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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정묘호란, 병자호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정묘호란, 병자호란)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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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세계의 막내

 

 

홍타이지는 조선이 적대관계로 돌아서지 않는 한 조선을 침략할 의도는 없었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북방의 비중화세계는 중화세계의 본진인 중원을 정복 대상으로 삼았을 뿐 한반도를 타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후금의 조상인 금나라 시절에도 그들은 고려가 사금(事金, 금나라에 사대함)의 자세로 돌아서자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중원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던가? 한반도를 공격한 것은 오히려 중화세계였지 비중화세계가 아니었다(고대에 한족 왕조인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게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거란과 몽골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고려가 이상하리만큼 중화세계에 강한 소속감을 보이면서 그들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왕건의 훈요 10가 그런 예다). 따라서 그때도 고려가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이라도 취했다면 전란의 화는 충분히 면할 수 있었다.

 

당시 사정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조선이 중화세계의 막내라는 허울을 아예 벗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광해군(光海君)처럼 중립 외교를 펼쳤더라면 홍타이지는 굳이 중원 공략 사정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조선이 중화세계에 막내라는 허울을 아예 벗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펼쳤더라면 홍타이지는 굳이 중원 공략에 투입할 병력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조선을 침략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서인 정권이 수구로 돌아서면서 모든 사정이 변해 버렸다.

 

16271월 홍타이지는 아민(阿敏)이라는 부하에게 3만의 병력을 주면서 공격 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시작이다. 예상했던 사태였으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은 도대체 뭘 믿고 친명 노선으로 회귀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허둥댔다. 3년 전에 설치한 어영청(御營廳, 수도경비대)은 무용지물이었고 광해군(光海君)이 애써 육성했던 북변 수비대 역시 곳곳에서 후금군의 남하를 막으려 애썼으나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당시 상황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경우보다 더 불리했다. 일본군은 남쪽에서 치고 올라 왔으므로 조선이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적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번 전쟁에서는 두 나라가 분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명나라와 조선이 강하다면 오히려 양측에서 협공함으로써 전황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도 못한 게 또 문제다. 후금군은 주력군을 조선에 파견하고도 일부 병력을 빼서 랴오둥 방면의 명나라 군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문룡(毛文龍)이 지휘하는 명군은 조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후금군의 역공을 받아 신미도로 도망쳐야 했다. 한 달도 채 못 되어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다(그때 적군의 길잡이를 맡은 자는 바로 강홍립이었다.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었더라면 그가 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적이 코앞에까지 다가왔으니 인조(仁祖)와 조정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론 도망쳤다. 다만 이번의 피난처는 장소가 바뀌어 남쪽이 아니라 인천 앞바다의 강화도였다. 강화도라면 몽골 침략 때 고려 왕실이 송두리째 옮겨갔던 유서깊은(?) 피난처가 아닌가? 이제 남풍이 불면 의주로 달아나고 북풍이 불면 강화도로 도망치는 게 아예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남풍이 불던 때처럼 이번에도 역시 관군이 하지 못한 몫을 의병이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양까지 치고 내려올 줄 알았던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에서 갑자기 발길을 멈춘 것은 의병들의 저항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후금의 입장에서는 내친 김에 한양을 점령해 버리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그들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조선은 최종 타깃이 아니니까 무리하게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강화도의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한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고 조선 왕실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해 온 이유가 뭔지를 명백히 말해주는 요구다. 즉 후금은 장차 명나라를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게 그 정도라면,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그러나 강화도 정부는 그것을 수락하는 데도 난항을 겪는다. 명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라는 대의명분이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반정공신 1등인 최명길이 나서서 매듭을 푼다. 일부 주전론자가 있었지만 실력자가 주화론으로 기울면서 노선이 결정된다. 후금군이 철수하는 조건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관계가 되었고, 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 왕족 가운데 한 명을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가장 미묘한 사안인 명과의 관계 문제는 애매하게 합의된다. 기존의 사대관계는 단절하되 명에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게 조선의 입장이다. 물론 그 뜻은 장차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군대까지 동원해 가면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인데, 후금으로서는 후방 다지기에만 성공하면 되니까 일단은 통과된다.

