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6부, 4장 참고
『열하일기』 등장인물 캐리커처
장복과 창대, 그리고 말
연암의 수행인들, 장복은 하인이고, 창대는 마두(馬頭)다.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일자무식인 데다 고지식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환상의 커플’ 중화주의가 뼛속까지 침투하여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종종 어이없는 해프닝을 저질러 연암을 질리게 한다. 갑작스럽게 열하행이 결정되면서 장복이만 연경에 남게 되자,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연암이 그걸 빌미로 ‘이별론’을 한바탕 늘어놓는다. 창대는 가는 도중 부상에, 몸살에 거의 죽을 고생을 한다. 덕분에 연암이 창대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이 고지식 커플에 비하면 말이 훨씬 더 지혜롭다. 이름은 없지만, 여행 내내 연암과 한몸이 되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호곡장론(好哭場論)」ㆍ「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등 연암의 ‘불후의 명작’들은 모두 이 말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선지 연암의 ‘말 사랑’도 지극하다. 종마법(種馬法)에 대한 지식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고, 말고기 먹은 하인을 혼찌검을 내기도 한다.
득룡이
열네 살 때부터 중국을 드나든 ‘중국통’, 중국어에 능통한 데다 처세술도 능란하기 이를 데 없어 사행단에선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중국으로 귀화할까봐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놓을 정도로 수완이 좋다. 책문을 통과할 때 청나라 사람들을 기막힌 수법으로 멋지게 속여 넘긴다. 이름하여 ‘살위봉법(殺威棒法)!’
정진사
이름은 각(珏), 연암의 동행인 가운데 하나다. 식자층이긴 하나 별로 똑똑한 구석은 없는 인물이다. 『열하일기』에 아주 많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띨띨한’ 모습으로 나온다. 연암이 벽돌론을 설파할 때, 말 위에서 졸다가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는 잠꼬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달걀을 특히 좋아해 ‘초란공’이란 별명이 붙었고, 한 점포에서 연암과 함께 「호질(虎叱)」을 베껴 쓰기도 했다. 물론 엉터리로 베껴서 연암이 다시 뜯어고쳤지만.
정사(正使) 박명원
사행단의 총지휘자, 연암의 삼종형이다. 연암 같은 무직자가 연행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형님의 빽’ 덕분이다. 근엄하면서도 결단력이 있다. 일정이 빡빡하자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행들을 재촉해 임무를 완수한다. 열하에선 판첸라마 덕분에 몇 번이나 곤경에 처한다. 연암에 대해서는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쌍림(雙林)
호행통관(護行通官), 형식적으로는 조선 사행단의 ‘보디가드’인 셈인데, 실제로는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시건방진 데다 덜떨어진 성품에 조선말도 서툴기 짝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암과 신경전을 벌인다. 이 장면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장복이는 중국말로, 쌍림은 조선말로 시시덕거리는 부분은 여지없이 ‘허무개그’의 원조다.
배생(裵生)과 그의 친구들
연암이 성경(盛京, 심양)에서 만난 장사치들 연암의 박식과 호방함에 홀딱 반해 아낌없는 정성을 베푼다. 연암 또한 그들과의 사귐에 빠져 온갖 속임수와 기지를 동원해 객관을 탈출한다. 달빛을 받으며 이들이 접선(?)하는 장면은 한편의 시트콤이다. 문자속은 연암에게 달리지만, 세상을 두루 떠돌아다닌 인물들답게 인생철학과 연륜이 만만찮다. 연암이 ‘유리창(琉璃廠)’에 가서 사기를 당할까봐 밤새워 ‘골동품 목록’을 상세히 적어주기도 한다. 「속재필담(粟齋筆談)」ㆍ「상루필담(商樓筆談)」이 그 생생한 보고서다.
