운전17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훌륭한 비파 연주자 송경운의 생애를 다룬 전()이다. 조선후기에 창작된 예술가의 전기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파악되는 이 한문산문은, 문학성이 대단히 높을 뿐 아니라 그 내용에 함축된 예술사적 문제의식의 깊이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이 작품은 조선후기의 예인전(藝人傳) 중 기념비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352~367..

 

이와 같은 한문학계의 소개에 힘입어, 송경운은 한국 음악사를 풍요롭게 하며 17세기를 대표하는 비파 연주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노동은, 한국음악과 장인문화(한국학연구8,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6. 232~233)에서는 정묘호란 직후 노비출신으로 비파에 관한 한 신기에 가까운 장인이었던 악공 송경운은 장악원 악사에 이르지만 전주에 피신하고 장악원 복귀를 거부한 대표적 사례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송지원, 한국음악의 거장들(태학사, 2012. 133~138)에서는 “(송경운의-인용자)서울에서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예속적인 것이었다면 전주에서의 삶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그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음악사에서의 송경운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박희병 교수의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송경운전은 한국 전근대의 문학사와 음악사에서 공히 주목할 만한 소중한 문헌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예술가 전기로서 송경운전이 갖는 문학사적, 예술사적 의미는 어느 정도 밝혀진 듯하다. 또한 한 편의 빼어난 서사작품으로서 송경운전한문서사의 영토등 선집에 번역수록되어임형택 편역, 한문서사의 영토1, 태학사, 2012. 268~277. 최근 간행된 안세현 편역, , 불후로 남다(한국고전번역원, 2018)에도 송경운전의 번역이 수록되었다. 독자 대중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접하며 송경운전이 특히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한국 고전문학이나 한문학을 전공으로 삼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기에 적절한 텍스트라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그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음악가라는 소재는 자연스럽게 학제 간 접근을 가능하게 하여 어려운 한문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줄 수 있다. 작품에 언급된 비파 연주라든가 시조창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을 국립국악원에서 제공하고 있어 이용이 어렵지 않다.

둘째, 한 이상적 음악가의 삶을 정성스럽게 재현한 서사 자체가 갖는 힘이다. 이는 오롯이 전주 사람으로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입전인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충실한 인터뷰어 이기발(起浡, 1602~1662)의 역량에 따른 것이다.

 

본고는 위에 제시한 근거 중 후자의 면에 착안하여 시도되었다. 기실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명이 이루어진 것 같지 않은데, 송경운전의 작가인 이기발에 대해서는 물론한편 김형술,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국문학연구39, 2019. 183~214)이 최근에 제출되었는데 이는 이기발의 다른 전 작품인 양사룡전에 대한 분석으로 본고의 논의에 참조가 된다., 해당 작품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문헌 분석도 아직 진행된 적이 없는 듯하다. 예컨대 근래에 제출된 송경운전의 번역본에 나타난 해석은 이 작품에 대한 최초의 연구인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에 제시된 번역 및 작품 분석과 약간 다르지만,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을 찾아볼 수 없어 의문을 자아낸다. 만약 송경운전을 수업 자료로 삼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의 차이를 미리 해결해 둘 필요가 있게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의 성과를 계승하되, 송경운전의 작가가 이기발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 텍스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즉 작가 이 기발의 생애 및 그의 문집 서귀유고에 수록된 그의 다른 작품들과 조응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송경운전에 대한 심화된 이해에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반생을 전주에서 보내며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아름답게 완성한 송경운의 삶에 시공간적 구체성이 더해지고, 아울러 전주 사람으로서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고 이웃의 모습을 정성껏 기록했던 작가 이기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이기발은 송경운을 악사’(樂師)라 불렀다. 송경운전을 다룬 최초의 업적인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에서 박희병 교수는 이 호칭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악사의 의미를 악인(樂人)에 대한 범칭이 아니라 장악원에 속한 체아직(遞兒職, 조선시대에 설치된 특수관직)으로서 송경운의 직함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이 점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송경운이 정묘년(丁卯年, 1627) 이후 전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실 과 맞물리며 그가 장악원의 신역(身役)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삶을 구가하게 됐다는 의미부여로 이어졌다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356~359.. ‘정묘라는 간지가 1627년의 정묘호란과 그에 따른 구체적 상황을 환기하게 하는 단서로 작용한바, 자유로운 예술혼을 발휘하는 근대지향적 예술가로서 송경운의 초상은 조선후기 음악사에서 또렷한 전형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한문산문에서 연조(年條)를 나타내는 간지 표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특히 노비 신분으로 태어나 족보나 사서와 같은 공식 기록에 등재되기 어려웠던 송경운과 같은 하층민의 경우, 그런 사항을 섬실(纖悉)하게 밝혀 두는 서술자의 태도가 그의 생애를 재구하는 데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이 장에서는 역시 정묘라는 간지를 단서로 삼되, 그로써 송경운 개인의 생애 이력에 근접하고자 한다. 17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비파 연주자라는 것 외에 송경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드문데예컨대 송경운이 장악원에 소속된 악공이었으리라고 추정된 바 있지만, 역사적 정황 외의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송방송, 조선후기 장악원 관련 인물 열전(한국음악사학보 42, 한국음악사학회, 2009. 217~290)선조 이래 대한제국기까지 장악원과 관련된 인명이 수습되어 있으나 여기서도 송경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작업을 통해 그의 생몰연대라든가 인적 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려는 것이다. ‘정묘라는 간지를 포함하여, 송경운전중에서 그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들을 추출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舊爲李節度蒼頭, () 特去蒼頭籍, 遂得爲軍功司果. 예전에 이 절도의 노비였는데 특별히 노비 장부에서 벗어났고 마침내 군공으로 사과(司果) 벼슬을 얻었다.

年九歲, 學琵琶, 不勞而能, 造至極之地, 十二三, 名聞中外. 아홉 살에 비파를 배웠는데 애쓰지 않고도 잘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열두어 살에 서울과 그 근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丁卯之亂, 流寓於完山城西. 정묘년의 난리 때 전주성 서쪽으로 흘러와 우거했다.

如是者至二十餘年不懈, 以是得完山人懽心. 이렇게 (연주하기를-인용자) 20여 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아 전주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다.

言訖而逝. 時年七十有三. 유언을 마치고 서거했으니 당시 나이가 일흔셋이었다.

 

 

위에 제시된 사항 가운데 에서 송경운은 1627정묘호란 때 전주성 서쪽으로 이주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어지는 에 따르자면 그가 전주에 머무르며 보낸 여생은 20여 년이다. 또한 그의 향년이 73세라는 점이 에 적시되어 있는바, 를 아울러 참조하면 전주로 이주했던 1627년 송경운의 나이는 약 50세로 추산된다. 따라서 그는 1580년대 중, 후반에 태어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의 내용을 살펴보면, 송경운은 9살에 비파에 입문하여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2, 13세에 서울과 그 인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송경운의 청소년기에 속하는 이 시기는 1590년대 중, 후반으로 임진왜란 시기와 겹친다.

 

한편 에서는 송경운의 원래 신분이 노비였다는 점과,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면천(免賤)하여 무인(武人)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이기발은 송경운이 이씨 성을 가진 절도사(節度使)의 노비였는데 나중에 군공(軍功)을 세워 사과(司果)라는 정6품 무관직을 얻었다고 그의 신분 변화에 대해 적었다. 이 내용은 그의 청소년기가 임진왜란 시기에 걸쳐 있다는 정황과 연관되면서 송경운의 생애에 모종의 구체성을 더하게 된다.

