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사이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는 훈구파의 사주를 받아 사림파를 박살낸 사건이었으나, 대형 사건들이 으레 그렇듯이 예상하지 않았던 엉뚱한 결과도 낳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림파의 새로운 리더를 길러낸 것이다. 열일곱 살 때 지방의 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으로 간 소년 조광조(趙光祖)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기연을 맺게 된다. 때마침 희천에는 무오사화로 유배된 김굉필(金宏弼)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김굉필은 그 이듬해에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나 1년 동안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배운 것은 적지 않았다. 학문과 경륜만이 아니라 장차 미래의 조선을 이끌게 될 사림파의 학맥을 얻었으니까.
친구들에게서 ‘광인(狂人)’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학문에 전념했던 조광조였으니 과거 합격은 떼어놓은 당상이다. 오히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고시에 패스하고 나서도 줄을 잘 타야만 출세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성취와 열정은 성균관에서도 곧 주목을 받는다【지금은 어느 사립 대학교의 이름으로 사용되지만 당시 성균관은 국립이었고, 오늘날의 대학교나 대학원보다도 한 급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를 오늘날 사법고시에 비유한다면 성균관은 고시 합격생들을 교육하는 사법연수원에 해당한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우선 사마시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학생 자격은 최소 연령만 15세로 정해져 있고 연령 제한은 없어 50세 이상의 학생도 있었다)】.
1510년의 사마시에서 그는 당당히 장원으로 합격했으므로 처음부터 성균관에서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수석 합격자가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차피 수석은 매번 나오게 마련, 따라서 그가 성균관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는 아마도 죽은 김굉필이 남긴 제자라는 위광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드디어 1515년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이었던 안당(安瑭, 1460~1521)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중앙 관직에 오르게 된다. 처음 배속된 부서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인 조지서(造紙署)였으니 대단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정식 과거인 문과(文科)에 합격하면서부터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사실 중종(中宗)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조정 대신들로부터 여러 차례 조광조(趙光祖)를 천거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조광조도 관직보다는 학업에 더 뜻을 두었고, 그를 ‘될성부른 싹’으로 여겼던 사람들은 초라한 관직에 임명하느니 더 공부하게 놔두자는 견해를 피력했다. 1511년 사간원의 이언호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조광조는 재주가 뛰어나지만 아직 나이 서른이 못 되어 한창 학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그의 뜻을 갑자기 빼앗아 낮은 관직에 임용한다면, 학업이 중단될 것이고 그 자신도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을 것이니, 국가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원칙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당시 조광조가 얼마나 주목받는 인재였는지 말해주는 이야기다】.
그 무렵 그가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계기가 생겨난다. 1515년 3월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조정에서는 후임 왕비의 간택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다른 경우라면 논쟁의 대상이 아니겠으나 아직 정비인 단경왕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일각에서 그녀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 군신, 상하, 예의가 있으므로 부부가 모든 질서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정 세력의 적이었던 신수근의 딸을 복위시키면 반정의 정당성이 허물어질 뿐 아니라 장차 어떤 피의 보복이 일어날지 모른다. 따라서 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은 당연히 단경왕후의 복위에 결단코 반대다.
그래서 당시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책임자)이었던 이행(李荇, 1478~1534)은 복위론을 주장한 박상(朴祥, 1474~1530)과 김정(金淨, 1486~1520)을 유배보낸다. 하지만 사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 조치에 대해 안당이 반대하고 나섰고 또 안당에 대해 권민수(權敏手, 1466~1517)가 반론을 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진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조광조(趙光祖)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쟁점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 이행(李荇)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보낸 것은 언로를 막은 큰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현대의 언론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탁월하고 논리적인 그의 지적에는 이행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입장이 공신들의 반발을 부른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당장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趙光祖)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이 장면에서 유교왕국의 독특한 현상인 왕과 사대부(士大夫)의 이중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중종(中宗)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의 주장을 더욱이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조강지처를 궁에서 내쫓을 때도, 그리고 새 왕비를 간택할 때도 별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사대부(士大夫) 세력에 휘둘렸다. 여염집 아낙네의 지위를 놓고 설전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다(그래서 박상朴祥과 김정金淨은 『주역』을 인용해가면서 부부의 도리가 으뜸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꼭두각시라 해도 엄연히 국왕이 존재하는 한 사대부(士大夫)도 국정에 대한 전권을 가지지는 못한다. 앞서 여러 정변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사대부들 간의 세력 다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조광조가 뜻을 펼치기 위해서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는 게 중요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조광조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학문적 바탕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신뢰와 자신의 학문을 토대로 그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다. 그 목표는 조선을 완전한 유교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조선은 원래 유교왕국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유학을 강조하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물론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동안에는 유학 이념이 사회와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삼촌-조카 사이인 예종(睿宗)과 성종이 자매를 비로 얻은 것, 그리고 형제간인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이 각각 신수근의 누이와 딸을 비로 얻은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조차 유교적 예법이 지켜지지 않은 게 그 점을 말해준다. 지배층에서도 유학이라고 하면 사(詞)와 장(章), 즉 시와 문장만을 숭상했을 뿐(과거의 과목도 그렇다)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처음부터 통치 철학이자 사회 철학으로 받아들인 조광조(趙光祖)는 국가의 운영에서는 물론 국왕과 사대부(士大夫),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까지 유학 이념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대부가 실권을 쥐자마자 곧이어 사회 전체를 유학으로 도배하겠다는 계획이 나왔으니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조광조는 1518년에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책임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책임자)이 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각종 개혁 조치의 시동을 걸어놓았다. 직책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 사회를 유교적으로 전면 개조하는 총지휘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격서(昭格署)가 먼저 혁파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아마 소격서에서 도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점도 마뜩치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의 일부가 소격서에 주어지는 것도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종교와 학문은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하니까 (실제로 그는 도교를 미신으로 보았다). 그래도 도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전통적인 영향력 때문에 조정 대신들의 다수는 소격서를 폐지하는 데 반대했으나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개혁 세력은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소격서는 이후 명맥만 유지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 학문 = 정치의 등식 물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학문과 정치가 일치하는 현상은 양면의 칼이다. 건강한 학문이라면 그 학문이 정치를 통해 현실에 접목될 수 있으므로 사회 발전을 가져오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불행히도 조선의 학문은 사대부(士大夫)를 제외한 모든 계층에게 유해한 유학이었으므로 ‘학문= 정치’의 등식은 독이 되고 말았다. 사진은 학문을 연구하는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조광조(趙光祖)라는 현실 정치가를 추천하기도 했던 성균관의 명륜당이다.