왕민호
곡정이 그의 호다. 열하의 태학에서 만난 한족 선비. 뜻은 높으나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고 있다. 연암과 비슷한 처지인 셈. 연암과 의기투합하여 6일 동안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필담을 펼쳤다. 검열 때문에 필담 중간중간 종이를 먹어치우거나 태우곤 한다. 연암이 그 속내를 캐기 위해 다방면의 전략을 구사한다. 「곡정필담(鵠汀筆談)」에서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추사시(鄒舍是)
왕곡정 주변의 젊은 선비. 생긴 것도 멀쩡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속이 뒤틀려 있어 상대를 괴롭히는 게 취미다. 비분강개한 어조로 유불도를 넘나들며 궤변을 늘어놓는 광사(狂土). 연암도 그의 수법에 말려 곤경을 치른다.
판첸라마(Panchen Lama, 班禪額爾德尼)
서번(티베트)의 대보법왕, 원래는 달라이라마 다음의 2인자지만, 달라이라마 사후에 최고통치자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달라이라마에 해당하는 셈. 『열하일기』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주로 문헌과 구전을 바탕으로 묘사되어 있다. 영적 능력으로 수많은 이적을 행한다.
이 판첸라마로 인해 조선 사신단은 여러 가지 곤경에 봉착한다. 이름하여, 판첸라마 대소동! 그만큼 낯설고도 신비로운 존재였던 것. 지금의 달라이라마께서 그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강희제ㆍ옹정제·건륭제
청나라의 성군 트리오, 연암의 연행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명목으로 갔으니, 청왕조로선 절정을 구가하는 한편 노쇠의 징후가 엿보이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열하일기』에는 건륭제뿐 아니라, 강희제ㆍ옹정제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만큼 이 황제들이 남긴 치적과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건륭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비하면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하나, 총명함과 정력은 세계제국의 중심을 이끄는 황제로서 손색이 없다. 조선 사행단에 대해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사행단이 ‘판첸라마 대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몹시 실망하기도 한다.
『강희제』(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이산, 2001)와 『옹정제』(미야자키 이치사다, 차혜원 옮김, 이산, 2001)를 읽으면, 『열하일기』에 나오는 이 세 황제들에 대해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요용어 해설
기계(machine)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에 의해 정립되었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철학적으로 변용된 개념. 기계라고 하면 명령 혹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고정된 시스템을 떠올릴 테지만, 그때의 기계는 mechanism에 해당한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계, 즉 machine은 어떤 활동 내지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접속하는 짝이 달라지면 동일한 것도 다른 기계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입은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음식물)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에 ‘먹는 기계’가 되고,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는 경우에 ‘말하는 기계’가 되며, 연인의 입이나 성기와 접속하여 성적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는 경우에는 ‘섹스 기계’가 된다. 지금 이 순간 노트북과 접속하여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글쓰는 기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기계인 셈. 즉 인간과 동물, 무생물과 사이보그 사이의 경계는 없다! 근대적 주체성 및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모색을 반영하고 있는 핵심개념이다.
되기(英:becomming, 佛:devnir, 獨:werden)
간단히 말하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되기는 동물이 되는 것이고, 어린이-되기는 어린이가 되는 것이며, 여성-되기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동물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여성이 되냐고? 될 수 있다. 동물-되기란 동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동물의 신체적 감응을 획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헤비메탈 그룹의 목소리는 때때로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 순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늑대의 감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늑대-되기. 또 단거리 달리기 선수들이 전력으로 질주할 때, 그 순간 그들은 야생마 되기 혹은 치타 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어린이-되기나 여성-되기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의 흐름은 모든 것(존재자)의 원천이자 근거가 되는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에 대한 탐구였다. 이에 반해 들뢰즈/가타리는 ‘존재’가 아닌 ‘생성’을, 불변적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닌 유동적인 변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되기란 바로 이러한 생성과 변화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에서 뿌리가 아닌 리좀이 선호되고, 정착이 아닌 유목이 강조되며,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클리나멘(clinamen)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입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리좀(rhizome)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주요 개념, 간단히 말해 ‘덩이줄기’를 뜻한다. 뿌리와 다른 것은 곁뿌리나 잔뿌리들이 모이는 어떤 중심이 없다는 것. 중심이 없으니, 일정한 방향이나 도달해야 할 목적지 또한 있을 수 없다. 감자나 산더덕의 줄기를 떠올려보라. 산지 사방으로 뻗어나가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종잡을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캐내어도 어딘가에 잔뿌리가 남아 또 어디론가 뻗어나가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우발성과 역동성이야말로 리좀의 특이성이다.