 

주지하듯 임진왜란은 조선후기 신분제 동요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다. 전란 초기에 관군이 붕괴된 상황을 직면한 정부에서는 공사천(公私賤)이 군공을 세우면 면천의 혜택을 주는 동시에 군역에 편입시키고 천민 대상의 무과(武科)를 설치하여 군액(軍額)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전란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군공 논상(論賞) 규정이 완화 및 하향 조정된 결과, 군공을 세운 천인들은 면천은 물론 관직의 기회까지 얻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중의 군공 면천(軍功免賤)은 전례 없는 대규모의 것으로서 천인들의 신분상승에 주요한 관문이 되었다이홍두, 군공논상(軍功論賞)을 통한 조선조 천인의 신분변동, 동국사학29, 동국역사문화연구소, 1995. 7~51.. 이런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노비에서 출발하여 무관직에 이른 송경운의 신분상승은 역사적 전형성을 갖는다. 즉 송경운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신분의 질곡에서 벗어난 수많은 천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 양상을 체현한다.

 

마지막으로, 송경운의 생애에서 출발점이 되는 지점으로 소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이 절도사소유의 노비였던 점과 관련된다. ‘절도사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통칭하는 말로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2품 무관직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고위직 무관(武官)은 입전인물인 송경운에게는 물론 작가 이기발에게도 생면부지의 사람은 아니었을 터인데, 실제로 이기발의 족보를 참조하면 그의 인척 중 이 절도사에 해당되는 인물이 한 사람 보인다. 이기발의 아우 이생발(李生浡, 1609~1629)의 아내에 대해 淑人 全州李氏. 父 水使 李憺이라 적혀 있는바韓山李氏文襄公宗會, 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2, 회상사, 1995. 71. 이생발의 장인인 이담(李憺)이 전주이씨로 수사(水使) 즉 수군절도사를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이담(1567~1644)1614년 함열현감으로 있으면서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조성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승진했고조선왕조실록 1614125일조. “함열 현감 이담은 자급을 더하고, 이후 충청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조선왕조실록 1625323일조에 전 수사(水使) 이담은 본디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부정한 수법으로 정의 현감이 되었다고 하여 그가 수군절도사를 지냈다는 언급이 보인다.. 효령대군의 6대손인 그는 광해군 때 정치에 간여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탄핵을 받아 영향력을 잃었다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세보편찬위원회, 全州李氏孝寧大君靖孝公派世譜首卷, 청권사, 1983. 554~556; 조선왕조실록 1612813일조에 사간 이성(李惺)과 별좌 이담은 종실의 후예로 국가가 장차 넘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드디어 부축하여 세울 계책을 내었습니다라는 언급이 보인다. 이성은 이담의 종형제다..

 

한편 이기발은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송경운과 자신에 대해 嘗有分예전에 인연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상기한 인간관계와 조응한다. 즉 이기발에게 사돈이 되는 수군절도사 이담은, 송경운에게는 10여세 연상의 젊은 주인으로,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한 최초의 관대한 조력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이담을 통해 이기발과 송경운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점이 두 사람의 과거 인연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은 고증과 추론을 종합하면 17세기의 빼어난 비파 연주자 송경운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재구해볼 수 있다.

 

송경운은 1580년대 중, 후반 서울에서 수군절도사 이담 집안의 노비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 비파에 입문하여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2, 13세에는 서울과 그 인근에 명연주자로 알려졌다. 송경운의 10대 시절은 1590년대 중, 후반으로 임진왜란(1592~1598)의 시기와 대략 겹친다. 7년의 전쟁은 전도유망한 비파 연주자의 청소년기를 위협과 공포로 얼룩지게 한 시련의 시간이었을 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노비 청년이 면천과 무관직(武官職) 획득에 성공하여 신분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지나간 서울에서 송경운은 비파 명연주자로 활약하며 반생을 보냈다. 20년이 넘도록 그가 구가한 명성은 당시 각 분야의 일인자를 일컫던 어쩌면 이리도 송경운의 비파 같은지!”[何如宋慶雲琵琶乎]라는 유행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16271,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는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전세가 급박해지자 소현세자가 전주로 남하하여 분조(分朝)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1627121일부터 동년 326일까지 전주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조정을 소현분조’(昭顯分朝)라 한다. ‘분조’(分朝)는 전란 시에 존재했다가 전란이 종결되면 해체되는 임시 조정이다. 성당제, 정묘호란시 소현분조(昭顯分朝)와 세자의 역할-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를 중심으로, 규장각 31, 2007. 1~28.. 이 무렵 50대의 중년에 이른 송경운은 서울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전주로 이주했으며, 이 점에서 정묘호란은 그의 생애가 일대 전기를 맞게 되는 계기였다. 전주에 정착한 송경운은 50대 이후 20여 년의 여생을 전주 사람들을 위해 비파를 연주하는 데 바쳤다. 그는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대하며 정성을 다해 비파를 연주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전주에서의 후반생이 음악가로서 그를 한층 성숙하게 했음을 볼 수 있다. 비파를 연주하는 틈틈이 전주의 아전들과 교류하고 제자를 키우며 보람 있는 여생을 보내던 송경운은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자식은 두지 못했지만 그의 뒤를 이을 제자들이 상주가 되어 비파 연주로 그를 송별했다. 1640년대 후반 어느 날 새벽, 장지로 떠나는 그의 마지막을 온 전주 사람들이 나와 지켜보았다.

 

 

 

(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앞서 송경운의 생애를 개략하며 밝힌 것처럼, 송경운의 삶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변화했다. 그 이전의 삶이 부유한 상류층에게 각광 받는 비파 연주자로서 화려한 명성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은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곁에 언제나 머물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악사 송경운의 후반생은 음악의 본질 깊숙한 곳에 나아간바, 한층 높고 빛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악가로서의 성숙은 정묘호란 이후 송경운의 거주 공간이 달라진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본절에서는 악사 송경운을 성장하게 한 공간의 면모를 그의 생애와 결부시켜 구체적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1) 서울에서 흘러간 반생

 

 

宋慶雲乃京城人也. 송경운은 서울 사람이다.

 

 

송경운의 인적사항과 관련하여 가장 명확한 지점은 京城人즉 서울 사람이라는 언급이다. 송경운이 73년의 생애 가운데 50년을 보낸 곳이 바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서울이라는 데 대한 추론이 이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기발은 서울의 악사 송경운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두 계열의 선행연구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원문을 먼저 분석한 후 적절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1 繡棟瓊筵, 是其居也; 腰金頂玉, 是其伴也; 花髻雲鬟, 是其左右也. 逢逢之鼓, 鏘鏘之筦, 是其所以贊威儀者也. 如河之酒, 如山之肴, 千束之綾, 萬貫之錢, 是其供具也.

-2 孰家之食, 誰人之衣, 度日是也, 度月是也, 以之度年是也, 以之度半生亦是也.

 

 

-1의 화제는 악사 송경운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다. 호화로운 고급주택에서 이루어지는 화려한 연회자리, 금인을 차고 옥관자를 단 고위관료들, 풍성한 머리채에 꽃장식을 한 아름다운 기녀들, 장구와 피리의 떠들썩한 소리가 먼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나열되었다.

 

그런데 이 모두는 송경운의 주변에 잦은 빈도로 나타나긴 하지만 항구적으로 그를 구성하는 것은 못 된다. 잔치자리는 그의 집이 아니고 고위관료나 기녀들도 그의 가족이나 벗이 아니다. 이 모두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며 그는 환대를 받고 있으나 이 자리의 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취지는 뒤의 如河之酒, 如山之肴이하에 대한 해석과 내면적으로 이어지는데, 해당 구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계열의 번역을 찾아볼 수 있다. ‘강 같은 술이며 산 같은 안주, 일천 속()의 비단과 일만 관()의 돈이 과연 누구에게 주어졌는가의 문제로 견해가 갈리는데, 최초의 연구에서는 이 막대한 재화를 연회에 지출된 비용으로 본 반면, 최근의 번역본 2종에서는 그것을 악사 송경운에게 지급된 사례비로 본 것이다.

