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박지원 - 증백영숙입기린협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박지원 - 증백영숙입기린협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

건방진방랑자 2021. 11. 13. 11:19
728x90
반응형

영숙 백동수가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걸 전송하며 쓰다

증백영숙입기린협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

 

박지원(朴趾源)

 

 

무사 백동수의 근실했던 삶

永叔將家子.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永叔工篆隸嫺掌故, 年少善騎射, 中武擧. 雖爵祿拘於時命,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而不媿其士大夫也.

 

내가 연암협에 들어갈 때 걱정해주던 영숙의 모습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永叔嘗爲我相居於金川之燕巖峽. 山深路阻, 終日行, 不逢一人.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 “彼可籬而桑也, 火葦而田, 歲可粟千石.” 試敲鐵, 因風縱火,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奮臂追之, 隔溪而還.

仍相視而笑曰: “人生不百年, 安能鬱鬱木石居食粟雉兎者爲哉?”

 

너 떠나는 게 맘 아프지만 나 자신의 상홍이 더 맘 아프기에 슬퍼하진 않네

永叔將居麒麟, 負犢而入, 長而耕之, 食無鹽豉, 沈樝梨而爲醬, 其險阻僻, 遠於燕巖, 豈可比而同之哉.

顧余徊徨岐路間, 未能決去就, 況敢止永叔之去乎?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其人行之, 可悲如此, 而却不爲之悲, 其不能去者之尤有可悲可知. 音節豪壯, 如聞擊筑. 燕巖集卷之一

 

 

 

 

 

 

해석

 

무사 백동수의 근실했던 삶

 

永叔將家子.

영숙은 장수 집안의 자식장가자(將家子): 증조부 백시구(白時耈, 1649~1722)가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ㆍ함경도ㆍ평안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일을 가리킨다. 하지만 백영숙의 조부인 백상화가 백시구의 서자였으므로 백영숙은 서얼 신분이었다. -연암을 읽는다, 223이다.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그 선조 중에 충성으로 나라에 목숨 바친 사람증조부 백시구(白時耈)가 경종(景宗) 때 벌어진 노론과 소론 간의 권력 투쟁인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죽은 일을 가리킨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인데, 병약한 데다 후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노론측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연잉군이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노론측은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경종을 비호하며 노론과 대립하고 있던 소론은 노론이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영의정을 비롯한 노론 대신(大臣) 넷이 역모죄로 사사되고, 그 외 노론측 인사 수백 명이 사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 일이 신축년(辛丑年, 1721)과 임인년(壬寅年, 1722) 사이에 일어났으므로 간지의 첫 글자를 각각 따서 신임사화라고 이른다. 신임사화 당시 백시구는 노론의 거두였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연루되었다는 자백을 강요받다가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에 노론측 인사들은 백시구가 노론의 의리를 지키다 순절했다고 평가하여 충절을 지킨 무장이라고 기렸다. -연암을 읽는다, 223~224이 있기에 지금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그를 슬퍼한다.

 

永叔工篆隸嫺掌故,

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기술이 좋고 전고(典故)를 익혔으며백동수는 무인이지만 문학에도 밝았다. 당시 서얼 출신은 비록 무과에 급제하더라도 벼슬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1772년 영조는 서얼을 중용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병조(兵曹)에서 실제 서얼을 기용한 경우는 영조가 직접 거명한 한 사람뿐이었다. 이듬해 영조는 이 일이 임금의 명령을 가볍게 여긴 것이라 하여 훈련도감의 수석 선전관이던 백동준 및 그 밖의 선전관들을 유배 보냈다. 그리고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추천된 후보자 중에서 그 자리를 채우게 하였다. 이때 백동수도 후보 명단에 올랐으나 유배 간 백동준이 재종형이었으므로 그를 대신하여 벼슬할 수는 없었다. 또 조정의 논의도 재종형제 사이의 교체는 안 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일을 겪은 후 백동수는 기린협으로 들어가게 된다. -연암을 읽는다, 224

 

年少善騎射, 中武擧.

나이가 젊어 말 타며 활쏘기를 잘해 무과에 급제했다.

 

雖爵祿拘於時命,

비록 벼슬과 녹봉이 시대의 운명에 구애되었지만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에 목숨을 바친 뜻은 넉넉히 선조의 공열을 계승할 만하니

 

而不媿其士大夫也.

사대부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내가 연암협에 들어갈 때 걱정해주던 영숙의 모습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 영숙은 어째서 집안 식구를 다 데리고 강원도의 고을로 가는 것인가?

 

永叔嘗爲我相居於金川之燕巖峽.