봉상스(bon sens)
양식 혹은 사회적 통념을 뜻하는 용어. 영어식 표현은 good sense다. 하나의 집단 혹은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건전한 상식이라는 의미다.
아포리즘(aphorizm)
금언 격언 경구 등을 뜻하는 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따위와 같은 것. 아포리즘의 묘미는 촌철살인의 예리함과 통렬한 풍자, 유쾌한 반어 등에 있다. 한마디로 길이는 짧지만 심오한 사유를 담고 있는 문장들을 두루 아우르는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소품체(小品體)가 여기에 해당된다.
영토화 탈영토화/재영토화
영토성이란 원래 동물행동학에서 나오는 ‘텃세’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가령 호랑이나 늑대 종달새 등은 분비물이나 다른 사물들 소리 등으로 자신의 영토를 만든다(영토화), 들뢰즈/가타리는 이 개념을 변형시켜(일종의 ‘탈영토화’이다) 다른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가령 ‘탈영토화’는 기왕의 어떤 영토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경우에 대해서는 ‘재영토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사용한다. 가령 어린아이가 직립하는 것은 ‘탈영토화’되는 것이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추방되는 것도 탈영토화이다. 직립한 아이가 어떤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 도구에 손이 재영토화되는 것이고, 추방된 농민이 다른 땅에 정착하는 것은 재영토화이다.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 혹은 지배방식을 가리킨다. 말할 것도 없이 거기에는 서양우월주의의 ‘오만과 편견’이 뿌리깊이 작동하고 있다. 동양을 신비화하고 낭만적 사회로 상상하게 하는 이미지는 대개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이 유명해지면서 더욱 널리 쓰이게 된 용어다.
그와 반대로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적 시각에서 바라본 서양, 그럼으로써 왜곡된 형상으로 이미지화된 서양상(西洋像)이다. 오리엔탈리즘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뿌리깊은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
유목민(nomad)/유목적 능력
유목이란 동물을 기를 때 우리 없이 방목을 하면서 목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노마드는 유목을 삶의 조건으로 삼는 사람 혹은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으며 항상 새로운 삶의 조건들을 찾아 움직이기 때문에, 한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정착민과 대비된다. 그렇다고 유목을 단순한 이동이나 유랑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것이다. 어디서든 들러붙어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하되, 그 대상이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고 언제든 다른 존재로 변이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유목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적 삶을 위해 굳이 초원이나 사막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를 초원으로, 사막으로 만드는 것이다. 도시에서 유목하기, 앉아서 유목하기가 결코 반어가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주름(英: fold, 佛:pli)
라이프니츠의 원자론에 나오는 용어. 들뢰즈가 철학적으로 변용하여 적극 활용하였다. 예컨대 반으로 접힌 종이가 있다고 하면, 이 종이는 전체로는 한 장이지만, 면으로는 두 개인 셈이다. 이때 접혀져 있는 부분이 주름이고, 그것은 곧 이 종이가 지닌 잠재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름이 많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펼침’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클리나멘(clinamen)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주어진 관성적 운동에서 벗어나려는 성분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 가령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것은 아무리 빨리 떨어진다 해도 속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만 중력에 끌려 내려갈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유한 속도는 그 중력을 이기는 힘, 중력을 벗어나는 힘에 의해 정의된다. 중력이나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거기서 벗어나는 성분을 ‘클리나멘’이라고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탈주’가 단순한 도망이나 도주, 혹은 파괴나 해체 등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성 타성 중력 등에서 벗어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힘이라는 의미에서 클리나멘을 통해 탈주의 개념을 정의한다.
