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중화세계의 도약
사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은 시대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가 꿈꾼 성리학 이념의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최선의 선택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선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바깥에 있다. 이 세상에 조선이라는 나라 하나만 존재한다면 개혁의 범위와 스피드가 전혀 중요하지 않겠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바깥 세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혹시 조광조(趙光祖)는 그러한 시대적 조류를 인식한 탓에 개혁에서 조급증을 보인 게 아니었을까?
우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4세기 말부터 유럽 사회는 후대에 르네상스라고 알려지게 되는 인문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기풍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는 에스파냐가 오랜 이슬람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유럽 세계의 막내로 동참하면서 대서양 항해에 나섰다【참고로, 당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과 중국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출발시킨 정화의 남해원정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남해원정이 30년쯤 빠르다. 그러나 남해원정은 중국에 새 왕조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주변 세계에 알림으로써 신흥국의 안정을 꾀하는 게 목적이었던 반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향료 무역로를 찾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성격은 서로 정반대였다. 남해원정이 전형적인 정부 주도의 전시적 행사였다면, 서유럽의 대항해는 민간 주도의 실속있는 탐험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원정을 보냈지만, 서유럽은 세상을 알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이러한 진취성의 차이는 이후 동서양 역사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서유럽의 중심부에서는 종교개혁의 물결이 크게 일어나면서 유럽 세계는 오랜 중세를 끝내고 근대의 문턱으로 접어든다.
하지만 그런 변화보다도 당장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 즉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다. 우선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15세기 초반 중국과 한반도에서 신흥국 명나라와 조선이 체제 안정을 위해 애쓰고 있던 무렵 일본도 심한 진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세계와는 달리 일본의 진통은 통일을 위한 몸살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가마쿠라 정권의 뒤를 이은 무로마치 바쿠후가 약화되면서 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을 계기로 일본 전역은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중앙권력이 유명무실해지자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부르는 전국 각지의 봉건 영주들이 각기 자신들의 사병 조직을 가지고 권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앞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세기에 중국과의 정식 국교를 단절한 이래로 한반도와 달리 독자적인 역사를 걸어왔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중국에 비해 훨씬 좁지만 나름대로 독립적인 천하 관에 입각한 역사를 전개하는데, 영주들의 내전은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천황과 공가(公家, 중앙 귀족)의 전통적인 질서와 서열이 무너지고 칼 가진 자,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사무라이의 시대답게 일본 역사에서는 그것을 ‘하극상의 시대’라고 부른다【하지만 이 시기에도 천황은 여전히 존속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치 사대부(士大夫) 국가 시대의 조선 국왕이 그렇듯이, 하극상 시대에 일본 천황은 비록 실권은 갖지 못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또한 귀족과 호족, 슈고 다이묘들은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허수아비와도 같은 천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결국 조선에서 사화士禍의 형태로 나온 게 일본에서는 내전의 형태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일본 천황이 조선의 국왕과 다른 점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지 않으므로 ‘일본 천하’의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치가 완전히 실종됐으니 왜구가 전성기를 맞게 되는 건 당연하다. 앞서 보았듯 조선에서는 1426년 세종의 치세에 3포를 개항해서 왜구를 회유한 바 있으나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왜구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심지어 일본 열도의 서해안 지방에서는 실력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왜구로 나서서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을 노략질할 정도였다. 이른바 3포 왜란이 일어난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1510년 4월 쓰시마의 지배 세력이 5천 병력을 이끌고 3포를 침략해 관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태는 곧 어렵지 않게 진압됐으나 그로 인해 잠시 일본과의 무역이 금지되었다가 2년 뒤 허가량을 대폭 줄여 무역을 재개했다. 하지만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늘어가면서 조직화된다. 사실 그 무렵 조선 정부는 수십 년 뒤에 닥쳐올 왜구의 총공세(임진왜란)를 예감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광조(趙光祖)의 개혁 바람과 그 후유증을 수습하는 데 여념이 없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일본 본토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 왜구가 보내는 신호 위의 그림은 왜구(오른쪽)가 명군(왼쪽)과 싸우는 모습[도쿄대 소장]. 오른쪽의 왜구들이 중국 동해안을 침략하는 그림이다. 예부터 동아시아의 해상을 돌아다니며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지대를 노략질하던 왜구들은 15세기 중반부터 일본 열도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는 장차 통일을 이루고 나서 일본이 대외 진출에 나서리라는 신호탄이었으나 조선의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은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해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또 한 가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어두웠던 것은 북방의 정세다. 일본 열도가 통일을 위한 몸살을 겪고 있던 무렵 만주에서도 역시 통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원래 만주는 중국의 영향권 바깥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역대 통일제국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밖에 없다.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만주는 다시 중국의 직접 지배권에서 벗어났다. 명나라에게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따라서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명나라의 대외 정책은 그대로 조선에게로 이어져 조선은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이른바 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 지출이 많았음은 앞서 본 바 있다).
당시 만주의 실력자는 옛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이었으므로 명나라와 조선은 이들에게 관직도 주고 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으나, 문제는 그런 교린정책이 계속 약발을 보이려면 두 나라의 국력이 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명나라와 조선이 내정에만 부심하면서 자연히 힘의 공백 지대가 되어버린 만주에는 점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다. 조만간 만주족이 큰일을 한 번 낼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명과 조선의 중화세계가 약화되고 비중화세계인 일본과 만주에서 격변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신경을 쓸 여유도 없다. 기껏해야 3포 왜란에 놀라 비변사(備邊司)라는 군사 기구를 설치하는 정도의 군제개혁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름 그대로 변방의 사태에 대비하는 기구였으니 임시변통에 불과하다(굳이 비변사의 의의를 찾자면 조선 역사상 최초로 대외를 겨냥한 정규군 조직이라는 점이다.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일임하고 있었으므로 그 전까지 정규군이라 할 만한 조직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중종(中宗)은 과거에 무학(武學)을 포함시키고 화약 무기를 개발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 부실한 국방력을 메워보려 애썼으나, 대외적 변화에 어두운 전반적 분위기 때문에 그런 노력도 별로 빛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군역을 면하게 해주는 대신 베를 받던 관행(당시 베는 현금이었다)이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는 정식 제도로 자리잡을 정도였으니, 당시 조선의 국방력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중화세계와 비중화세계 간의 오랜 서열 관계가 역전되는 격변의 시기, 그러나 중국과 한반도의 중화세계는 여전히 우물 안의 개구리로만 만족하고 있다.
▲ 사대교린의 줄타기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중화세계와 비중화세계의 접경에 있었다. 그래서 중화세계와는 사대, 비중화세계와는 교린을 대외정책의 기본 노선으로 삼았는데, 이질적인 두 세계를 제대로 매개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지도는 조선 초 두 세계를 상대로 한 어려운 줄타기 외교를 보여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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