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X. 날개 없이 나는 방법
Ⅹ. 날개 없이 나는 방법
㉮ 안회가 말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顔回曰: “吾無以進矣, 敢問其方.”
공자가 말했다. “재계[齋] 하라. 너에게 말하면, (마음을 그냥) 가지고서 한다면 쉽게 될 수 있겠느냐? 쉽다고 하는 자는 저 맑은 하늘이 마땅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仲尼曰: “齋, 吾將語若. 有心而爲之, 其易耶? 易之者, 皥天不宜.”
안회가 말했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齋)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顔回曰: “回之家貧, 唯不飮酒不茹葷者數月矣. 如此則可以爲齋乎?”
공자가 말했다. “그런 것은 제사지낼 때의 재이지, 마음의 재가 아니다.”
曰: “是祭祀之齋, 非心齋也.”
안회가 말했다. “부디 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回曰: “敢問心齋.”
공자가 대답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아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대대 관계에 부합하는) 외면만을 알 뿐이지만 기는 비어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도(道)는 오로지 빈 곳에만 깃든다. 이렇게 비움이 바로 마음의 재계니라.”
仲尼曰: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聽止於耳,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안회가 말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자의식(내면)이 실재처럼 존재했었지만, 심재를 실천하자 자의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움[虛]이라 하는 것입니까?”
顔回曰: “回之未始得使, 實自回也; 得使之也, 未始有回也, 可謂虛乎?”
㉯ 공자가 대답했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영향권)에 노닐 때, 이름 같은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받아 주거든 유세하고, 받아주지 않거든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서 너의 마음을 통일해서 부득이한 일에만 깃들면, 괜찮을 것이다. 흔적을 끊기는 쉽지만, 땅을 밟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인간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하늘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어렵다. 너는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 안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 안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夫子曰: “盡矣! 吾語若: 若能入游其樊而無感其名, 入則鳴, 不入則止. 無門無毒, 一宅而寓於不得已則幾矣. 絶迹易, 無行地難. 爲人使易以僞, 爲天使難以僞. 聞以有翼飛者矣, 未聞以無翼飛者也; 聞以有知知者矣, 未聞以無知知者也.”
1. 수양의 세계와 삶의 세계
1. 외향적 실천론과 내향적 실천론
많은 연구자들은 수양론을 서양 철학과는 구별되는 동양 철학의 고유성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옳은 주장일까? 수양(self-cultivation)이란 자신을 이러저러하게 변형시킴으로써 자신의 삶과 태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양론은, 현실적 개체에 의한 모종의 이상인격의 현실화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어떤 이론의 현실화라는 논점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수양론은 중국 철학을 세계에 대한 사변적 이해를 중시하는 서양 철학으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서양철학이 세계의 본질이나 현상적 법칙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라면, 오히려 수양론을 강조하는 중국 철학은 세계가 아닌 자기를 장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수양론은 자신의 마음을 문제로 삼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신과 세계를 연결시키고 소통시켜 주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수양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결국 변형된 마음으로 타자들과의 조화와 소통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서양철학의 실천론과 중국 철학의 수양론이 유사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천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합목적적인 활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실천은 어떤 목적에 부합되게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이든 서양이든 간에 어떤 목적이나 이념을 설정한다. 물론 이 목적이나 이념은 그것이 실현되기만 하면 주체와 타자 사이에 생겼던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서양 철학은 주로 이렇게 설정된 이념이나 목적을 타자나 외부에 가해 바꾸려 시도한다. 이와는 달리 중국 철학은 이렇게 설정된 이념이나 목적을 자신에게 가해서 자신을 변형시키려고 시도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중국 철학의 수양론이 내향적 실천론이라면, 서양 철학의 경우는 외향적 실천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양론이 중국 철학, 나아가 동양철학 일반의 고유성을 규정한다고 주장했던 연구자들은 피상적인 인상에 의한 비평에만 머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양론도 외향적 실천론과 마찬가지로 안으로 향해진 합목적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왜 동일한 합목적적 활동으로서의 실천이 중국에서는 내면으로 향해지고 서양에서는 외면으로 향해졌는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중국 철학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논의되었다면, 서양 철학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논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향적 실천론으로서의 수양론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외향적인 서양의 실천론은 동일한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을 이렇게 바꾸게 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2. 수양론은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