 

-1을 관찰하면 是其居也이하로 是其○○라는 문형이 모두 5번 반복되고, 그중 앞의 4번에 해당하는 是其가 모두 송경운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5번째 是其역시 송경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도 같으며, 후자의 번역본에서도 이런 연유에서 그와 같은 해석에 도달한 듯하다. 그에 따르자면 이 구절에서는 송경운이 막대한 출연료를 받았음이 강조된다.

 

그러나 앞서 파악한 맥락에 따르자면 이 단락에서 제시된 화려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든 것들은 송경운을 스쳐 지나가는 외물(外物)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여기 언급된 막대한 재화는 출연료라는 명목으로 송경운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연회에 쓰인 비용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게다가 5번째 구절의 서술어인 供具는 특정 개인에게 바쳐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절에서 올리는 재와 같은 큰 행사의 비용에 더 어울리는 말로서, 초기 연구의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맥락을 이렇게 파악한다면 이 단락은 고관대작의 고급주택에 열린 화려한 연회를 표상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술과 안주가 차려지고, 송경운을 위시한 악사들과 기녀들을 소집해 흥을 돋우는 데 막대한 비단과여기서 일천 속()의 비단전두’(纏頭)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전두란 광대나 기생, 악공 등 예인(藝人)에게 사례의 뜻으로 주는 금품을 뜻하는 데, 원래 공연이 끝난 뒤 비단을 내려 주어 머리에 묶도록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돈이 소비되는 사치스러운 잔치인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송경운은 이 자리의 객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들은 그의 소유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몹시 화려하고 흥성스럽지만 덧없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런 부질없음의 기색은 이어지는 -2孰家之食, 誰人之衣”[누구의 집에서도 밥을 먹고 누구의 집에서도 옷을 얻어 입었다]라는 구절에서 짙어진다. 송경운이 서울 어디서든 의식을 제공받을 정도로 환대의 대상이었음을 알려주는 이 구절은 박지원(朴趾源)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 온 서울 사람들의 신뢰를 샀으나 집도 절도 없었던 거지 노총각 광문한양 8만 호가 다 내 집인데 평생 채 다 들를 수도 없다’[漢陽戶八萬爾, 吾逐日而易其處, 不能盡吾之年壽矣]고 너스레를 떨 때와 비슷하게 쓸쓸하다. 송경운에게도 한 곳에서 옷과 밥을 지어 주는 아내가 없었던 듯하다.

 

이처럼 대중의 환대를 받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서울의 빛나는 중심부를 전전하는 송경운의 반생이 주는 부질없음의 느낌은 日是也, 月是也, 以之年是也, 以之半生亦是也에 보이는 의 반복에서 더욱 강화된다. ‘悠悠度日등의 관용어구에 사용되는 이 동사는 보통 아주 보람 있게 살 때에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송경운의 화려한 서울 생활이 내포한 공허함이랄까 수동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이런 해석에 따라 해당 단락에 대한 번 역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아로새긴 대들보 아래 화려한 잔치 자리가 그의 거처였다. 금인(金印)과 옥 관자를 한 고위관료가 그의 동반자였다. 꽃 장식을 하고 구름 같이 풍성하게 머리를 올린 기녀들이 그의 좌우에 있었다. 둥둥 울리는 장구와 삘릴리 하는 피리가 그 위의를 도왔으며 강물 같은 술에 산과 같은 안주, 일천 속()의 비단과 일만 관()의 돈이 그 잔치의 비용으로 쓰였다. 누구의 집에서도 그에게 밥을 주었고 누구든지 그에게 옷을 주었다.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고 한 달이 이렇게 지나갔다. 한 해가 이렇게 지나갔거니와, 반평생 역시 이렇게 지나간 것이다.

繡棟瓊筵, 是其居也; 腰金頂玉, 是其伴也; 花髻雲鬟, 是其左右也. 逢逢之鼓, 鏘鏘之筦, 是其所以贊威儀者也. 如河之酒, 如山之肴, 千束之綾, 萬貫之錢, 是其供具也. 孰家之食, 誰人之衣. 度日是也, 度月是也, 以之度年是也, 以之度半生亦是也. (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7)

 

 

요컨대 이 단락은 송경운이 속한 공간으로서 서울의 잔치 자리를 묘사하는 데 집중되었다. 송경운을 둘러싼 공간은 화려하게 빛나지만 그 구성원은 죄다 익명의 존재로서 구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송경운의 곁에 늘 머물지도 않는데, 이는 기실 송경운이 그런 잔치 자리들을 전전하며 스스로 정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고 말들이 서로 발굽을 밟으며 서로 밀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곳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곤 했다.

송 악사 어딨나?”

아무 궁가(宮家)에서 불러갔다지.” “송 악사 어딨나?”

아무개 상공(相公)이 불러갔다는군.”

그가 이미 한 군데에 불려가 버리고 나면 남은 자리가 쓸쓸해져 즐거워하는 이가 드물었다. 온 도성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人磨肩馬疊足, 至於不可排, 而曰: “宋樂師何在?” “某宮家邀之.” 已曰: “宋樂師何在?” “某相公邀之.” 已見邀於一, 則落莫而鮮其歡者, 滿城皆是.

 

 

우선 위 인용문 중의 人磨肩馬疊足, 至於不可排하는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뉘고 있어 계속 주의를 요한다. 최초의 선행연구에서는 그곳을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규모의 연회 자리로 보았고, 최근의 번역본 2종에서는 송경운의 집 앞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해당 단락의 주지가 약간 달라지는데, 전자의 경우 송경운이 빠진 연회에서 사람들이 느낀 섭섭함을, 후자의 경우 송경운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그의 부재에 느낀 실망감을 향하게 된다.

 

물론 온 서울 사람들이 그의 비파 연주를 사랑하지만 늘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 정도로 송경운의 인기가 높았다고 보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두 견해 모두 수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의 단락에서 송경운이 부귀가의 잔치 자리를 전전하는 수동적이고 부질없는 삶을 살았던 것, 그래서 집을 소유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의식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서울살이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것과 연관 지어 본다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 장소는 역시 대규모 연회 자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

 

송경운이 서울 도성 안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풍요로운 곳에 주로 머물렀다는 점은 앞서 언급한 繡棟瓊筵에 잘 드러난다. 호화로운 고급주택에서 열린 화려한 연회를 뜻하는 이 말은, 위 인용문에 보이는 某宮家某相公이라는 익명의 최상위계층에 대한 지칭과 조응하며 송경운이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속해 있었음을 처음부터 알려준다.

 

요컨대 이상의 단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서 이루어졌 던 익명의 호화로운 연회 장소로 점철되어 있다. 그 가운데 송경운은 왕족과 최상층 관료들을 주된 고객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했고 그들의 연회를 빛내는 가장 귀한 장식으로 존재했다. 다시 말해 송경운은 이 추상적인 공간을 뿌리 뽑힌 화초와 같이 떠돌며 반생을 보냈다.