영숙은 일찍이 나를 위해 금천의 연암협에서 머물 곳의 지리를 봐줬었다.

 

山深路阻, 終日行, 不逢一人.

산은 깊고 길은 좁아 종일토록 걷더라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다.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

서로 갈대숲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구획지으며 말했다.

 

彼可籬而桑也,

저기는 뽕나무로 울타리 세울 만하고

 

火葦而田, 歲可粟千石.”

갈대를 태워 밭으로 만들면 한 해에 곡식이 천섬이 될 만하겠구려.”

 

試敲鐵, 因風縱火,

시험삼아 철을 쳐서 바람에 따라 불을 놓으니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꿩들이 제각각 놀라 달아갔고 작은 노루는 앞으로 달아났다.

 

奮臂追之, 隔溪而還.

팔을 휘두르며 쫓아갔다가 시내에 막혀서 돌아왔다.

 

仍相視而笑曰: “人生不百年,

이에 서로 보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의 삶이란 100년도 채 못 사는데

 

安能鬱鬱木石居食粟雉兎者爲哉?”

어째서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살면서 꿩과 토끼를 먹는 짓을 하리오?”

 

 

 

너 떠나는 게 맘 아프지만 나 자신의 상홍이 더 맘 아프기에 슬퍼하진 않네

 

永叔將居麒麟,

이제 영숙은 장차 기린협에 거처하려

 

負犢而入, 長而耕之,

송아지를 짊어지고 들어가이 말은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길이 워낙 험하여 송아지를 몰고 갈 수 없어 등에 업고서야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유곤전(劉昆傳)에 보면, 유곤이 혼란한 정국을 피해 하남(河南)의 부독산(負犢山)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보인다. 연암은 이러한 어구를 사용하여 뜻있는 사람이 때를 만나지 못해 깊은 곳에 은거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연암을 읽는다, 229키우며 농사지으려 하고

 

食無鹽豉, 沈樝梨而爲醬,

먹을 메주도 없어 아가위를 담가 장을 만든다고 한다.

 

其險阻僻, 遠於燕巖,

그곳의 험하고 좁고 궁벽함이 연암협보다도 심하니

 

豈可比而同之哉.

어찌 비교하여 같다할 수 있겠는가.

 

顧余徊徨岐路間, 未能決去就,

돌아보건대 나는 갈림길에서 배회하며 거취를 결정할 수 없는 지경인데

 

況敢止永叔之去乎?

하물며 감히 영숙의 떠남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나는 영숙의 뜻을 씩씩하다 여기기에 그 곤궁함을 슬퍼하지 않겠다.

 

其人行之, 可悲如此, 而却不爲之悲,

그 사람이 떠남에 슬퍼할 만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슬퍼하지 않았으니

 

其不能去者之尤有可悲可知.

떠날 수 없는 사람은 더욱 슬퍼할 만한 일이 있다는 알 수 있으리라.

 

音節豪壯, 聞擊筑. 燕巖集卷之一

음절이 호탕하고 웅장하여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치는 소릴 듣는 것전국 시대 말기 진() 나라에 의해 위() 나라가 멸망당하자 위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가 연() 나라로 망명을 갔다가 축() 연주를 잘하는 고점리를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형가가 연 나라 태자의 간청을 받고 진 나라 왕을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자 역수(易水)를 건너기 전에 전송객을 향해 고점리의 축 반주에 맞추어 강개한 곡조로 노래를 불렀더니, 사람들이 그에 감동하여 모두 두 눈을 부릅떴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 관()을 찌를 듯하였다고 한다. 史記86 刺客列傳만 같았다.

 

 

해설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의 산골짜기로 이주하고자 떠나는 벗 백동수(白東修, 1743~1816)를 위해 지은 증서(贈序)이다. 백동수는 자()가 영숙(永叔)이고, 호는 인재(靭齋), 야뇌(野餒) 등이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白時耈, 1649~1722)의 서자(庶子)인 백상화(白尙華)의 손자였다. 따라서 신분상 서얼에 속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오랜 낙백(落魄) 시절을 거쳐, 1789(정조 13) 장용영 초관(壯勇營哨官)이 되어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후 비인 현감(庇仁縣監)과 박천 군수(博川郡守) 등을 지냈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하다. 硏經齋全集本集 卷1 書白永叔事박제가도 기린협으로 이주하는 백동수를 위해 장문의 송서(送序)를 지어 주었다. 貞蕤閣文集1 送白永叔基麟峽序

 

 

정조가 수원화성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한 것을 그린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1214~5

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그대를 장하게 여기리

2. 서얼금고법으로 뜻을 펴지 못한 채

3. 총평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