수양론은 기본적으로 내향적이면서 따라서 자기지시적일 수밖에 없는 실천론이다. 왜냐하면 수양의 주체와 그 대상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양론은 이런 자기지시(self-reference)의 역설을 완화하기 위해서 제3의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수양의 이념이자 목적으로 도입되는 본래적 마음 혹은 내재적 초월성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양론이 이제 모든 난점과 역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양의 이념으로서 내재적 초월성을 도입한 수양론은 동일한 마음을 세 종류의 마음으로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첫째는 수양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주체적 마음)이고, 둘째는 수양이 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마음(=현상적 마음)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수양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혹은 회복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마음(=본래적 마음), 즉 이념으로서의 마음이다. 이처럼 수양론은 세 가지로 분화된 마음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초월성=내재성이라는 도식, 즉 초월적 내재나 내재적 초월이라는 규정만큼 중국 철학의 내적 구조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초월성=내재성을 강조하는 이런 전통에서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이분화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초월성은 내재성과 결합하기 위해서 마음의 내재적 본질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이제 실현되어야 할 본질로서의 마음과 현상적인 마음으로 이분화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렇게 이분화된 틈 속에서 주체적 마음이 자리잡는다. 주체적 마음은 이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본질로서의 마음이 내는 소리(=명령)를 의식해야만 한다. 이런 깊이의 느낌 속에서 중국 철학의 복잡한 인성론(人性論)은 형이상학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란 기본적으로 높이나 깊이라는 원근법 속에서 높이 있는 것과 깊이 있는 것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선택하는 데서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월성=내재성의 도식 하에서 마음은 본래성과 비본래성으로 분열되고, 주체는 이 사이에 머물며 진동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내재적 본질로 이해된 초월성도 마음이라는 존재론적 장소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런 초월성은 결국 유아론적인 초월일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초월성=내재성이라는 도식은 왜 중국 철학 전통에서 수양론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수양론은 주체가 자신이 비본래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본래적인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이분화, 즉 본래적 마음과 비본래적 마음이란 이분적 구조는 도가(道家)ㆍ유가(儒家)ㆍ불교(佛敎)를 막론하고 중국 철학의 모든 내적 구조를 형성한다. 단지 차이는 본래적 마음=내재적 초월성)을 도가에서는 덕(德)으로, 신유학(新儒學)에서는 본성(性)으로,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으로 변주해서 말하고 있다는 데 있을 뿐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중국 철학에서는 수양론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삼원적 구조(즉 뜻을 세우는 주체적 마음, 수양되어야 할 현상적 마음, 이상적인 본래적 마음)에서 뜻을 세우는 주체적 마음에 대한 논의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중국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주체의 마음을 대상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중국 철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없었다. 왜 이러저러한 마음을 본래적 마음으로 긍정해야만 하는가? 왜 자신의 현상적 마음을 주체는 부정적으로 판단하는가? 현상적 마음과 주체의 마음의 분리는 왜 발생하는가? 바로 이 점에서 중국 철학의 수양론 일반은 독단적인 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저러한 마음을 본래적 마음으로 결단하고 나아가 이런 결단에 따라서 현상적 마음을 평가하고 조절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체의 마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결단과 노력을 기울이는 주체적 마음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수양할 수 있는 가능 근거를 선천적으로 부여받았다고 설명될 뿐이며,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인 본래적 마음도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자명한 인간의 목표이며 우리는 그런 마음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입지하게(뜻을 세우게) 되어 있는 존재일까?
3. 장자가 말하는 수양론
장자의 철학도 수양론, 즉 내향적 실천론이라는 중국 철학 일반의 성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장자의 수양론이 전제하는 마음도 이념으로서의 마음(=본래적 마음), 현상적 마음(=비본래적 마음), 주체적 마음으로 분열되어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본래적 마음이 타자와 부드럽고 유연하게 소통할 수 있는 비인칭적인 마음[心]이라고 한다면, 비본래적 마음은 ’나는 나다’라고 집착하는 인칭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장자의 수양론은 앞에서 살펴본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吾喪我]’라는 언급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수양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주체적 마음[吾]은 자신의 현상적 마음[我]이 소통에 부적절하다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그 다음에 주체적 마음은 이런 자신의 현상적 마음을 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현상적으로 고착된 마음을 잊게 되었을 때 주체의 마음[吾]은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게 된다.
