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Emotion
“더 좋은 말은 등이 곧고, 사지가 말끔하고, 목이 길고, 매부리코에다, 털이 희고, 눈이 검다. 성공하려는 결의를 지녔으나 자제력과 남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절할 줄 안다. 한마디로 정말 멋진 말이다. 이 말에게는 채찍질이 필요 없고 소리로 전하는 명령만으로 족하다. 다른 말은 등이 구부러졌고, 몸집이 지나치게 큰 데다 사지가 못났고, 목이 짧고 굵으며, 얼굴이 넓적하다. 털은 회색이 섞인 검은색이고, 눈은 충혈되어 있다. 과잉과 허식을 대표하는 말이다. 귀 주변에 털이 나 있어 소리를 잘 듣지 못하며,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해도 다스리기가 어렵다 –플라톤(Platon), 『파이드로스(Phèdre Φαῖδρος)』”
자제력을 가지고 통제에 잘 따르는 말은 이성을 상징하며, 탐욕스럽고 제멋대로인 말은 감정을 상징한다. 이렇게 감정은 처음부터 ‘못난 말’로 취급되었다.
철학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다. 플라톤은 순수이성으로 존재의 진정한 실체(이데아)를 꿰뚫어볼 수 있다고 믿었고,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이성을 종교에서 벗어난 근대 철학의 확고한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헤겔(Hegel, 1770~1831)은 절대이성이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여겼다(→절대정신), 그러나 그 철학자들도 인간에게는 이성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인간은 이성과 더불어 감정도 가지고 있다. 사실 인간에게는 이성보다 감정이 더 원초적이고 직접적이다. 먼저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그 다음에 지금 내가 왜 괴로운지를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이성의 활동이 뒤따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감정은 이성에 비해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상식적으로 이성은 객관적이지만 감정은 주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탓에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는 처음부터 인간의 감정을 믿지 않았다. 또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감정을 북돋는 예술(특히 음악)을 철저히 검열해야 한다면서 국가를 이루는 세 집단 - 지배자, 전사, 생산자 - 중에서 맨 아래층 생산자 집단의 특징이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가 지배한 중세에도 신학자 - 철학자들은 감정이 신앙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을 관장하는 정신과 감정에 이끌리는 신체의 이원론을 정립하면서 역시 감정을 이성에 비해 저열한 것으로 비하했다.
이런 뿌리 깊은 지적 전통에 균열을 낸 것은 18세기 말에 나타난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다. 프랑스혁명으로 인간의 개성이 중시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감정이 더 환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성이 거둔 빛나는 성과 - 산업혁명, 과학기술의 발전 - 에 가려 감정은 또다시 철학의 주제에서 탈락하고 만다.
감정이 철학의 진지한 주제로 복권된 것은 이성의 막강한 힘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면서부터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인 액턴(Lord Acton, 1834~1902)이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고 설파했듯이 최고의 권좌에 오른 순간부터 이성은 타락하기 시작했다. 지성과 도덕의 원천이자 전가의 보도인 줄 알았던 이성은 현란한 빛만큼이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상품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문명의 각종 이기를 낳았으나 그 그늘에서는 혹심한 착취와 경제적 불평등, 국제적 갈등이 암 세포처럼 자라났다. 급기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세계대전까지 발생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현대 철학자들의 해법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정신으로 이성의 부작용을 이성의 힘으로써 치유하자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인 감정의 힘을 되사리자는 입장이다. 전자는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복원하는 데 치중하며, 후자는 그동안 이성이 해왔던 역할을 감정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욕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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