 

 

2) 전주에 뿌리박은 여생

 

50대에 접어든 송경운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전주로 이주했다. 이로써 서울 도성 안이라고 지칭될 수 있지만 그 익명성과 한시성(限時性)으로 인해 어디라고 적시하기 어려운 오랜 거주지를 벗어나게 된 송경운의 후반생은, 상당한 공간적 구체성을 얻게 된다. 이기발은 처음 송경운이 전주로 흘러들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는 정묘년(1627)의 난리 때 전주성 서쪽으로 흘러들어와 집을 빌려 거처했다. 집과 마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이내 화초를 가꾸는 데 마음을 두어 사람들에게 널리 구하였다. 그러자 친한 사람, 잘 모르는 사람, 멀리 사는 이, 가까이 사는 이 할 것 없이 모두, 아무리 희귀하고 특별한 화초라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저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치지도 않고 가져다주었으니, 천만 가지 화초가 빠짐없이 그의 뜰에 갖춰지게 되었다. 게다가 괴석(怪石)을 많이 가져다가 화초 사이에 두기도 했다. 경운은 꽃이 활짝 핀 아침이나 달빛이 좋은 저녁이면 언제나 비파를 안고 꽃길을 거닐었다. 그 우아한 정취는 조그만 화단과 잘 어울렸고 맑은 운치는 향기로운 꽃들 사이로 흘러내렸다.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을 도시 한복판에 옮겨다 놓은 것과 같았고, 시끌시끌한 곳임에도 속세에 찌든 생각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경운은 언제나 스스로 이렇게 즐겁게 지냈다.

丁卯之亂, 流寓於完山城西, 僦屋而居. 灑掃庭宇, 乃復留心於花卉, 旁求之人, 無親疎遠邇, 皆不惜其奇與異也, 各以其有致之不勞, 而千名萬彙, 無不畢具於一庭之內. 又多取怪石, 間置花卉間. 慶雲每以濃花之朝, 好月之夕, 抱琵琶逍遙於花卉之逕, 雅趣適於小壇之上, 淸韻落於衆芳之中, 仙區移於都市之境, 麈念絶於諠囂之域, 慶雲以此常自娛. (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객지에서 임시로 살다라는 뜻의 류우’(流寓)전세 등으로 세 들어 사는 것을 뜻하는 추옥’(僦屋)은 송경운이 전주에 온 것이 우연적이었고, 그가 애초부터 정착할 의도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 「도판1전주성. 왼쪽 가운데 ‘패서문(沛西門)이라 적힌 곳이 그 서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그가 자신의 셋집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전망을 보여준다. 송경운은 자기 집을 청소하고 정원을 가꾸는 데 정성을 기울인다. 그 는 정원에 심을 화초를 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주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이내 그들의 친절을 경험했다. 여기에는 이기발이 묘사한 바 송경운의 인간적 매력도 작용했겠지만이기발은 체구가 훤칠하게 컸고, 풍채가 좋고 피부가 희었으며, 가느스름한 눈은 별처럼 빛나는 데다, 수염이 아름답고 담소를 잘 했으니, 말하자면 참으로 호 남자였다”[身頎而長, 貌豐而白, 眼細而明如星, 美鬚髥善談笑, 眞所謂好男子也]라 하여 송경운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좋은 인상을 공들여 묘사했다. 위 인용문에 더 부각된 것은 외지인인 송경운에게 다가간 전주 사람들의 환대하는 태도다. 송경운의 이웃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낯선 중년 남성에게 저마다 가진 희귀한 화초들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송경운은 아마도 생애 최초로 집다운 집을 얻게 되었고 자신과 잘 어울리는 뜰을 갖게 되었다. 이웃들의 친절과 스스로의 정성으로 가꾼 정원에 꽃이 피고 달이 뜰 때 비파를 연주하는 송경운의 모습은, 예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천상의 아름다움과 지복(至福)을 현현하는 장면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이 모습이 아마도 예술가로서 그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을 터인데, 전주에 오자마자 얻은 셋집이 곧장 이런 선물을 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그는 스스로 화초를 심어 가꾼 이곳을 자신의 뿌리 내릴 장소로 삼을 것이었다.

 

 

▲ 「도판2전주성 서문 근방의 다가동.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다가산과 이어져 있으며 남부시장과도 멀지 않다. 도시 한복판의 시끌시끌한 곳이다.

 

 

화제를 약간 전환하여 송경운이 여생을 뿌리내리게 될 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해 조금 더 구 체적으로 접근해보도록 하겠다. ‘전주성 서쪽에 있었다고 소개된 이 집은 도성의 서쪽 구역, 즉 서문(西門)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지만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의 구지(舊址)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송경운의 집은 그 서문 근처이면서도 도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도시 한복판에 신선세계를 옮겨 놓은 것 같고’, ‘시끌시끌한 곳임에도 속세 생각을 끊게 했다는 말이 참조되는데, ‘도시라든가 시끌시끌한 곳이라는 표현이 도성 안과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정원이 아름다운 송경운의 집은 아마도 전주 도성 안이자 서문 부근인 지금의 다가동 어름에 마련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연주를 듣고자 누군가 찾아오면 그저 고마워서 하던 일을 황급히 내려 놓고 소인같이 하찮은 것을 귀하께서 좋게 보아주시는 이유는 소인의 손에 있습지요. 소인 어찌 감히 손을 더디 놀릴 수 있겠으며 소인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小人賤品也, 而多見以貴下者, 其功在小人手中, 小人豈敢遲下手乎? 小人豈敢不盡心乎?(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7)]라며 신분고하와 상관없이 누구든 평등히 환대하고 진심을 다해 비파를 연주하던 곳도 바로 전주성 서문 근방의 그 집이었을 터이다. 또한 그렇게 찾아오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비범한 음악가로서의 내적 고민을 이기발에게 토로하며, 그래도 음악에서 중요한 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자신의 음악론을 표명하고, 홀로 추구하는 예스러운 곡조와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조를 조화시켜 이상과 현실을 화해시키는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곳이와 같은 송경운의 음악론에 대해서는 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360~363면 참조. 역시 이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송경운이 임종하며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긴 곳도 그 집이었던 듯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다음과 같다이 단락에는 결자(缺字)로 인 해 해석이 소연하지 않은 곳이 있다. 최초의 선행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싣지 않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는 유언을 남긴다. 쓸쓸히 타향에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음악을 직업으로 하였으니 장례시에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자기의 혼을 즐겁게 하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라 하여 송경운의 유언 내용을 요약한바, 본고에서는 이 해석을 계승했다. 한편 최근의 번역본에서는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내가 죽거든 나를 아무 산 양지쪽에 묻어다오. 그리고 도리로 보아 너희들은 다 내가 업으로 한 악기를 가지고 와서 나의 혼령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혹시라도 시속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 제자들이 그의 유언대로 새벽달 아래 서천을 건너 상여는 아무 산 남쪽으로 갔다. 뭇 비파에서 나는 상엿소리와 어울렸다라고 했는데, ‘나를 보낼 때 음악을 연주해 달라고 했던 유언의 초점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을 우려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해당 부분에 대한 번역을 다시 해보았다. 인용문의 밑줄 친 부분에 의문이 있어 필자의 해석에 따라 수정한 결과가 아래에 제시된 번역이다..

 

 

평소에 아픈 적이 별로 없었는데 갑자기 기궐(氣厥)을 앓아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임종 무렵 제자들을 모두 불러 이렇게 말했다.

