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2. 악사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통과하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하라, 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2. 악사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통과하며

건방진방랑자 2022. 7. 12. 22:57
728x90
반응형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이기발은 송경운을 악사’(樂師)라 불렀다. 송경운전을 다룬 최초의 업적인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에서 박희병 교수는 이 호칭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악사의 의미를 악인(樂人)에 대한 범칭이 아니라 장악원에 속한 체아직(遞兒職, 조선시대에 설치된 특수관직)으로서 송경운의 직함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이 점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송경운이 정묘년(丁卯年, 1627) 이후 전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실 과 맞물리며 그가 장악원의 신역(身役)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삶을 구가하게 됐다는 의미부여로 이어졌다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356~359.. ‘정묘라는 간지가 1627년의 정묘호란과 그에 따른 구체적 상황을 환기하게 하는 단서로 작용한바, 자유로운 예술혼을 발휘하는 근대지향적 예술가로서 송경운의 초상은 조선후기 음악사에서 또렷한 전형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한문산문에서 연조(年條)를 나타내는 간지 표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특히 노비 신분으로 태어나 족보나 사서와 같은 공식 기록에 등재되기 어려웠던 송경운과 같은 하층민의 경우, 그런 사항을 섬실(纖悉)하게 밝혀 두는 서술자의 태도가 그의 생애를 재구하는 데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이 장에서는 역시 정묘라는 간지를 단서로 삼되, 그로써 송경운 개인의 생애 이력에 근접하고자 한다. 17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비파 연주자라는 것 외에 송경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드문데예컨대 송경운이 장악원에 소속된 악공이었으리라고 추정된 바 있지만, 역사적 정황 외의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송방송, 조선후기 장악원 관련 인물 열전(한국음악사학보 42, 한국음악사학회, 2009. 217~290)선조 이래 대한제국기까지 장악원과 관련된 인명이 수습되어 있으나 여기서도 송경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작업을 통해 그의 생몰연대라든가 인적 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려는 것이다. ‘정묘라는 간지를 포함하여, 송경운전중에서 그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들을 추출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舊爲李節度蒼頭, () 特去蒼頭籍, 遂得爲軍功司果. 예전에 이 절도의 노비였는데 특별히 노비 장부에서 벗어났고 마침내 군공으로 사과(司果) 벼슬을 얻었다.

年九歲, 學琵琶, 不勞而能, 造至極之地, 十二三, 名聞中外. 아홉 살에 비파를 배웠는데 애쓰지 않고도 잘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열두어 살에 서울과 그 근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丁卯之亂, 流寓於完山城西. 정묘년의 난리 때 전주성 서쪽으로 흘러와 우거했다.

如是者至二十餘年不懈, 以是得完山人懽心. 이렇게 (연주하기를-인용자) 20여 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아 전주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다.

言訖而逝. 時年七十有三. 유언을 마치고 서거했으니 당시 나이가 일흔셋이었다.

 

 

위에 제시된 사항 가운데 에서 송경운은 1627정묘호란 때 전주성 서쪽으로 이주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어지는 에 따르자면 그가 전주에 머무르며 보낸 여생은 20여 년이다. 또한 그의 향년이 73세라는 점이 에 적시되어 있는바, 를 아울러 참조하면 전주로 이주했던 1627년 송경운의 나이는 약 50세로 추산된다. 따라서 그는 1580년대 중, 후반에 태어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의 내용을 살펴보면, 송경운은 9살에 비파에 입문하여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2, 13세에 서울과 그 인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송경운의 청소년기에 속하는 이 시기는 1590년대 중, 후반으로 임진왜란 시기와 겹친다.

 

한편 에서는 송경운의 원래 신분이 노비였다는 점과,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면천(免賤)하여 무인(武人)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이기발은 송경운이 이씨 성을 가진 절도사(節度使)의 노비였는데 나중에 군공(軍功)을 세워 사과(司果)라는 정6품 무관직을 얻었다고 그의 신분 변화에 대해 적었다. 이 내용은 그의 청소년기가 임진왜란 시기에 걸쳐 있다는 정황과 연관되면서 송경운의 생애에 모종의 구체성을 더하게 된다.

 

주지하듯 임진왜란은 조선후기 신분제 동요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다. 전란 초기에 관군이 붕괴된 상황을 직면한 정부에서는 공사천(公私賤)이 군공을 세우면 면천의 혜택을 주는 동시에 군역에 편입시키고 천민 대상의 무과(武科)를 설치하여 군액(軍額)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전란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군공 논상(論賞) 규정이 완화 및 하향 조정된 결과, 군공을 세운 천인들은 면천은 물론 관직의 기회까지 얻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중의 군공 면천(軍功免賤)은 전례 없는 대규모의 것으로서 천인들의 신분상승에 주요한 관문이 되었다이홍두, 군공논상(軍功論賞)을 통한 조선조 천인의 신분변동, 동국사학29, 동국역사문화연구소, 1995. 7~51.. 이런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노비에서 출발하여 무관직에 이른 송경운의 신분상승은 역사적 전형성을 갖는다. 즉 송경운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신분의 질곡에서 벗어난 수많은 천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 양상을 체현한다.