 

여기까지만 봐도 600년 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을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 당시에도 거란은 중국의 송나라를 치기 위한 후방 다지기의 일환으로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에게 송의 연호를 쓰지 말라면서 중국과의 관계 단절을 요구했으며, 고려 정부가 그것을 수락하자 철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사태 전개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거란이 물러간 뒤 고려 정부가 다시 거란에게 적대적인 자세로 돌아갔듯이 조선도 본심에서 형제관계를 맺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후금을 형의 나라로 받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전란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사실 서인 정권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정한 데다 워낙 후금의 힘이 막강해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성리학적 세계관에 골수까지 젖어 있음에도 그것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후금의 강화 조건에 크게 반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적이 물러가자 그들은 얼마 전에 닥쳤던 위기를 어느새 잊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억력도 형편없다). 마치 전쟁을 유도하기라도 하듯, 조선의 그런 태도를 더욱 부추긴 것은 후금이었다.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착각한 후금은 걸핏하면 조선에게 군량을 보내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조선 북변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오가며 백성들을 약탈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후금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업그레이드하자고 요구해 왔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기서 꼭지가 돌았다.

 

부모를 버리는 아픔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도 끊었다. 또 중국 침략에 사용될 걸 뻔히 알면서도 후금이 요구하는 조공도 바쳤다. 그런데 16362월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仁祖의 비)의 문상 차 조선에 온 후금의 사신들이 군신의 예를 갖추라고 강요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터져나왔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일제히 일전 불사를 외쳤고 겁쟁이 인조마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기개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고결한 자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으로서 칭찬받을 덕목이지 위정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이 말했듯이, 정치란 환자 한 명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기술이 아니라 수백만의 목숨을 좌우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고 해서 이기지 못할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술(craft)예술(art)차이를 착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자존심은 실상 중화세계에 대한 비굴한 존경심과 비중화세계에 대한 오만한 경멸감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 참된 기개라 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우선 16364월에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으로 바꿔 중원 정복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그래서 나중에 그의 묘호도 중국식의 태종太宗이 되니까 이때부터는 그를 청 태종이라 불러도 되겠다). 스케줄이 확실히 잡힌 만큼 후방을 다지는 일은 9년 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일단 그가 취한 조치는 외교의 형식이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그러나 그도 예상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 리 없다. 드디어 그 해 12월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략에 나서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전쟁의 양상은 9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불과 보름 만에 청군은 평양을 거쳐 개성 부근까지 내려왔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또 다시 도대체 뭘 믿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 가지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정부의 무능함을 익히 알고 있는 백성들이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샀다는 점이다.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백성들보다 더 잽싸게 짐을 꾸리는 한편, 지방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수도로 황급히 불러들였다. 강화도로 피난하는 동안 시간을 끌자는 전략이다. 그러나 왕실의 부녀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仁祖)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와 함께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 한밤중에 급보가 전해졌다. 청군이 이미 홍제원(弘濟院)까지 들어왔으며,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서 강화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는 것이다홍제원은 말하자면 국립 호텔 격인데,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여기서 무악재만 넘으면 바로 영은문과 모화관이다. 위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홍제원은 주로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올 때 들러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곳이었다. 참고로, 서대문에서 홍제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금도 의주로(義州路)라고 부르는데,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도로가 멀리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의 의주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 도로는 정치ㆍ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가 의주로 도망칠 때도,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군이 남침할 때도 이 도로를 이용했으니까.