불행히도 나는 자식이 없다. 내가 죽으면 (내용 결락) 나는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으로, 자식도 없이 고향도 아닌 곳에서 죽게 되었으니, 어찌 쓸쓸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내가 죽으면 나를 아무 산의 양지에다 묻어주되 그 가는 길에 너희들이 모두 나의 업인 음악을 연주하여 나의 정신을 즐겁게 해 다오. 혹시라도 해괴한 풍속이라 여기지 말고. (내용 결락)”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나이가 일흔 셋이었다. 제자들은 그의 말대로 했으니, 새벽달 아래 서천(西川)을 건너 상여 행렬이 산 남쪽을 향할 때 여럿이 연주하는 비파 소리가 상엿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것이었다. 성안 가득 나와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生平小疾病, 猝患氣厥不能起. 將死盡招其弟子, 言曰: “不幸我無子. 我死 缺 我流人也, 無子而死於流, 豈不草草乎? 且我業樂也, 我死埋我於某山之陽, 其在道也, 若屬皆執吾業, 以娛我神. 毋或以駭俗 缺 .” 言訖而逝. 時年七十有三. 弟子如其言, 以曉月涉西川, 輿行指山南, 衆琵琶聲, 雜於薤歌. 滿城觀者, 莫不涕泣曰: “世安得更見如夫人者?”(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송경운은 자식도 없이 타향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된 데 대해 약간의 회한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에는 삶에 대한 긍정이 훨씬 더 도드라져 보이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음악의 힘이다. 그는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는 자기정의를 내리며 자신의 마지막 길에 제자들이 나의 업인 음악을 연주하여 나의 정신을 즐겁게 해주길 부탁했다. 살아 있는 동안 음악과 함께였기에 행복했다고 홀로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 이후까지 음악이 함께 할 것을 기원하는 담담한 이 말은, 송경운이 온 존재를 담아 음악에 바치는 사랑 고백으로 들린다. 그는 죽음 앞에 음악을 연주하는 낯선 행동에 대해 제자들이 상례(喪禮)에 어그러진 것이라이와 유사한 행동을 한 이로는 아내가 죽었을 때 고분이가’(鼓盆而歌: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름)한 장자(莊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 구절은 작품 말미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비파를 합주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보내도록 한 것을 보면 그는 역시 마음에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고 속박을 훌쩍 벗어 던진 뜻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使弟子共彈琵琶以送終, 其亦有自得於心, 而脫落不拘檢之志者歟!]라는 논평과 조응한다. 즉 상례(喪禮)에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한 것은 장자의 고분이가와 마찬가지로 예속(禮俗)에 어긋나지만 초탈한 행동으로서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여길까봐 걱정하는 말을 덧붙여 자신의 소망을 한 번 더 확고히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송경운의 유언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자신이 떠나는 길에 음악을 연주 해달라는 것이라 하겠다.

 

제자들은 송경운의 진심을 이해했기에 그의 상여가 집을 떠날 때 비파 합주로 그를 배웅하여 유언을 이루어 주었다. 새벽달이 뜬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나와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전주 도성 사람들 역시 음악으로 진심을 다한 송경운의 생애를 십분 이해하고 그 특별함에 대해 공감하고 찬탄했던 것이다.

 

그런데 송경운이 이승을 떠나는 길을 묘사한 이 장면을 보면 그가 전주성 서문 쪽의 그 셋집을 임종 때까지 떠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 단서가 되는 지명이 바로 서천’(西川)이다.

 

전주 사람들에게 서천은 다가산 기슭을 흐르는 전주천을 가리키는 말이다완주군 상관면 슬치 북동쪽 산자락에서 발원한 전주천은 반곡천과 남고천을 받아들이며 전주교와 매곡교 밑을 지나서 서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오른쪽으로 꺾어져 다가산 기슭을 돌아 진로를 북서쪽으로 바꾸게 된다. 홍성덕 외 역, 국역 전주부사, 전주시 전주부사번역편찬위원회, 2014. 165.. 여러 차례 개건된 결과로서의 서천교가 현재 남아 있기도 한데서천교는 본디 흙다리였기에 홍수 때마다 유실되었으며, 순조 33(1833) 석교로 개건되어 1936년 대홍수 때까지 존속되었다. 홍성덕 외 역, 위의 책. 534., 이 장소는 전주 서문 부근에서 멀지 않다. 그러므로 앞서 다가동 어름으로 비정했던 송경운의 집을 출발하여 산 남쪽의 장지로 향한다고 할 때 서천을 건너도록 동선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결국 송경운은 20년간 뿌리박은 전주 도성 서쪽의 동네를 영영 떠날 때 이 서천을 건넜을 터이며, 제자들이 비파를 합주하여 그를 배웅하고, 온 전주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물짓던 장소도 바로 이 서천교 부근으로 비정하기에 무리가 없다.

애초에 이기발이 정묘년 난리 때 전주로 흘러와 성 서쪽에 집을 빌려 거 처했다고 송경운의 이주를 언급했을 때, 이는 결과적으로 송경운의 전주살이 전체에 고스란히 해당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장소, 즉 전주 도성의 서문 근방으로 전주천의 서쪽 개울인 서천이 휘돌고 성문을 나서면 다가산으로 이어지는 이곳이, 전주에 내려온 서울의 악사 송경운의 후반생과 음악을 상상하고 결부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도판3다가산 기슭을 흐르는 서천(西川). 송경운의 상여가 서천을 건널 때 제자들이 비파를 연주했고 전주 사람들이 나와 배웅했다.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李起浡)

 

 

자기 묘사

 

이 장에서는 송경운전에서 가장 정채를 띠는 한 단락을 검토하며 작가 이기발의 내면을 따라가 보고, 그에게 송경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사람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해당 단락은 본디 송경운전의 서사에서 가장 앞 부분에 배치된 것으로, 10년간의 서울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점의 작가가, 만년의 송경운과 마주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본격적 시작이 되는 해당 장면의 도 입부를 다음과 같은 자기묘사로 출발한다.

 

 

무심자(無心子)는 말한다. 나는 해진 베옷을 입고 여윈 말을 타고 노복(奴僕)도 없이 혼자 전주성 서쪽을 따라 얼음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無心子曰: 余嘗以弊布衣, 乘羸馬, 無蒼頭而獨傍完城西, 登冰峙.(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일반적인 전이 입전인물의 인적사항 및 일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위 인용문은 좀 이례적인바 그 서술의도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기발이 스스로를 칭한 무심자는 그의 호 중 하나다. 그의 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서귀자’(西歸子)인데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중화의식이 투영된 이 말에 대한 지향을 유년기부터 지니고 있었거니와 병자호란(1636)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서귀를 자호로 삼아 평생의 뜻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음을 이기발은 여러 차례 술회한 바 있다.

 

이에 비해 무심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사용한 호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귀유고(西歸遺稿) 수록작 가운데 무심자로 자칭한 글은 송경운전을 포함해 모두 4편인데, 그 중 하나인 참봉 원가원을 보내며(送元參奉可遠)는 죽은 아우의 벗 원근(元近)1641년 경기전 참봉으로 부임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써 준 글이고원근이 경기전참봉으로 임명된 데 대해서는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가 16391220일에 사재참봉으로, 1645425일에 서부참봉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경기전참봉으로 재직한 시기가 1641년 이후 1645년 이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나머지 둘인 감사 목성선의 <형제 상회도> 뒤에 희제하다(戱題睦監司性善兄弟相會圖後)양사룡전(梁四龍傳)은 작품 안에 을유년(1645)으로 창작시기가 밝혀져 있는바 모두 1645년 및 그 가까운 시점에 쓴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송경운전의 창작시기 역시 그 즈음이 아닌가 추정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이 점은 앞서 송경운의 몰년을 1640년대 후반으로 비정한 것과 대략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거나, 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를 표상하는 말로서 무심은 이기발의 생애 가운데 1640년대 중, 후반의 시간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는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심해지길 희구했던 것일까?