탈코드화
코드(code)는 법의 조항이나 언어 규칙처럼 규칙들의 집합을 뜻하기도 하고, 유전자 코드처럼 앞으로 펼쳐질 어떤 상태를 이미 담고 있는 정보의 집합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코드화는 일상적이고 상투화된 용법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탈코드화는 그러한 코드화된 흐름으로부터의 일탈, 다시 말해 규칙에 대한 새로운 용법을 의미한다. 하지만 탈코드화된 흐름도 동일하게 반복되다 보면 다시금 일상적인 규칙의 집합이 되어버리는데, 그런 경우를 재코드화라고 한다.
포획/포획장치
포획이란 정치경제학적으로는 초과이윤을 착취하는 방식이고, 포획장치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 메커니즘을 뜻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하면 용어보다 해설이 한술 더 뜨는 설상가상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개인들의 잠재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착취하여 이용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입시제도 같은 것이 대표적인 포획장치에 해당된다.
홈 파인 공간/매끄러운 공간
홈 파인 공간은 자동차길이나 수로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선 오직 주어진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 옆으로 ‘샐’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학교교육이나 공무원체제가 거기에 해당된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단일한 방식으로만 행동하게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거나 아니면 낙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이 홈 파인 공간의 속성이다. 그에 반해, 매끄러운 공간은 초원이나 사막처럼 홈이 없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서 사방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 아이스링크장이나 알래스카의 설원을 연상하면 된다.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
『열하일기 1, 2, 3』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 『열하일기 상, 중, 하』 리상호 옮김, 보리, 2004
『열하일기』 완역본은 ‘돌베개’ 판과 ‘보리’ 판 두 가지다. 후자는 북한판을 보리출판사에서 재출간한 것이다. 전자는 명실상부한 완역본이다. 이전에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나온 것이 있긴 했지만 한문식 고어투가 많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이 ‘돌베개’ 판은 그런 단점을 말끔히 해소한 역작이다. 꼼꼼하고 치밀한 고증으로 기존의 오역을 잡아내고 동시에 문장도 아주 깔끔하고 매끄럽다. ‘보리’판은 북한판이라 일상적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하』(개정판) 고미숙ㆍ김풍기ㆍ길진숙 옮김, 북드라망, 2013
『열하일기』를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재구성한 책, 「도강록」에서 「환연도중록」에 이르는 연암의 여정 사이사이에 「황교문답」ㆍ「환희기」ㆍ「옥갑야화」 등 연암의 명문장을 선별해 엮어 펴냈다. 18세기 말의 문화적 시각자료를 풍부하게 담았고, 본문에 대한 적절한 설명과 현대어 번역으로 누구나 『열하일기』의 진수에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한문학을 전공한 김풍기, 길진숙 선생을 꼬드겨 2003년부터 5년간 공동작업한 결과물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돌베개, 1998
연암의 둘째 아들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過庭錄)』을 평이하면서도 세련된 언어로 번역한 책. 연암의 일상, 문장론, 교유관계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는, 일종의 평전이다. 이 책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에 나오는 ‘삽화’들은 대부분 이 책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읽을수록 계속 새롭게 다가오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 연암’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태학사, 2000
연암의 산문들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헷갈린다. 알 수 없는 흡인력에 한참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띵해지는 게 태반이다. 웬만한 서구식 이론으론 ‘쨉’도 날리기 어렵다. 그래서 좋은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이 책이 그런 경우다. 연암의 산문 중 에센스만을 모아 해설을 붙였는데, 번역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지만, 각 편마다 달린 해설 또한 감동적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 같은 ‘문외한’ 이 감히 『열하일기』에 대한 책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민 선생께 깊이 감사드린다. 여기 실린 글들과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김혈조 편역, 학고재, 1997)를 함께 읽으면 연암 산문의 진수는 대략 맛볼 수 있다.