이렇게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주체적 마음은 본래적인 주체적 마음일 수 있을까? 그러나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래적 마음을 소통의 마음으로 결단하고 비본래적 마음을 잊으려고 노력했던 주체적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타자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자철학이 지닌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직 주체만이 주체의 자리를 타자에게 양도할 수 있다는 역설! 주인이 스스로 손님이 되려는 역설!
장자의 수양론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타자를 위해 비우는[虛] 데 있다. 장자의 수양론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타자가 들어와도 넉넉히 쉴 수 있는 넓은 마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회복했다고 해서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방을 넓게 비워놓았지만 어떤 손님도 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이 비워 있는 집의 주인이 타자와 소통했다고 아직 말할 수 없다.
수양론적 공간에서 정립되는 타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타자 일반으로 이념으로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수양론의 경우에 생각되는 타자는 추상적으로 나의 머리 속에서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타자 일반으로 정립되는 수양론적 공간에서의 타자는 구체적인 삶의 세계 속에서 조우하는 타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왜냐 하면 삶의 세계에서 만나는 타자는 모두 단독성을 가진 구체적인 다양한 타자들, 형식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타자들일 수밖에 없다. 소통은 바로 이런 삶의 공간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수양론을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타자와의 소통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구체적인 삶의 세계 속에서 타자와 조우하고 그 타자의 단독성에 귀기울이면 되지 않았을까? 타자를 초대하기 위해서 깨끗하게 치워진 방은 그 자체로 나르시스적인 결벽증에 빠져 있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는 인칭적 자의식을 비운다는 수양이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 자체로 숭고한 목적이 아니라 타자와 적절하게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해서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수양의 세계는 반드시 삶의 세계와 통합되어야만 할 것이다.
2. ‘심재 이야기’의 두 층위
1. 심재(心齋)란?
‘심재(心齋)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과 ㉯)으로 구성된다. 우선 10 부분을 먼저 분석해보도록 하자. 심재라는 말에서 재(齋)라는 글자는 ‘재계하다’라는 의미다. 재계한다는 것은 제사 같은 것을 지낼 때 심신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의 재계한다라는 것은 음식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자가 심재(마음의 재계)를 말할 때, 그의 제자 안연은 자신은 집이 가난해서 저절로 음식을 삼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공자는 자신이 말한 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계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어서 공자는 자신이 심재라는 말로 의미했던 것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지향[志]을 전일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앞에서 살펴본 포정 이야기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포정은 처음에 모든 것이 소로 보일 정도로 소에 자신의 뜻을 집중했었다. 그리고 이어서 공자는 ‘감관으로 타자의 소리를 듣지 말고, 이어서 마음으로 타자의 소리를 듣지 말고, 기(氣)로 타자의 소리를 들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감관은 단지 자신의 역량에 맞는 것만을 듣기 때문이고, 마음은 만약 고착된 마음이라면 자신에게 초자아로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을 매개로 해서만 타자와 관계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권고하는 기로 들으라[聽之以氣]고 하는 것은 기가 바로 비인칭적인 마음이 지닌 소통 역량, 즉 신명(神明)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기란 비어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氣也者, 虛而待物者也]’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기란 기본적으로 비어 있는 마음으로 타자와 소통하는 마음의 소통 역량으로서의 심기(心氣)를 말한다. 오직 우리가 이런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을 때에만,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해진다[唯道集虛]. 이렇게 마음은 심재를 통해서 소통이 실현될 수 있는 실존적 필요조건(=虛)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비운(虛) 마음은 「제물론(齊物論)」 편에서 말한 도(道)의 상태에 있는 비인칭적 마음(=虛心)에 다름아니다. 이처럼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심재란 인칭적인 마음을 제거하고 거울과 같이 맑은 비인칭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수양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심재라는 수양 방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시 살펴보아도 좀 막연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심재라는 수양 방법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였는지는 이어지는 안연의 말로부터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자의식(내면)이 실재처럼 존재했었지만, 심재를 실천하자 자의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움[虛]이라 하는 것입니까?” 분명 안연은 심재라는 수양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안연이라는 자기의식의 동일성을 버렸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구절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면 안연은 이제 인칭적인 자의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고착된 자의식을 잃어버린[喪我] 나[吾], 자신의 단독성을 회복한[見獨] 단독자가 된 것이다.