그러나 이번 개혁의 범위는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나,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의 예법이 일반 백성들의 가정에서까지 생활상의 원칙으로 지켜지게 된 것은 모두 이때부터다(이를테면 유교식 관혼상제라든가 과부의 재가가 금지된 것 등이 그런 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 사회에 관한 인상은 바로 그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정치와 행정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까지 겨냥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바로 향약(鄕約)의 보급이다. 1517년 조광조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조선 8도에 시행하게 함으로써 개혁의 바람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다. 향약이야 원래 중국 송나라 시대에 여씨 형제가 처음 도입한 제도지만, 300년 이상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조광조가 향약에 주목한 이유는 주희(朱熹)가 그것을 토대로 사회개혁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약은 성리학 이념을 향촌 사회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勤], 나쁜 일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이웃끼리 서로 예의로써 대하며[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향약의 4대 강령인데, 취지 자체는 좋다. 다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어야 할 도덕을 관 주도의 캠페인으로 집행하려 한 것은 다분히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하는데, 400년 뒤까지도 정부 주도의 캠페인이 먹힌다면 역사의 심각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향약은 조광조(趙光祖)가 품은 개혁의 꿈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여기까지만 봐도 조광조의 개혁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느낌은 충분하다. 사실 그는 급진성을 넘어 조급증까지 보였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은 정변 하나로 쉽게 바뀔 수 있어도 원래 문화나 생활의 영역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조선은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그가 꿈꾼 것처럼 완전한 유교왕국으로 진화하겠지만, 그 과정에 걸리는 기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짧지 않으며, 그에 따르는 진통도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지 않다. 그럼에도 조광조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대에 꿈이 현실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조광조도 자신의 개혁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점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급진적이라서 실행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반대파가 있기 때문에 급진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을 제거하면 개혁은 순조롭게 성공할 것이다. 반대파의 핵심은 어느새 새로운 ‘훈구파’가 되어 있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들이다. 그래서 조광조(趙光祖)는 다음 개혁 대상으로 그들을 낙점한다.
그렇잖아도 조광조의 거센 개혁 드라이브에 밀려 과연 누구를 위해 반정을 도모했는지를 회의하던 공신들은 예상치도 않았던 공격을 받는다. 1519년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賢良科)가 그것이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서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의 기본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사실 옳은 인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科擧制) 보다 천거제를 중시한 것은 사림파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 문헌적 근거는 『대학(大學)』에 있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수신(修身)에 철저한 인재를 뽑으려면 시험 방식의 과거를 통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언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지배 이념으로서의 유학과 철학’으로서의 유학의 차이라고 할까?). 특히 조광조(趙光祖)는 주희(朱熹)의 철학을 정리한 『소학(小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면서 관인이 되기 전에 수신부터 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니, 경전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짓는 인물을 관리로 선발하는 과거제가 그의 안중에 차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뼈가 지나치게 강하면 근육이 버텨내지 못하는 법, 아직 체력이 약한 개혁에 근육을 붙이려는 현량과(賢良科)는 결국 뼈를 부숴 버리는 결과를 빚고 만다. 추천제도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현량과를 이용해서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바 있던 박상(朴祥)과 김정(金淨)은 물론 김식(金湜, 1482~1520), 안처겸(安處謙, 1486~1521) 삼형제 등 소장파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해서 요직에 임명한다. 조광조(趙光祖)의 관점에서는 물론 나라를 위해 일할 훌륭한 인재들이며 최소한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겠지만, 훈구대신들이 보기에는 조광조가 세 불리기에 나서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야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겠으나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신용개(申用漑, 1463~1519) 등 중도의 입장에 서 있던 존경받는 원로 정승들까지 반대파로 돌아선 것은 조광조를 위해서나, 개혁을 위해서나 좋지 않다. 결국 그런 불찰이 개혁의 불발로 이어지게 된다.
▲ 유학의 생활화 향약은 마치 농촌공동체의 자치적인 도덕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광조(趙光祖)가 ‘제도’로써 시행한 데서 보듯이 실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강제적인 규율이었다 (자치하라는 것도 명령으로 집행되면 이미 자치가 아니다). 이제 유교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의 이념으로만 머물지 않고 전사회적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사진은 여씨향약을 한글로 풀이한 『여씨향약언해』인데, 말하자면 ‘15세기판 새마을운동 지침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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