『열하일기 연구』 김명호, 창작과비평사, 1990
『열하일기』에 대한 가장 방대한 연구 성과.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열하일기』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에 해당된다. 문체에 관한 치밀한 분석 및 『열하일기』 각종 버전들에 대한 섬세한 고증, 텍스트에 대한 풍부한 해석 등, 일일이 주석을 달진 못했지만, 본문의 곳곳에 이 책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열하일기』와 문체반정’은 이 책과 「문체와 국가장치: 정조의 문체반정을 둘러싼 사건들」(강명관, 『문학과 경계』 2001년, 가을호)을 참조하였다.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이 책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홍대용 지음, 김태준 외 옮김, 돌베개, 2001
담헌 홍대용은 연암보다 여섯 살이나 위다. 뛰어난 과학자인 데다 음악, 서예 등 예술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다. 지동설, 지전설 및 『의산문답』 등으로 중세를 전복하는 사유의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양금의 탄주법(彈奏法)을 하룻밤 만에 터득하여 널리 전파하기도 했고, 풍금의 원리를 수학적 이치에 따라 파악하는 통찰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담헌그룹’이 아니라 ‘연암그룹’이라 하고, 담헌을 연암의 친구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는 걸까? 그게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꼭 읽으시라.
담헌은 연암보다 15년이나 앞서 중국을 다녀왔다. 당연히 중국 기행문인 『담헌연기(湛軒燕記)』를 남겼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글판 버전을 동시에 남겼다. 그것이 『을병연행록』(소재영 외 주해, 태학사, 1997)이다. 이게 정말 담헌의 작인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 한글로 된 저작을 남긴다는 게 그만큼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지었든 한글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기 짝이 없다. 한글판이라 만만해 보일 테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정성어린 주석과 해설에도 불구하고, 고어체가 난무하는 원문은 일반독자들에겐 한문 못지않은 ‘외국어’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한번 더 현대판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물론 전문(全文)이 워낙 방대해 군데군데 살을 좀 빼, 넉넉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책에는 담헌 홍대용의 성격 및 풍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술을 벗삼아 다닌 연암과는 달리 담헌은 술을 입에도 못 댄다. 그리고 초상화에서도 드러나듯, 연암의 카리스마 넘치는(좀 펑퍼짐하긴 하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단아하고 청초하기 이를 데 없다. 한마디로 담헌은 기질적으로 남 앞에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무리를 이끄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오히려 뒤에서 지켜보고 받쳐주는 그런 천재 (참, 드문 경우다)였던 것이다. 그렇게 기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연암과 담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절강성의 세 선비(엄성, 육비, 반정균)와 우정을 나누는 대목이다. 담헌과 ‘세 친구’는 유리창에서 만나 필담을 주고받으며 ‘천애의 지기’가 된다. 첫눈에 반해서 애틋한 정을 주고받는 장면하며, 인생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견해들을 토로하다 담헌의 지적 통찰력에 압도되는 장면 등은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사유와 감성의 결을 읽기에 충분하다. ‘짧은 만남 뒤의 긴 이별’! 이들의 우정은 이후 평생을 두고 계속되어 수많은 편지와 에피소드를 남긴다. 연암이 쓴 담헌의 묘지명도 그중 하나다.
『열하일기』와 함께 읽을 만한 여행기라면 나는 단연 이 책을 꼽을 것이다. 연암의 가장 친한 친구의 것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국경을 가로지르는 지성사의 교유라는 측면에서 단연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협객 백동수』 김영호, 푸른역사, 2002
연암의 지기들 가운데 한 사람인 백동수의 일대기다. 백동수가 무인이기 때문에 협객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이 실려 있다.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박지원 등과 특히 가까웠기 때문에 연암그룹에 관련된 자료도 꽤나 보인다. 박지원에게 연암협을 안내해주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학민사, 1996)도 번역, 출판되었다. 창검술에 대한 자세한 그림과 사진도 실려 있다. 두 책을 함께 읽으며 조선의 무예를 익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아울러 다음의 책들을 섭렵하면, 연암 시대의 사상사적 지형도가 대략 잡힐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모두 이 책들에 의거했다.