 

결국 인조(仁祖)와 조정 대신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방에서 오는 군대도 자연히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면서 이곳은 조선의 임시 수도가 되었는데, 일찍이 옛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이래 무려 1300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피난처였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1만 명 넘게 불어난 성의 수비대를 감안할 때 비축 식량으로는 두 달을 채 버틸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청 태종은 굳이 성을 공략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20만으로 늘어난 군대로 성을 포위한 채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선군을 경기도 일대에서 차단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산성 내의 임시정부에서는 뻔한 결론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항복하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는데도 항복과 항전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승산이 제로인데도 청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대부들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주의자인 최명길을 비롯해서 다수는 주화론의 입장이고, 이른바 청서파(淸西派,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들)의 보스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등 노장 세력은 주전론자다. 주화론을 취할 바에야 애초에 왜 전란의 빌미를 만들었을까? 또 주전론을 주장할 바에야 왜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까지 기어들어갔을까?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라면 전란이 있기 전에 진작 합의할 일이지 왜 이제 와서 그런 논쟁을 벌일까?

 

 

 

 

어이없고 무의미한 그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강화도에서 들려온 소식이다. 일단 강화도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왕족과 관료들은 그곳이 남한산성보다 훨씬 안전할 것으로 믿었다아마 그들은 400년 전 몽골 지배기에도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30년이나 버티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침략군의 의지가 그때와는 달랐던 것이다. 당시 몽골군은 이미 중국 대륙을 정복한 마당에 굳이 고려 정부를 끝까지 핍박할 필요와 의지가 없었다(일설에 전하는 바처럼 몽골군이 뱃길에 약해 강화도를 공격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일본 정벌에서도 보듯이 그들은 현해탄도 건넜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을 공략하면서 바다처럼 넓은 큰 강들을 건넌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청군은 한시바삐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야만 중국 정복에 나설 수 있었기에 그보다는 다급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너편 해변에서 쏘는 청군의 대포알이 바다 건너 강화도 해변까지 날아오자 그들은 잔뜩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해변에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되니 청군이 배를 타고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한산성에서 논쟁이 주화론으로 정리되어 갈 무렵인 16371월 하순 드디어 청군은 배로 인천 앞바다를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仁祖)의 빈궁들이 서둘러 원손(元孫, 왕세자의 맏아들)을 내시들에게 맡겨 배 편을 통해 충청도 당진으로 떠나게 하자 곧 청군이 들이닥쳤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는 남한산성 임시정부의 행보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주전론을 굽히지 않던 김상헌과 정온(鄭蘊, 1569~1641)은 자살하려다 실패했고(청 태종이 주전론자들을 보내라고 했으므로 그들은 어차피 적에게 끌려갈 운명이었다), 나라보다 가족들 걱정이 먼저인 인조는 적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고 항복을 결정했다. 1637130인조(仁祖)가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 현재 서울의 송파구 삼전동)에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림으로써 두 달 동안의 전란은 끝났다.

 

항복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와 다르지 않다.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앞으로는 청에게 사대하라는 것이라든가, 왕족과 조정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고 조공을 바치라는 것은 전과 똑같은 요구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고, 청이 중국을 공격할 때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조항이 정식으로 포함된 것인데, 이것은 정묘호란 이후 청 측이 줄곧 주장하던 내용이다. 결국 조선은 애초부터 청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도 쓸데없이 난리만 불러들인 격이다.

 

청 태종은 궁극적 목표였던 중국 정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모든 준비는 그의 시대에 갖추어졌다. 그가 죽고 1년 뒤인 1644년에 청나라는 드디어 장성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한다. 이로써 중국의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276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와 더불어 중화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실로 오랫동안 동북아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중화세계가 해체되었으니 이제 동북아에는 앙시앵 레짐을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한반도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동북아 전역이 새롭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한 그때 조선에서는 그 반대로 수구와 복고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세계가 멸망했다고 믿지 않고, 오히려 중화세계가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믿는다. 이제 조선은 중화세계의 막내가 아니라 맏이가 된 것이다.

 

 

국치의 기념품 무모한 항전은 결국 보람 없이 끝났다. 사진은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을 기념하는 치욕의 유물이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이 비석은 청 태종 공덕비인데, 흔히 삼전도비라고 부른다. 사실 예전에도 그런 식의 공덕비는 많았는데(관구검, 소정방, 유인원 등), 유독 삼전도비를 치욕으로 여기는 이유는 역시 중화사상 때문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남풍 뒤의 북풍

곡예의 끝

수구의 대가

중화세계의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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