2. 타자와의 소통은 목숨을 건 비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장자의 전언의 취지는 우리가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게 되면 저절로 타자와 소통하게 된다는 데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부분 ㉯에서 장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려는 이야기, 즉 무매개적 소통을 기술하려고 한다. 분명 ㉮부분에 따르면 안연은 이제 소통의 가능성으로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셈이다. 그런데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는 이제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지고 안연이 어떻게 타자와 소통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盡矣, 吾語若)!” 놀랍게도 장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이 해소되고 완결되었다면 장자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의미한 이야기이거나 쓸데없는 사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한 것처럼 비인칭적인 마음이란 매개 없이 타자와 직면할 수 있는 일종의 준비 상태이지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 마음이 결코 아니다. 단지 비인칭적인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 초자아나 관념에 의해 매개된 대상, 즉 풍경으로서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나, 고착된 자의식을 제거한 단독적인 내는 타자와 다시 새롭게 직면하게 된다. 공자의 입을 빌린 장자에 따르면 안연은 이제 타자와 조우해서 그 타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면 말하고 듣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여기서 포정이 매번 살과 뼈가 엉킨 곳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경우 포정은 더욱더 자신의 소통 역량을 극대화해야만 했다. 여기에서도 장자는 마찬가지로 말한다. “너의 마음을 더욱 전일하게 해서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음[不得已=타자의 타자성]에 깃들어라[一宅而寓於不得已].” 오직 자신의 비인칭적인 마음이 지닌 소통 역량으로 타자에 과감히 뛰어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사태를 매개했던 초자아나 과거의식에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안온한 완충장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자는 ‘문도 없고 언덕도 없다[無門無毒]’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문과 언덕은 모두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미리 설정된 매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런 나와 타자와의 직대면과 소통이 신비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공자의 입을 빌려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날개가 있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지만, 날개 없음으로써 난다는 것을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는 인식이 있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들어보았지만, 인식이 없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聞以有翼飛者矣, 未聞以無翼飛者也; 聞以有知知者矣, 未聞以無知知者也].” 여기서 날개 없음[無翼]과 인식이 없음[無知]은 매개가 없다는 것, 초자아가 제거되었다는 것, 따라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 지닌 소통 역량, 다름아닌 신(神)과 기(氣)의 역량 때문이다. 장자는 자신의 이런 발견이 일상인들에게 낯설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식인들에게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변론가들에게 언어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새에게 날개를 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자가 권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이처럼 편안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에 가까운 것이다.