 

이기발은 해진 베옷을 입고 경마잡이도 없이 혼자서 여윈 말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다. 이 자기 묘사에서는 사회 경제적 몰락의 징후가 느껴진다. 벼슬 없고 종도 없는 사대부의 외양으로 스스로를 그려 넣은 데서, 무심에의 희구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가누려는 것과 관련되지는 않았나 추측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가 있는 장소는 完城西’, 즉 전주 도성의 서쪽이다. 이기발의 생애 이력을 떠올려 본다면 이 인물과 배경의 조합은 금의환향과 반대되는 어떤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 「도판4이기발의 집이 있던 황방산 기슭에서 도성 서문까지는 약 7km 떨어져 있다. 그가 지나던 얼음고개란 다가산 근처 용머리고개가 아닌가 한다.

 

 

시조와 이기발

 

이기발은 전주 사람이다. 전주부의 서쪽 외곽지역인 황방산 기슭에서 나고 자란 그는 24세가 되던 1625년에 상경하여 그로부터 대략 10년간 서울에서 학업과 벼슬살이를 해나갔다. 그러다 병자호란(1636) 이후로는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고 돌아와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에서 남은 생을 오롯이 보냈다. 몰락한 모습으로 고향의 북적이는 도성에 다가가는 중년 남성 이기발의 내면은 썩 유쾌하기 어려울 듯하며 그의 초라한 행색은 이런 마음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여기서는 처사의 삶을 선택한 뒤 황방산의 집과 전주 도성 사이를 오가는 이기발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귀유고2에 수록된 해당 작품의 제목은 저녁에 돌아오다[暮歸]이다: “朝傍東城行 아침에 동쪽 성곽 곁에 갔다가 / 暮向西山歸 저녁에 서산(황방산: 인용자) 향해 돌아오 네. / 東城多甲第 동쪽 성곽에는 큰 저택 많아 / 歌吹隨風飛 풍악소리 바람따라 날아오네. / 豪奢豈終極 호사스러움 어찌 끝이 있으리 / 酒盈兼魚肥 가득한 술에 살진 생선. / 西山最寂寞 서산은 가장 적막하여 / 孤店長林依 외로운 주막이 긴 숲에 의지해 있네. / 妻子恒飢色 처자식은 언제나 굶주린 기색 / 有年啼饉饑 몇 년을 배고파 울었지. / 如何捨都市 어째서 도시를 버리고 / 必須竆翠微 기필코 산중턱에 몸을 두냐고. / 性忄辟 異世人 별난 성격 세상 사람들과 달라 / 丘山甘采薇 산에서 고사리 캐길 달게 여기지. / 向來十數年 근래 십수 년 동안 / 紅塵未拂衣 붉은 티끌을 옷에서 떨지 못했네. / 孤踪竟何爲 외로운 자취 끝내 무엇을 하려는가 / 七尺身空頎 칠 척의 몸이 헛되이 헌걸차네. / 不可徒衣食 일 없이 입고 먹을 수 없는데 / 君民計已非 군민의 계책은 이미 글렀네. / 一朝卷而懷 일조에 경륜 거두어 간직하니 / 胡馬蹐郊圻 호마가 도성 밖을 걷누나. / 籊籊理竹竿쭉쭉 벋은 대나무 낚싯대 다듬어 / 重上舊苔磯 이끼 낀 옛 물가에 다시 올랐네. / 興亡與得失 흥망과 득실은 / 一夢同依俙 한바탕 꿈과 같이 희미하구나. / 涇渭未容混 경수와 위수는 섞일 수 없고 / 不曾嫌謗誹 일찍이 비방도 괘념치 않았네. / 愛敬致家伯 우리 형님께 사랑과 존경 다하고 / 溫凊勤庭闈 우리 어머니 부지런히 잘 모셔야지. / 此外復何望 이 밖에 또 무얼 바라랴 / 谷蘭生芳菲 골짜기의 난초에서 향내가 나네. / 暮歸豈不好 저녁에 돌아오니 이 얼마나 좋으냐 / 稺子候荊扉 어린 자식이 사립문에서 기다리니.” 이기발의 문집에는 이 시와 같은 자기서사적(自己敍事的) 술회시가 많은 편인데 이에 관해서는 별고를 준비 중이다.. 자신이 발 디딘 얼음 고개라는 지명 역시 그의 스산한 내면과 닿아 있다한편 전주 도성의 서쪽이라면 송경운의 전주 집이 있던 곳과 겹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이기발이 오르던 氷峙얼음고개는 전주 부서면(府西面) 빙고리(氷庫里)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지금의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에 해당하는 빙고리는 다가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 전주천에서 채 취한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가 있었던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이기발이 오르는 얼음 고개에서 전주성 서문 및 그 근처 송경운의 집이 있었을 동네까지는 고작 1km일 뿐이다. 요컨대 그가 지나가는 이 지점은 송경운과 마주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대목은 그런 분위기를 갑작스레 전환하며, 뜻하지 않게 송경운과 마주친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는지 그려낸다.

 

 

그때는 봄이고 삼월 상순(上旬)이라 복사꽃과 자두꽃이 온 성안에 가득 피어 있었다. 저 멀리 어떤 장부(丈夫) 한 사람이 보였다. 대지팡이를 등에 지고 짤막한 베옷을 입은 그는 마음껏 노래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살쩍과 머리칼은 눈처럼 희었다.

時則春三月上旬, 桃李滿城中. 遙見一丈夫, 負竹杖着短褐, 放歌而徐行, 其鬢髮白如雪.(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이기발이 눈 들어본 전주 도성의 풍경은 온통 봄이다. 만발한 분홍 복사 꽃과 하얀 자두꽃 사이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허름한 입성과 상관없이 봄날과 잘 어울리는 그 노인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정결한 백발과 흐드러진 노랫소리 덕분이다.

 

 

그의 노래를 들어보니 이러했다.

江湖有期約, 十年奔走 강호에 기약 두고 십년을 분주하니

不知之白鷗, 謂我遲來 그 모르는 백구는 더디 온다 하건마는

聖恩最至重, 擬報而來 성은이 지중(至重)하시니 갚고 갈까 하노라.”

