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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왕국의 시대 - 3장 군주 길들이기, 사대부의 승리(중종반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3장 군주 길들이기, 사대부의 승리(중종반정)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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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부의 승리

 

 

어쨌든간에 국왕의 총체적 공격을 받은 사대부(士大夫)는 일단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덕분에 훈구와 사림의 수뇌부가 몰락한 것은 오히려 사대부 세력이 전열을 새로 정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친 뒤 2년이 지난 1506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아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에서 좌천된 성희안(成希顔, 1461~1513)과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은 사대부의 기득권층이 물갈이된 틈을 타서 새로운 리더가 되고자 한다. 마침 성희안은 문신이고 박원종은 무신이니 역할 분담도 좋다. 이들은 화를 면한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유배자들을 움직여 세를 불리고 무사들마저 끌어모아 정권 타도 계획을 구체화한다(연산군은 유배자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그들에게 고된 노동을 시키고 감시를 붙였으므로 어차피 그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반란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D-데이로 정해진 150691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임사홍과 신수근을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데는 두려움이 없었던 연산군(燕山君)이었으나 막상 자신이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자 졸지에 겁쟁이로 변한다. 하긴, 승지들조차 살려달라는 왕의 호소를 버리고 도망치는 판에 그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쿠데타 세력은 이미 거사의 성공을 예감하고 진성대군 이역을 다음 왕으로 정해둔 터였다(그는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서열에도 맞는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44)이므로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른다이 사건에서는 재미있는 행적을 보인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신수근이다. 그는 비록 연산군에 협력했고 사화의 주범이기는 하지만 진성대군의 장인이었으므로 처신만 잘했다면 새 정권에 합류하거나 적어도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쿠데타 세력은 진성대군을 왕위 후보로 낙점하면서 먼저 신수근에게 합류를 권했으나 거부당했다. 결국 그로서는 막판까지도 눈이 어두웠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또한 반정 세력이 회유한 인물들 가운데는 유자광이 있었다. 성희안과 안면이 있고 지모가 뛰어나다는 이유 때문인데, 그 덕분에 유자광은 예종(睿宗)-성종-연산군 3대에 걸친 숱한 대형 사건에서 늘 승자의 편에서는 대단한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그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던 그는 반정 이후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결국 훈작을 모두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맹인이 되어 비참하게 죽는다.

 

이제 사대부(士大夫)는 왕권에 대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연산군(燕山君)까지의 조선 임금들 열 명 가운데 왕족에 의해서 폐위된 왕은 있어도(단종의 경우) 사대부에 의해 실각한 왕은 없었다. 정도전(鄭道傳) 이래로 끊임없이 왕권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바꿔 말하면 유교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조선의 사대부는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이제 조선은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된 것이다.

 

 

물론 연산군(燕山君)이 결함투성이의 폭군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군주가 폭군일 경우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폭군의 대명사라 할 옛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의 경우에서 보듯이(종횡무진 서양사, 뿌리 24장 참조), 또 숱한 권력다툼과 암살로 황궁이 조용할 날이 없었던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의 경우에서 보듯이(종횡무진 동로마사참조), 중국 고대의 유명한 폭군인 은나라 주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폭군이 타도되면 반란 세력의 리더가 새 왕이 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왕조 자체가 바뀌거나, 아니면 적어도 왕계의 혈통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조선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주 색다르다. 쿠데타를 주도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는 자기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하지 않고 기존의 이씨 왕실에서, 그것도 타도된 군주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삼은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우선은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게 유교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사대부 국가는 공화정이 아니라 엄연한 왕정이다. 그런데 유교왕국에서 왕이란 혈통이 고정되어 있고 세습되는 존재다. 따라서 아무리 사대부의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왕위 세습 자체를 무시하면 안 된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왕조 자체가 바뀌어야만 하는데, 고려-조선의 교체가 그랬듯이 원래 역성(易姓)이란 대단히 큰 사건이다이 점이 서양식 왕국과의 가장 큰 차이. 물론 서양식 왕국에서도 왕위의 세습은 있다. 예컨대 영국의 플랜태저넷, 튜더 왕조, 프랑스의 카페, 발루아 왕조 등은 모두 세습 왕조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들과 달리 서양의 경우에는 왕조의 교체가 별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저 왕조의 마지막 왕에게 직계 후사가 없으면 방계 혈통으로 왕조가 바뀌는 것뿐이다(후사가 자주 끊어진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법 때문에 국왕이 동양의 왕들처럼 많은 후궁들을 거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수백 년씩 지속되는 동양의 왕조들에 비해 서양 왕조들의 수명이 짧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사대부(士大夫)들은 비록 연산군을 타도했으나 조선 왕조 자체는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쿠데타는, ‘반정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실종된 정의를 되찾은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왕실 자체를 타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권 자체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이 오직 연산군(燕山君)만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한 것이라면, 비록 지금은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향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폭군이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만약 또 다시 사화(士禍) 같은 일을 걱정해야 한다면 아무리 유교 이념에 충실한 사대부라 해도 왕조 교체를 결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반정 세력이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옹립한 것은 앞으로 왕권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종은 그들의 꼭두각시라는 이야기다. 사실 중종은 그들덕분에 팔자에 없던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꼭두각시에도 만족해야겠지만.

 

 

부부의 소원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燕山君) 묘다. 그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해(1506) 11월에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아내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과연 그가 죽고 나서 소원은 이루어졌다. 신씨가 중종에게 건의해서 연산군묘를 강화도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장한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두 개의 봉분은 그들 부부의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폭탄을 품은 왕

연속되는 사화

사대부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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