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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시대를 앞서간 대가(위훈삭제, 기묘사화)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시대를 앞서간 대가(위훈삭제, 기묘사화)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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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앞서간 대가

 

 

현량과(賢良科)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컸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趙光祖)는 내친 김에 코너에 몰린훈구파에게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펀치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현량과를 통해 자파 인물들을 많이 등용한 데 자신감을 가진 조광조는 151910월 드디어 정국 공신들에 대한 숙청 작업에 나섰다. 아마 그 자신도 개혁의 롱런과 완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고비라 여겼겠지만, 최종 타깃이 된 공신 세력의 입장은 그보다 훨씬 비장할 수밖에 없다. 개혁 세력은 칼자루를 쥐었고 수구 세력은 칼날을 움켜쥐고 있다. 이런 형세로만 본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러나 개혁 세력은 개혁이 목표지만 수구 세력은 생존이 목표다. 씨움에 임하는 자세가 다른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사태를 반전시키게 된다.

 

일단 조광조는 선제 공격을 가해서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반정공신들 가운데 자격 미달자가 많다는 상소를 올린 게 먹혀든 것이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태조 때의 개국공신들도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공신들의 수가 너무 많다는 개혁파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체제의 성격으로 보면 조선의 건국은 고려 왕조의 연장인 데 반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조선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전환시킨 사건이었으니 공신들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그로서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는 없었다). 나아가 개혁파는 이미 6년 전에 죽은 반정의 주동자 성희안(成希顏)마저도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시했으니, 이렇게 질적으로 평가한다면 살아남을 공신은 더더욱 줄어든다. 결국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76명의 공신들이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공신전과 노비들이 몰수되었다물론 중종(中宗)은 그 자신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만큼 공신의 자질론을 앞세운 개혁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조광조(趙光祖)의 세력이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僞勳削除]하자고 주장하자 중종은 이렇게 만류했다. “공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공이라도 이미 공을 정하고서 뒤에 개정하는 것은 대단히 옳지 않은 일이오. 사리사욕의 근원은 물론 막아야겠지만 설사 그 의도가 옳더라도 일의 진행은 천천히 하는 게 좋소, 갑작스런 조치로 어떻게 그 근원을 막을 수 있겠소?” 요컨대 개혁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다. 중종(中宗)의 유약한 품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발언이기는 하지만, 아마 조광조(趙光祖)가 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의 개혁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반정공신 총수의 무려 3/4에 해당하는 인원이 고스란히 직격탄을 받았으니 이제 공신 세력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비게 마련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는 후보자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다. 공신 자격을 빼앗기고 조광조에게 소인배라는 낙인까지 찍혀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은 남곤(南袞, 1471~1527)과 심정(沈貞, 1471~1531), 홍경주(洪景舟, ?~1521)는 개혁파의 유일한 약점에 모든 승부를 걸기로 한다. 그 약점이란 바로 국왕의 존재다. 아무리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위세를 떨친다고는 하나 유교왕국의 형식을 취하는 한 사대부(士大夫)는 국왕의 아래에 있다. 개혁 세력의 모든 조치도 바로 국왕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는가?

 

 

 

 

그들의 교활한 안테나에 중종(中宗)의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조광조(趙光祖)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사실 중종은 최근 들어 개혁파의 급진성에 신물이나 있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광조는 중종에게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 수신과 치인)의 도리를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도(王道) 정치를 내세우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르면 군주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이렇게 조선의 개혁적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왕에게까지 군주의 도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황제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처음부터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조선왕조실록은 전체가 중국 황제의 연호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2층 건물조차 짓지 않을 만큼 스스로 알아서 명나라의 속국으로 처신해 왔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에서는 군주지만 황제의 책봉을 받으므로 황제에게는 신하(제후)신분이다. 황제를 받들어 모신다는 점에서는 국왕도 사대부와 같은 처지다(이것을 사대부士大夫들은 천하동례天下同體, 즉 천자 앞에서는 누구나 같다고 말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천하의 주인은 오직 천자 하나뿐이므로 사대부가 탄핵할 수 없는 것도 오로지 천자뿐이다. 사대부들의 이런 군주관은 17세기에 중국 대륙을 만주족이 정복함에 따라 중화의 천자가 사라질 때까지 지속된다.

