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Status
기원전 1세기에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16세기에 조선의 임꺽정(林巪正, ?~1562)은 산적 두목이 되어 지주와 부호들의 재산을 빼앗고 의적 활동을 벌였다. 당대에 그들은 능지처참할 반역자였으나 후대에는 신분 해방을 꿈꾼 선각자로 찬양을 받았다. 실제로 그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에서 봉기한 것인지, 아니면 무질서가 판치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틈타 들고 일어난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과거의 신분제도는 과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억압적이었을까?
당연시된 것은 언제나 익숙하다. 진짜 편안한 옷은 마치 입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신분제도는 아마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굴레와 속박이라기보다는 당연시된 삶의 조건으로 여겨졌을 터다. 지금 우리는 이따금 역사 드라마에서 신분의 차이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옛날의 연인들을 보고 공감하지만, 정작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백안시(白眼視)했을 가능성이 크다. 양반 주인집의 따님을 사모하는 머슴 삼돌이를 더 거세게 비난한 것은 양반층보다 오히려 삼돌이와 같은 상민이나 천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근대적 자유의 이념이 출현하기 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은 사회 질서를 이루는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신분이 형성되고 기능하는 방식에서 동양과 서양은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일찍부터 국가 체제를 이룬 동양의 경우 신분은 정치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사대부(士大夫)는 중국 고대의 관료 집단에서 생겨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반도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했으며, 특히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층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이에 비해 서양의 역사에서는 정치적 의미보다 사회적 역할에 따라 신분이 탄생했다. 일찍이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국가를 이루는 세 신분을 지배자, 전사, 생산자로 구분했는데, 이는 고대부터 사회적 역할이 신분을 규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고대 사회의 노예주와 노예, 중세의 영주와 농노는 정치적 지배 관계보다 경제적 예속 관계의 의미가 강했다. 한 예로,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부리는 권리와 동시에 노예를 먹여 살릴 의무가 있었다. 흉년이 들면 노예는 자연히 신분이 해방되어 형편이 좋은 다른 마을로 옮겨 노예로 살아가는 경우도 잦았다.
플라톤이 말한 세 신분은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도입되면서 생겨난 성직자와 더불어 서양 사회의 기본 신분이 되었다. 그래서 중세 서양 사회의 신분 질서는 지배층의 세 신분, 즉 기도하는 자(성직자), 지배하는 자(영주), 싸우는 자(기사)와 피지배층인 일하는 자(농노)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시민의 신분이 지배층에 새로이 편입되기 시작했다. 초기 의회인 영국의 모범의회와 프랑스의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시민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리하여 공화정 시대의 고대 로마에 이어 수천 년 만에 평민이 다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은 시대였다. 국가의 경제력을 담당한 시민층은 근대 국민국가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더 정치적 발언권이 커졌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선거를 통해 지배층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마저 확보했다.
물론 현대에도 신분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신분제가 남아 있는 사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스파르타쿠스와 임꺽정의 꿈이 이루어진 것일까? 설령 그들이 인간 해방을 꿈꾸었다고 가정해도 현대 사회와 같은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는 신분제를 통해 억압과 착취가 가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현대에는 비록 정치적·법적으로는 신분이 사라졌어도 더 교묘하고 섬세한 신분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세습되지 않지만 재력은 상속이라는 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세습된다. 또한 사실상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 엘리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인 교육과 문화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아비튀스), 이른바 일류 대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 가운데 경제 엘리트의 자녀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상이나, 사회적 상류층이 자기들끼리 통혼해 혼맥을 구축하는 현상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런 구조적인 불평등이 근절되지 않는 한 스파르타쿠스와 임꺽정의 꿈은 아직 멀리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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