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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1. 「송경운전」,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1. 「송경운전」,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건방진방랑자 2022. 7. 1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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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발(李起浡)의 송경운전(宋慶雲傳)17세기 전주 재현

역사지리를 접목한 한문수업의 모색

 

김하라(전주대)

 

 

국문초록

 

 

송경운전(宋慶雲傳)17세기의 비파 연주자 송경운(宋慶雲)을 입전한 한문 산문으로, 한국의 문학사와 음악사에서 공히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그 작가인 이기발(李起浡, 1602~1662)은 송경운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바탕으로 이 빼어난 음악가의 생애를 재현했다. 이기발은 전주에서 나고 자란 사대부 문인으로, 20대 중반이던 1625년부터 10년 남짓 서울에 거주하며 공부와 벼슬살이를 했고 1636병자호란 이후로는 모든 관력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한편 송경운은 1580년대 중, 후반의 서울에서 이담(李憺, 1567~1644)으로 추정되는 종친(宗親)의 노비로 태어났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면천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50대 중반까지 악사로 활동하며 서울과 그 인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으나 정묘호란(1627)을 계기로 전주에 이주하여 향년 73세로 타계할 때까지 20년 남짓의 여생을 보냈다. 본고에서 이와 같이 송경운의 생애를 추정하게 된 데는 이기발의 아우 이생발(李生浡)이 수군절도사 이담의 사위였던 점이 단서가 됐다.

 

이 인연에 더해 서울에 있는 동안 송경운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기발은, 전주로 낙향한 후 송경운을 다시 만나 이 악사의 마지막 10년을 같은 공간에서 가깝게 지켜봤다. 송경운전은 이처럼 입전인물과 작가가 시공(時空)을 함께 한 경험의 결과로서, 작가가 입전대상을 만나 대화를 나눈 기억을 장면 재현의 방식으로 생생하게 제시한 예가 많다. 그 중 구체적으로 거론된 전주의 지명을 통해 송경운의 거주지를 전주성 서문 안쪽의 다가동 어름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전주에서 보낸 송경운의 여생이 담고 있는 다채로운 내러티브를 다가산과 용머리고개, 서천(西川) 등의 현전하는 장소에 고스란히 결부시킬 수 있다. 이러한 성과는 송경운전을 생동감 있는 한문수업의 자료로 삼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17세기 전주의 역사지리를 재구하는 데에도 일정한 참조가 되리라 기대된다.

 

핵심어 : 송경운전(宋慶雲傳), 송경운(宋慶雲), 이기발(李起浡), 전주성(全州城), 악사(樂師)

 

 

 

1. 송경운전(宋慶雲傳),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송경운전17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훌륭한 비파 연주자 송경운의 생애를 다룬 전()이다. 조선후기에 창작된 예술가의 전기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파악되는 이 한문산문은, 문학성이 대단히 높을 뿐 아니라 그 내용에 함축된 예술사적 문제의식의 깊이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이 작품은 조선후기의 예인전(藝人傳) 중 기념비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352~367..

 

이와 같은 한문학계의 소개에 힘입어, 송경운은 한국 음악사를 풍요롭게 하며 17세기를 대표하는 비파 연주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노동은, 한국음악과 장인문화(한국학연구8,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6. 232~233)에서는 정묘호란 직후 노비출신으로 비파에 관한 한 신기에 가까운 장인이었던 악공 송경운은 장악원 악사에 이르지만 전주에 피신하고 장악원 복귀를 거부한 대표적 사례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송지원, 한국음악의 거장들(태학사, 2012. 133~138)에서는 “(송경운의-인용자)서울에서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예속적인 것이었다면 전주에서의 삶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그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음악사에서의 송경운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박희병 교수의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송경운전은 한국 전근대의 문학사와 음악사에서 공히 주목할 만한 소중한 문헌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예술가 전기로서 송경운전이 갖는 문학사적, 예술사적 의미는 어느 정도 밝혀진 듯하다. 또한 한 편의 빼어난 서사작품으로서 송경운전한문서사의 영토등 선집에 번역수록되어임형택 편역, 한문서사의 영토1, 태학사, 2012. 268~277. 최근 간행된 안세현 편역, , 불후로 남다(한국고전번역원, 2018)에도 송경운전의 번역이 수록되었다. 독자 대중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접하며 송경운전이 특히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한국 고전문학이나 한문학을 전공으로 삼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기에 적절한 텍스트라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그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음악가라는 소재는 자연스럽게 학제 간 접근을 가능하게 하여 어려운 한문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줄 수 있다. 작품에 언급된 비파 연주라든가 시조창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을 국립국악원에서 제공하고 있어 이용이 어렵지 않다.

둘째, 한 이상적 음악가의 삶을 정성스럽게 재현한 서사 자체가 갖는 힘이다. 이는 오롯이 전주 사람으로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입전인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충실한 인터뷰어 이기발(起浡, 1602~1662)의 역량에 따른 것이다.

 

본고는 위에 제시한 근거 중 후자의 면에 착안하여 시도되었다. 기실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명이 이루어진 것 같지 않은데, 송경운전의 작가인 이기발에 대해서는 물론한편 김형술,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국문학연구39, 2019. 183~214)이 최근에 제출되었는데 이는 이기발의 다른 전 작품인 양사룡전에 대한 분석으로 본고의 논의에 참조가 된다., 해당 작품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문헌 분석도 아직 진행된 적이 없는 듯하다. 예컨대 근래에 제출된 송경운전의 번역본에 나타난 해석은 이 작품에 대한 최초의 연구인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에 제시된 번역 및 작품 분석과 약간 다르지만,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을 찾아볼 수 없어 의문을 자아낸다. 만약 송경운전을 수업 자료로 삼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의 차이를 미리 해결해 둘 필요가 있게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의 성과를 계승하되, 송경운전의 작가가 이기발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 텍스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즉 작가 이 기발의 생애 및 그의 문집 서귀유고에 수록된 그의 다른 작품들과 조응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송경운전에 대한 심화된 이해에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반생을 전주에서 보내며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아름답게 완성한 송경운의 삶에 시공간적 구체성이 더해지고, 아울러 전주 사람으로서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고 이웃의 모습을 정성껏 기록했던 작가 이기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용

목차 / 원문

1. 송경운전(宋慶雲傳),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李起浡)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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