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개혁의 조건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시작된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다르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士大夫)였던 만큼 중종이 개혁의 주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종의 옥새가 찍힌 각종 개혁 조치는 실상 사대부가 입안하고 시행한 것이었다(게다가 중종은 형과는 달리 성품이 유약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니 사대부의 입맛에 꼭 맞는 군주다).
연산군(燕山君)의 전제 왕정을 타도한 사대부가 꿈꾸는 조선은 국왕이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면서 사대부가 국정의 모든 부문을 관장하는 나라다. 그럴듯한 용어로 윤색하자면 사대부(士大夫) 중심의 관료제 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것이 순수한 의미의 왕국과 모순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앞서 말한 바 있다). 마침 그 꿈을 실현할 만한 현실적 조건도 좋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국정을 문란케 하고 사대부 세력을 분열시켜 왔던 훈구파가 사라졌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세조(世祖)의 집권을 도왔다는 공로 하나만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50년 동안 버텨온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 약발은 완전히 떨어졌고, 연산군(燕山君)의 폐위와 함께 그들의 실체마저 거의 사라졌다. 사실 그들이 기득권만 지니지 않았다면 훈구파는 애초에 사림파의 상대가 아니었다. 학문으로 보나, 도덕으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나라를 운영할 실력은 사림파에게 있었다. 사필귀정! 아무리 우회로를 거칠지언정 결국 모든 일은 본래의 궤도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정도전(鄭道傳)이 조선을 건국할 때 품었던 꿈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졌다고 할까?
사대부의 꼭두각시로서 중종(中宗)이 맨처음에 한 일은 반정의 마무리 작업이다. 사대부의 주문에 따라 중종은 연산군(燕山君)을 강화로 유배보내고 반정을 주동한 신료들에게는 후한 포상을 내렸다【이로써 또 다시 공신이 생겨났는데, 얼마 안 가서 이 반정공신들이 종래의 훈구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결국 기득권층이 사라짐으로써 개혁의 호조건이 형성된 시기는 아주 짧았다. 실제로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시도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계승이 있을 때는 이렇게 새로 공신 세력이 생겨나는 현상을 결코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비기득권층 사대부와 대립하는 것도 필연인데, 이것이 나중에 당쟁(黨爭)의 뿌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적인 왕위계승만 이어진다면 왕권에 아무런 결함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견딜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당쟁과 사화(士禍)는 조선 사회가 유교왕국, 사대부 국가의 체제를 취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온화한 성격의 중종(中宗)은 연산군의 폐비인 신씨와 자식들만큼은 어떻게든 건져보려 애썼지만,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중종에게 폐비 신씨는 형수이자 처고모이고, 연산군의 자식들은 조카이자 처남이 된다). 폐비 신씨는 친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으나, ‘대의(大義)로써 결단해야 한다’는 중신들의 강권에 못 이겨 그는 결국 어린 조카들에게 사약을 내리고 만다. 하기야, 그는 조강지처인 단경왕후(端敬王后)마저도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궁에서 내쫓아야 했으니 조카들의 운명까지 거둘 능력은 없었다. 유배된 연산군은 그 해 11월 병에 걸려 아내인 신씨를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것으로 사실상 ‘왕국’의 시대는 끝나고 사대부(士大夫) 국가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일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역모를 꾀한 탓에 소규모 사화가 빚어지기도 했으나 새 정권은 그런 대로 무난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 이념을 다시금 강조하는 절차다. 비록 성종 때 잠시 유교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세조(世祖) 이래 50년 동안 조선은 왕국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조선은 절대왕국이 되고 사대부(士大夫)는 국왕의 완전한 관료로 전락하게 될지 모른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경연이 재개되고, 연산군(燕山君) 시대에 기능이 마비되었던 홍문관이 복구된 것은 그런 위기감의 표현이다.
원래 유교 이념이 강성해지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게 불교다. 이른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건국 이념에 따라 개국 초부터 기를 펴지 못했던 불교는 독실한 불교도였던 세조 덕분에 체면을 지킬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나마도 기대할 수 없다. 설사 국왕이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는다 해도 사대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불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종(中宗)은 불교도도 아니었으니 불교 탄압이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다. 그래서 사찰의 재건이 전국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젊은 승려들은 전에 없이 군역에 종사해야 했다. 세조(世祖)가 창건했던 원각사(圓覺寺)가 헐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로 선박을 건조한 것은 불교 탄압의 정점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인 지금 서울의 탑골공원에는 사찰이 없어지고 10층 석탑과 비석만이 남게 되었으며, 그 후로 두 번 다시 사찰은 사대문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현재 서울 안국동에 있는 조계사는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이것으로 유교 정치의 토대는 어느 정도 정비됐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세종과 성종 치세와 같은 수준을 회복한 정도에 불과하다. 정작으로 중요한 과제는 그 토대 위에 어떤 건물을 쌓을 것이냐인데, 그 작업을 위해 중종(中宗)은 1515년 서른세 살의 정치 신인을 과감히 기용한다. 그는 바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라는 인물이다.
▲ 반정의 효과 연산군(燕山君)을 제거함으로써 사대부들은 조선을 왕국에서 사대부 국가로 탈바꿈시켰으니 폭군의 존재가 그들에게 오히려 결정적인 도움을 준 셈이다. 유학 체제가 성립함에 따라 그 전까지 왕실에서 믿었던 불교는 탄압 대상이 된다. 사진에 보이는 10층 석탑과 비석만 달랑 남기고 원각사가 해체된 것도 그 일환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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