聽其歌曰: “江湖有期約, 十年奔走, 不知之白鷗, 謂我遲來. 聖恩最至重, 擬報而來.”(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또렷하게 다가온 노래는 시조다. 강호에 대한 지향과 성은의 지중함에 따른 책임감을 함께 강조함으로써, 물러남과 나아감의 조화를 추구한 사대부의 보편적 정서를 드러낸 이 시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구(鄭逑, 15431620)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김진영 외, 한국시조감상, 보고사, 2012. 174~175.. 강호에 돌아갈 기약을 두고도 사대부의 책무를 등지지 못해 10년을 분주했다고 노래 한 정구처럼, 이기발 역시 20대 중반부터 10년을 중앙 관료로 치열하게 살 았었다. 지금은 고향에 돌아와 포의(布衣)의 처사(處士)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대부로서의 강한 책임감을 잊지 못한 이기발에게, 이 노래는 바로 자신에게 건네는 목소리로 육박했다. 노인의 얼굴보다 그가 부르는 시조의 노랫말이 먼저 식별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말미에서 세상에 가곡이 몹시 많은데 유독 강호곡(江湖曲)을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생각건대 그의 늙은 눈으로도 멀리서 무심자를 알아보고 군신(君臣)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넌지시 충고한 것이리라[世之歌曲最多, 特唱江湖曲何歟? 意者老眼能遠記無心子, 而諷之以不可忘君臣之義者歟!]”이 구절을 통해 이기발이 해당 시 조의 장르를 가곡으로, 그 제목을 강호곡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서술태도는 가창되는 국문시가에 대한 그의 식견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하여 원래 알던 이 노래를 귀담아 들었으며, 결국 이 시조가 강호로 돌아온 자신에게 사대부의 책무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조는 한역(漢譯)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江湖’, ‘期約’, ‘十年’, ‘奔走’, ‘白鷗’, ‘聖恩’, ‘至重등 원래의 노랫말에 사용된 어휘를 가급 적 그대로 쓰고 있는 것에서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으며, 아울러 초장, 중장, 종장이 저마다 5자와 4자가 더해진 형식으로 규칙성을 추구한 것을 통해 번역자의 전문성을 엿볼 수 있다. 기실 이기발이 시조를 한역한 것이 이번 한 번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무신(武臣) 이덕일(李德一, 1561~1622)의 시조 우국가(憂國歌) 28장을 모두 한역하여 전하도록 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덕일의 문집 칠실유고(漆室遺稿)에 수록된 우국가에는 西歸居士李起渤이름이 李起渤로 표기되어 있으나 과 동의자이고 서귀거사라는 호가 일치하므로 동일인으로 간주한다. 이기발의 이름자가 李起渤로 표기된 예가 이외에도 간혹 있다.飜辭및 번역 취지를 표명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이기발은 이덕일의 노래에 나타난 깊은 슬픔이 시대에 아파하는 굴원의 강직한 진심을 연상시키는바 곡조를 찾아 읽어가노라면 저도 모르게 감발되어 지극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으며, 이에 초사체(楚辭體)를 본떠 구말(句末)를 붙여 한역했다고 그 글에서 밝혔다盖聞長歌之哀甚於慟哭, 歌闋之數多至二十有八則, 公之哀亦甚矣. 余觀其歌也, 鬱悒慷慨, 有屈太夫傷時耿介之忱, 尋其調閱其章, 不覺令人感發嗟惜之至耳. 于以效楚辭, 係之以些.”(이덕일, 칠실유고1 憂國歌二十八章) 이기발의 이 글은 學文을 후리티오 反武으로 시작되는 우국가1수 앞 제하(題下)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이래 국문시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한역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시조의 한역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시기 동안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고되었다조해숙, 시조 한역의 사적 전개양상과 그 시조사적 의미, 한국시가연구15, 2004. 189~227.. 정구(1543~1620)가 지은 시조를 그보다 약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전문 악사가 17세기 중엽에 가창하며 향유한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노래에 공감한 이기발(1602~1662)이 능숙하게 한역한 결과가 담긴 이 장면은 시조 한역이 보편화되는 시기를 조금 올려 잡을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이 장면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다수의 시조를 접하고 한역한 작가로서 이기발을 학계에 알릴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퍽 이상한 두 사람의 만남

 

이상과 같이 이기발이 시조를 즐겨 듣고 사대부의 내면을 담은 그 메시지에 공감하는 적극적인 향유자이자 그 노랫말을 한문으로 정확하게 옮길 역량을 지닌 번역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송경운의 본격적 등장에 앞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서사 모두(冒頭)에서 송경운과 전주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재현하며, 자신의 존재감 역시 강하게 스며들도록 공을 들였다.

 

 

내가 탄 말 바로 앞에 다가와 그제야 자세히 보았더니, 바로 장안의 옛 악사 송경운이었다. 무심자는 예전에 그와 인연이 있었기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지팡이를 짚은 건 늙어서일 테고, 짤막한 베옷을 걸친 건 가난해서일 테고, 그냥 걸어가는 건 말이 없어서일 텐데, 그렇게 마음껏 노래하는 건 어째서인가?”

경운은 이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 이제 나이가 일흔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소인은 예전에 음악을 좋아 했지요. 그러니 소인은 늙은 악사입니다. 노래란 음악 중에 으뜸가는 것이지 요. 늙은 악사로서 봄날의 흥에 겨워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게 이상하신지요?

及至馬頭, 乃熟視之, 長安舊樂師宋慶雲也. 無心子嘗有分, 笑而語曰: “竹杖老也, 短褐貧也, 不騎無馬也, 至於放歌, 何也?” 慶雲乃揚眉而對曰: “小人時年七十有餘, 而小人嘗好樂, 則小人乃老樂師也. 而歌乃樂之宗, 以老樂師, 乘春乘興而歌, 夫子惟是之異乎?”(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앞서 이 절에서 검토하고 있는 단락이 송경운전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작품의 본격적 도입부가 된다고 언급했었다. 그 중 자세히 보았더니 장안의 옛 악사 송경운이었다라는 첫 구절은 작품에서 입전인물의 이름과 신분을 최초로 언급한 대목으로, 작가가 예전에 서울에서 보았던 한 악사와 오랜만에 해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기발이 서울에 머문 것이 1625년부터 대략 10년간이고, 송경운이 전주에 온 것이 1627년이므로 두 사람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던 것은 햇수로 3년에 불과하다. 이런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2장에서 수군절도사 이담(李憺)이 매개가 되었으리라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인맥은 시간이 흐른 지금 희미해져 버렸다. 송경운은 일찍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바 이담은 더 이상 그의 주인이 아니었고, 이기발은 아우 이생발이 1629년 서울에서 병사한 이래 사돈 이담과 멀어졌을 터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인연에는 인맥을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었다. 이기발이 송경운을 알아보자마자 웃으며 말을 건넨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웃음은 다소 착잡하다. ‘가난하여 말도 못 타고 걸어가는 노인네가 무엇이 좋다고 노래를 불러제끼는가?’라는 속물연(俗物然)하는 질문 이면에는, ‘나는 당신이 가난하지도 늙지도 않았을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빈곤하고 노쇠한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고 하는 서글픔이 개입해 있다. 그의 마음은 백거이(白居易)비파행(琵琶行)이나 두보(杜甫)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에서처럼 뜻밖의 장소에서 해후한 늙은 음악가에게서 인생의 무상함과 비애를 발견한 시인(詩人)의 상황과 맥이 닿는다. 하물며 그 자신도 해진 베옷에 여윈 말로 혼자 가는 신세임에랴.

 

그러나 늙은 악사 송경운은 떠돌이로 영락한 비파 연주자나 지는 꽃 같은 옛 명창 이구년처럼 처량하지 않다. 그는 짐짓 위악을 가장한 이기발의 질문에도 그늘 한 점 없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삶을 긍정할 따름이다. 송경운의 대답에는 이기발이 걱정한 가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임을 밝혔다. 노인이 되었어도 악사라는 고유한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취지다.

 

더 나아가, 완숙의 경지에 이른 늙은 악사로서 송경운은 음악의 본령 하나를 무심히 건드린다. ‘노래는 음악의 으뜸’[歌乃樂之宗]이라는 그의 명제는, 송경운의 다른 음악론인 음악에서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樂以悅人爲主]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평이하면서도 음악의 본질에 닿고 있어 깊은 울림을 준다. 음악을 성악(聲樂)과 기악(器樂)으로 나눌 때 노래는 성악에 해당한다.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며 말을 필요로 하는 성악 이 음악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송경운의 말은 음악과 함께 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이 말은, 기악인 비파 연주로 거장(巨匠)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것을 훌쩍 넘어 음악 전체를 투시하는 통찰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음악가로서 도달한 정신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봄이다. ‘봄날이 나를 노래하게 한다는 송경운의 말에는 노년의 음악가가 보여줄 법한 삶에 대한 무한한 예찬이 담겨 있어 인상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송경운이 서울에 그대로 머물렀어도 이 같은 행복한 결말에 이르렀을까. 아마도 그러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려한 잔치 자리를 떠도는 삶은 그에게 부와 인기를 가져다줄 수는 있었을지언정 홀로 봄날의 산길을 걸으며 노래할 여유는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이에 송경운의 전주 이주는 타인의 시선에서 빛나 보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를 따른 적절한 선택으로 심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어지는 송경운의 말은, 자신이 보았던 이기발의 서울 시절을 떠올린 것이다.