 

마지막으로, 송경운의 생애에서 출발점이 되는 지점으로 소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이 절도사소유의 노비였던 점과 관련된다. ‘절도사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통칭하는 말로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2품 무관직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고위직 무관(武官)은 입전인물인 송경운에게는 물론 작가 이기발에게도 생면부지의 사람은 아니었을 터인데, 실제로 이기발의 족보를 참조하면 그의 인척 중 이 절도사에 해당되는 인물이 한 사람 보인다. 이기발의 아우 이생발(李生浡, 1609~1629)의 아내에 대해 淑人 全州李氏. 父 水使 李憺이라 적혀 있는바韓山李氏文襄公宗會, 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2, 회상사, 1995. 71. 이생발의 장인인 이담(李憺)이 전주이씨로 수사(水使) 즉 수군절도사를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이담(1567~1644)1614년 함열현감으로 있으면서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조성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승진했고조선왕조실록 1614125일조. “함열 현감 이담은 자급을 더하고, 이후 충청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조선왕조실록 1625323일조에 전 수사(水使) 이담은 본디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부정한 수법으로 정의 현감이 되었다고 하여 그가 수군절도사를 지냈다는 언급이 보인다.. 효령대군의 6대손인 그는 광해군 때 정치에 간여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탄핵을 받아 영향력을 잃었다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세보편찬위원회, 全州李氏孝寧大君靖孝公派世譜首卷, 청권사, 1983. 554~556; 조선왕조실록 1612813일조에 사간 이성(李惺)과 별좌 이담은 종실의 후예로 국가가 장차 넘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드디어 부축하여 세울 계책을 내었습니다라는 언급이 보인다. 이성은 이담의 종형제다..

 

한편 이기발은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송경운과 자신에 대해 嘗有分예전에 인연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상기한 인간관계와 조응한다. 즉 이기발에게 사돈이 되는 수군절도사 이담은, 송경운에게는 10여세 연상의 젊은 주인으로,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한 최초의 관대한 조력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이담을 통해 이기발과 송경운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점이 두 사람의 과거 인연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은 고증과 추론을 종합하면 17세기의 빼어난 비파 연주자 송경운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재구해볼 수 있다.

 

송경운은 1580년대 중, 후반 서울에서 수군절도사 이담 집안의 노비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 비파에 입문하여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2, 13세에는 서울과 그 인근에 명연주자로 알려졌다. 송경운의 10대 시절은 1590년대 중, 후반으로 임진왜란(1592~1598)의 시기와 대략 겹친다. 7년의 전쟁은 전도유망한 비파 연주자의 청소년기를 위협과 공포로 얼룩지게 한 시련의 시간이었을 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노비 청년이 면천과 무관직(武官職) 획득에 성공하여 신분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지나간 서울에서 송경운은 비파 명연주자로 활약하며 반생을 보냈다. 20년이 넘도록 그가 구가한 명성은 당시 각 분야의 일인자를 일컫던 어쩌면 이리도 송경운의 비파 같은지!”[何如宋慶雲琵琶乎]라는 유행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16271,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는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전세가 급박해지자 소현세자가 전주로 남하하여 분조(分朝)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1627121일부터 동년 326일까지 전주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조정을 소현분조’(昭顯分朝)라 한다. ‘분조’(分朝)는 전란 시에 존재했다가 전란이 종결되면 해체되는 임시 조정이다. 성당제, 정묘호란시 소현분조(昭顯分朝)와 세자의 역할-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를 중심으로, 규장각 31, 2007. 1~28.. 이 무렵 50대의 중년에 이른 송경운은 서울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전주로 이주했으며, 이 점에서 정묘호란은 그의 생애가 일대 전기를 맞게 되는 계기였다. 전주에 정착한 송경운은 50대 이후 20여 년의 여생을 전주 사람들을 위해 비파를 연주하는 데 바쳤다. 그는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대하며 정성을 다해 비파를 연주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전주에서의 후반생이 음악가로서 그를 한층 성숙하게 했음을 볼 수 있다. 비파를 연주하는 틈틈이 전주의 아전들과 교류하고 제자를 키우며 보람 있는 여생을 보내던 송경운은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자식은 두지 못했지만 그의 뒤를 이을 제자들이 상주가 되어 비파 연주로 그를 송별했다. 1640년대 후반 어느 날 새벽, 장지로 떠나는 그의 마지막을 온 전주 사람들이 나와 지켜보았다.

 

 

 

 

인용

목차 / 원문

1. 송경운전(宋慶雲傳), 선한 음악가 송경운의 전기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李起浡)

4. 결론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