 

조광조는 물론 플라톤을 알지 못했으나 철인(哲人) 정치야말로 성리학적 이상 세계를 지상에 구현하는 것임을 굳게 믿었다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통한다고 할까(이것을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개혁을 처음부터 충실하게 지지해 주었던 가장 중요한 후원자를 잃는 결과를 빚는다. 하기야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는 중종(中宗)이라 해도, ‘학문이 고명해지면 다른 일은 자연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것이라면서 학문의 지극한 경지에 오르도록 하라는 조광조의 말에 거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꽃은 수렁에서 피어난다지만 그것도 수렁 나름이다. 혼탁한 조선의 정계에서 조광조(趙光祖)의 고결한 개혁 정신은 더러운 배경에 잘 어울리는 3류 드라마로 전락한다. 남곤을 위시한 보수반동 삼총사는 마침 홍경주의 딸이 희빈으로 있는 것을 활용해서 저질 드라마를 궁중 무대에 올린다(하긴 원래 조선의 궁중 자체가 저질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무대다).

 

희빈 홍씨는 나라의 민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가있다며 중종의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심지어 궁중의 나뭇잎에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꿀로 써놓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기도 한다. ‘주초(走肖)’란 곧 조광조(趙光祖)의 성씨인 조()를 파자(破字)한 것이니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인데, 사실 성리학적 이념에 철두철미한 그가 왕위를 꿈꾼다는 것은 애초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에게서 마음이 떠나면서 중종(中宗)3류 관객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는 드라마를 현실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확신한 제작자들은 이윽고 결정타를 준비한다. 151911월 수구 삼총사는 조광조(趙光祖)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자기구미에 맞는 인물들만을 요직에 기용했다면서 죄를 내리라고 상소한다. 물론 현량과(賢良科)의 폐단을 겨냥한 주장인데, 중종(中宗)은 불과 몇 달 전에 그 자신이 현량과(賢良科)를 승인했으면서도 태연하게(?)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무리를 잡아들이라고 명한다. 조광조 지지파인 안당과 중도파인 정광필이 만류하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趙光祖)의 무죄를 시위했으나 이미 반동의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 개혁 주도 세력은 유배되었다가 공식에 따라 곧 사약을 받았고, 촉망받던 소장학자인 김식은 유배지에서 군신천세의(君臣千歲義), 즉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영원하다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를 짓고 자결했다. 물론 그밖에 수십 명의 옥사와 파직이 뒤따랐다. 이 해가 기묘년이기에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르지만 참 어이없고도 기묘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뛰어난 학문과 진보적 정치 감각, 게다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으면서도 개혁에 실패하고 좌초한 조광조(趙光祖)는 건국 초기의 정도전(鄭道傳)을 연상케 한다. 두 사람은 사실상 당대 조선의 리더이자 총지휘자로서 각종 개혁 조치를 입안하고 실행했으며, 조선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왕권을 넘어서지 못했다(넘어서려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면 역시 조선은 분명한 왕국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이 사대부 국가에서도 국왕은 사라지지 않고 상징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정도전과 조광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서도 왕이 될 꿈을 품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전과 조광조는 100여 년의 시차가 있는 만큼 사정도 크게 다르다. 우선 정도전은 다른 왕권(태종)에 의해 제거되었지만 조광조는 사실 왕이 아니라 반대파 사대부에 의해 타도되었다. 조선이 사대부 국가로 진일보해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또한 정도전의 꿈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광조(趙光祖)의 꿈은 불과 한 세대만 지나면 실현된다. 이 점은 그를 제거한 수구 삼총사의 말로를 보면 분명해진다. 홍경주는 얼마 뒤에 죽어 별다른 보복을 받지 않았으나, 심정은 곧 다른 사대부(士大夫)들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다가 죽음을 당했고, 영의정에까지 오른 남곤은 스스로도 죄책감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죽은 뒤에 곧바로 관직이 삭탈된 것이다. 게다가 조광조도 얼마 뒤에는 누명이 벗겨지고 나중에는 영의정으로까지 추존된다. 이렇게 보면 조광조는 비록 시대를 앞서간 대가를 치렀지만 정도전에 비하면 시대를 앞서간 폭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급진적인 글씨? 급진적 개혁가 조광조의 글씨다.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조선사회 전체를 자신의 뜻대로 도배하려 했던 조광조는 결국 실각과 죽음으로써 급행료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불과 한 세대 뒤에 실현된다. 그를 공격한 사대부(士大夫)들은 그의 덕분에 사대부 국가가 앞당겨진 데 대해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의 조건

꿈과 현실 사이

시대를 앞서간 대가

비중화세계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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