 

 

소인이 알기로 선생님은 옛날에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인데, 수놓은 비단옷을 해진 베옷으로 바꿔 입고 멋진 청총마(靑驄馬) 대신 여윈 말을 타고 설랑 그 많던 뒤따르던 종들은 어찌하시고 노복 하나도 없이 서울의 큰길 대 신 산길을 가고 계시는지요? 어째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계십니까? 소인 은 선생님이 유독 이상해 보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 즐겁게 노닐며 한나절을 보냈던 것이다.

小人知夫子舊日近侍, 換綉衣以弊布, 替驄以羸, 易多騶以無蒼頭, 代紫陌以山蹊, 何自苦如此? 小人惟夫子是異!” 遂相與遊戲半日.(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송경운은 전주 사람들이 보지 못한 이기발의 과거를 목격했었다. 이기발이 역임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은 둘 다 대간(臺諫)에 속하는 벼슬로 백관을 규찰하고 시정(時政)을 논하여 국왕에게 간언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삼는다近侍之臣이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로 승지나 사관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기발은 1633년 정언에, 1635년 지평에 제수되어 1636년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승정원일기 16331125, 이기발을 정언으로 삼다; 16341112, 이기발을 정언으로 삼다; 1635116, 이기발을 지평으로 삼다) 지평을 포함한 대관(臺官)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가 막중했으며,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이기발 역시 그런 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기발 은 36세 되던 1637819일에 북청 판관에 부임하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더 이상 조정에 나타나기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실록에서는 이런 이기발에 대해 정축년(1637) 이후로는 마침내 나와 벼슬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점에서 1636년의 병자호란이 이기발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이라는 언급이 정확히 그 점을 가리킨다. 당시 이기발의 외양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던가. 그는 수놓은 비단 관복을 입고 청총마를 타고 여러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울의 대로를 누비는 잘 나가는 중앙관료였다. 이기발이 송경운의 늙고 가난한 모습 뒤로 화려한 시절을 보는 것처럼, 송경운도 이기발의 쓸쓸한 현재 너머, 세상을 바꾸겠다는 패기에 넘치던 신진 관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송경운은 이기발의 현재를 고생을 사서 하는 것’[自苦]이라 표현했고, 만약 지금의 삶을 선택한 자신이 이상하다면 이기발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농담을 건넨다. 이 말은 과거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둘의 현재가 닮았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현재에 이르게 된 동기나 경로, 두 사람이 지닌 삶의 지 향 역시 비슷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즉 두 사람은 저마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를 따르는 삶을 택했다. 이런 선택을 긍정한 송경운의 이야기와 그 선택의 결과로서 그의 모습은, 자신의 현재에 가끔 낙담하고 본래의 품은 뜻에 회의를 갖기도 했을 낙향한 전직 중앙관료에게 이해와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며 그 역시 삶의 길을 제대로 선택한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속인(俗人)이 보기에는 퍽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이상한사람은 서로 닮은 것을 알게 되어 퍽 유쾌했다. 그래서 봄꽃이 한창인 전주성 서문 근처에서 즐겁게 노닐며 한나절을 보냈다.

 

 

▲ 「도판5」 「전주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일부. 왼쪽에 표시된 서문 근처에서 송경운과 이기발이 만났을 터이다. 봄꽃이 만발한 전주 도성을 그린 이 지도는 두 사람의 만남과 퍽 잘 어울린다.

 

 

4. 결론

 

 

이상과 같이, 17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 악사의 생애를 추적해 보았다. 73년간 지속된 송경운의 삶은 대략 1580년대부터 1640년대까지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파 연주에 오롯이 바쳐진 그의 시간은 1627정묘호란을 기점으로 질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는 그가 속한 공간이 달라진 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송경운은 50세 무렵까지는 서울의 화려한 잔치마다 불려 다니며 최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이렇게 분주하고 몸값 높은 연예인으로 살아가던 송경운이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는 점은, 근거지를 전주로 바꾼 이후 그의 삶에서 충일하게 배어나는 고요한 기쁨과 대비했을 때 비교적 선명해진다. 이런 질적 변화를 대비하는 이기발의 서술방식에는, 송경운이 전주로 내려온 것이 이 악사에게 큰 행운이었다는 판단이 개입해 있다.

 

이기발은 송경운이 악사로 초빙된 서울의 잔치 자리가 보여주는 흥성스러움과 거기 내포된 공허함, 송경운이 전주로 이주하여 얻은 도성 서쪽 집의 내밀한 아름다움, 평범한 청중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송경운의 모습, 송경운이 이승을 떠날 때의 달빛과 비파 소리 등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제시함으로써, 음악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른 한 선인(善人)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재현했다. 그의 생생한 장면 묘사를 따라 가노라면 이기발이 언젠가 서울의 화려한 잔치 자리의 한 참석자였을 것이고, 또 전주 도성 서쪽 집 정원에서 비파를 연주하는 송경운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이기발은 송경운을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을 터이며 이와 같은 입전인물과의 인연과 만남은 송경운전의 문학적 성취와도 관련되어 있다.

 

송경운전의 특별한 점 가운데 하나는, 이 작품에 입전인물의 형상이 그 자체로 잘 재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 그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는 점인데, 이는 작가와 입전인물 사이의 두터운 인연과 교감에 기인한다. 이에 이 작품을 통해 작가 이기발의 내면까지도 엿볼 여지를 갖게 된다.

 

이기발은 송경운과의 해후를 재현한 장면에서 인격적인 완성에 다가간 음 악가의 만년을 아름답게 그려냈으며, 아울러 중앙관료로서 치열한 삶을 살다가 병자호란 이후 전주로 귀향하여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입전인물과 은근히 오버랩했다. 이처럼 한 악사를 입전하며 사대부 작가 이 기발은 선한 이웃인 송경운의 존재에 힘입어 전주에서의 삶을 초심대로 잘 영위해 나갈 전망을 갖게 되지 않았나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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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s

 

“Song Kyoeng-un's biography” of Yi Ki-bal and the Representation of 17th Century JeonjuSino-Korean Literature Class with Historical Geography

 

Kim, Hara

 

“Song Kyoeng-un's biography” is a Sino-Korean prose of Yi Ki-bal’s. Song Kyoeng-un, the protagonist of this work is a famous lute player of the 17th century Joseon. He is a well-known figure in Korean music and literature history.

Yi Ki-bal is a literary man of gentry class who was born and raised in Jeonju. He started his central bureaucracy career in Seoul since 1625, in his mid-20s. He left Seoul after 1636, the Qing invasion of Joseon, and spent his life in his hometown.

Song Kyoeng-un was born as a slave of Yi Dam who was a member of the royal clan lived in mid-1580 of Seoul. Song was a lute player in Seoul in his mid-50s and enjoyed great fame and escaped from slavery. But he moved to Jeonju after the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in 1627 and spent the rest of his life at the age of 73. In this paper, Yi Ki-bal's brother was identified as the son-in-law of Yi dam and used as the link between the writer and the protagonist.

Yi Ki-bal was acquainted with the lute player's reputation while in

Seoul, and after returning to Jeonju, he was able to meet and interact with Song and observe the beautiful and full old age of this artist. The names of Jeonju's mountains and rivers mentioned in this prose can prove Song's residence and give his narrative a concrete background.

 

Key words : “Song Kyoeng-un's biography” 宋慶雲傳 , Song Kyoeng- un宋慶雲, Yi Ki-bal李起浡, the castle town of Jeonju全州城, national musician樂師

 

 

이 논문은 20191022일에 투고되었으며, 20191118일에 심사 완료되어 20191120일에 게재가 확정되었음.

 

 

 

 

인용

목차 /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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