• 이옥, 『이옥전집 1,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소명출판, 2001)
• 이옥,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심경호 옮김 (태학사, 2001)
•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북드라망, 2013)
• 박제가, 『궁핍한 날의 벗』, 안대회 옮김(태학사, 2000)
• 정약용, 『뜬세상의 아름다움』, 박무영 옮김(태학사, 2001)
•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편역(창작과비평사, 1991)
• 정약용, 『다산문학선집』 / 다산논설선집』, 박석무 정해렴 편역(현대실학사, 1996)
• 이덕무, 『한서이불과 논어병풍』, 정민 편역(열림원, 2000)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 2, 3』 김용옥, 통나무, 2002
아는 사람들은 알 터이지만, 달라이라마는 내 마음의 스승이다. 영적 인도자일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일종의 화두다. 제국주의도 아니고 민족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의연하게 갈 수 있는 그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비가 한 국가의 정치이념이라는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등등,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내게는 경이에 찬 물음들이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김용옥 선생님이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정리한 것이다. 1, 2권은 인도문화 답사기쯤 될 것이고, 진짜 만남은 3권에서 이루어진다. 도올 선생 특유의 박학과 재기발랄함,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유머와 자비가 어우러져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위에다 연암과 판첸라마의 만남을 ‘오버랩’시키면 감동과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노마디즘 1, 2』 이진경, 휴머니스트, 2002
우리 연구실이 정말 ‘수유리’에 있을 때 처음 개설한 강좌가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이었다. 당시 수강생은 주로 국문학 전공자들이었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천의 고원』은 사실 한 페이지는 고사하고, 두세 줄을 연달아 읽기가 힘든 책이다. 그럴 경우, 대개 덮어버리면 그만인데, 뭔가 끌리는 게 있어 쉽게 덮어버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강사와 학생들이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사실 뭘 배웠는지는 도통 생각이 안 난다. 그냥 매번 즐거웠다는 것밖에는). 그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동숭동으로 진출했다. 와이 빌딩에 있을 때 다시 또 강좌를 열었다.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왔다. 역시 궁합이 잘 맞았다. 다시 대학로 한복판, 석마 빌딩으로 옮긴 뒤, 다시 한번 시도했다. 역시 반응이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강의록이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 책에는 연구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가? 좀 두껍다. 두 권 합해 무려 1,550페이지나 되니. 다행히도 아주 쉽고 재밌다.
유목, 유목민(노마드), 리좀, 수목, 표현기계, 배치, 계열,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등 본문에 나오는 좀 낯설고 특이한 개념들은 모두 이 책에서 배운 것이다.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고미숙, 북드라망, 2013
역설적이게도 나는 『열하일기』를 통해 다산을 만났다. ‘실학자’라는 이름으로 한통속으로 묶어놓았던 연암과 다산, 그들이 달라도 너무 다른 존재라는 반전을 보여준 것은 『열하일기』였다. 그래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말미에 이 둘을 다룬 짧은 글을 실었고, 언젠가 이들의 차이가 연출하는 ‘평행선의 지도’를 그려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임꺽정』을 만나고, 『동의보감』을 만나느라 바로 이 작업에 착수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2012년 여름, 『열하일기』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연암과 다산의 평전을 쓰겠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탄생된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평전은 지루하고 재미없다. 하여, 평전이되 평전이 아닌 책을 쓰고자 했다. 두 사람은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물과 불, 『열하일기』와 『목민심서』, 노마드와 앙가주망(engagement, 정치참여), 패러독스와 파토스 - 두 사람의 운명과 사유와 글쓰기가 갈리는 지점에서 탄생되는 사건들을 추적하다보니 전혀 예기치 못한 ‘생의 지도’가 그려졌다. 게다가 그 지도를 손에 쥐게 되자 나도 모르게 담대해졌다. 연암과 다산뿐 아니라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인물들에 대해서도 좀더 조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다산과 연암이라는 두개의 별 외에 이탁오, 이토 진사이, 스피노자, 볼테르라는 별들이 각축을 벌였던 18세기 지성사 전반을 공부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이 책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가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탄이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앞으로 2탄, 3탄도 탄생될 것이라는 의미다. 10년 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초판에서 ‘두별’의 탄생을 약속했듯이, 이제 개정신판에서 ‘두별’ 이후를 독자들께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