3. 수양론적 공간에서의 타자와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
정리하자면 ‘심재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 ㉮로 표시된 부분(심재에 대한 이야기)과 ㉯로 표시된 부분(날개 없이 날기[以无翼飛]에 대한 이야기)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자가 인칭적인 자의식의 제거를 통해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수양론을 다루는 부분이라면, 후자는 이렇게 수양을 통해 달성된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을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결코 단절시켜서도 안 된다. 만약 비인칭적인 마음의 회복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필연적으로 귀결된다면, ㉯부분은 사족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장자가 심재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심재 이야기의 이런 이원적 구조는 장자가 수양론적 공간(㉮)과 삶의 공간(㉯)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두 공간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구별의 관건은 이 두 공간에 함축되어 있는 타자의 성격에 달려 있다. 수양론적 공간에서는 아직 타자가 이념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는 단독적이고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수양론적 공간에서의 타자와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전자의 타자는 타자 일반이라는 이념으로 정립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고 있지만, 후자의 타자는 단독적인 타자로서 삶에서 조우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상이한 타자의 위상 때문에 수양론적 공간과 삶의 공간, 간단히 말해 수양과 삶이 구별될 수 있다. 수양론은 어떤 구체적인 타자도 부재한 상태에서, 즉 주체가 소통에 대한 이념을 가지고 정립하는 자기 해체의 공간이다. 거울 비유를 들면 수양을 통해 정립된 비인칭적인 마음은 자신 앞에 어떤 대상도 두지 않았기에 맑은 거울 자체로 있는 거울로 비유될 수 있다. 반면 구체적인 삶의 세계는 이런 순수한 주체의 비인칭적인 상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거울이 구체적인 세계에서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여러 차례 비인칭적인 마음은 실질적 소통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강조한 바 있다. 분명히 실질적 소통을 이루는 사람은 비인칭적인 마음의 소지자, 즉 비인칭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실질적 소통이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비인칭적인 마음이 수양론적 공간에서 존립하는 반면 실질적 소통은 삶의 공간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 양자 사이의 불연속성이 간과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양과 삶 사이의 불연속성이 명확해져야, 장자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타자와 실질적으로 조우해서 소통하는 데, 즉 무매개적 소통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장자의 이런 문제의식을 무시하면, 우리는 많은 연구자들이 빠진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공간, 소통의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은 채 이루어진 중국 철학에서의 수양론이란 유아론적이고 나르시스적인 독백과 자기미화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무매개적 소통의 철학적 함축
1. 노자철학과 장자철학의 차이
노자의 철학과 장자의 철학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두 철학은 표면적으로 무척 유사하다. 그래서 장자 후학들도 『장자』를 편집할 때 노자의 철학을 자신들의 스승의 철학과 뒤죽박죽 섞고 있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런 무사유와 무반성이 아직도 우리 학계에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에서 들뢰즈는 철학을 크게 두 종류의 이미지로 분류한 바 있다. 그것은 나무(tree) 이미지와 뿌리줄기(근경, 根莖, rhizome) 이미지다. 나무가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서서 무성한 가지와 잎들을 지탱한다면, 뿌리줄기는 땅 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연결되기도 하고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기도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자의 이미지가 중심과 토대에 기초해서 작동하는 위계적인 전통 철학을 상징한다면, 후자의 이미지는 바로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서 부단히 자신을 변형시키는 새로운 철학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나무 이미지의 철학이 중심이 있는 체계(centered system)를 가지고 있다면, 뿌리줄기 이미지의 철학은 중심이 없는 체계(acentered system)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대조적인 들뢰즈의 두 이미지를 빌리자면 노자와 장자는 각각 전혀 다른 철학의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고, 즉 노자의 철학이 나무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면, 장자의 철학은 뿌리줄기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자』에 대해 가장 체계적이고 훌륭한 주석을 붙인 왕필(王弼)도 노자의 철학에서 나무 이미지를 보았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본말(本末)에 입각한 노자 해석이다. 여기서 본말은 글자 그대로 뿌리와 가지를 의미한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이상(形而上)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지는 감각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형이하(形而下)의 영역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또한 뿌리가 통일된 일자(一者)를 상징한다면, 가지는 다양하게 분기된 다자(多者)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왕필의 해석에 따르면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노자』의 구절, 즉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는 구절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한 도가 뿌리를 의미한다면, 도라고 말한 도는 가지들에 해당하니 말이다. 물론 가지들이 끝내는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지들도 분명 뿌리의 한 부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뿌리는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일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뿌리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단지 구별되는 다자들의 세계, 즉 가지들에만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 이미지에 근거한 『노자』의 철학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가지와 가지 사이의 소통은 결코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데 있다. 그것은 단지 뿌리를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가지와 가지는 소통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의 뿌리에 그 두 가지들이 동시에 기초해 있기에 이미 소통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장자의 철학은 뿌리줄기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오는 ‘도는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라는 구절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애초에 길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주체가 타자와 조우해서 그와 소통함으로써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도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런 장자의 사유는 들뢰즈가 말한 뿌리줄기 이미지라는 것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나무 자체도 원래 처음부터 자신이 있던 곳에서 그렇게 영원히 자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많은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데, 어느 씨앗은 허무하게 강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씨앗은 허무하게 아스팔트 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지금 아름드리나무로 자란 그 나무를 가능하게 했던 씨앗은 우발적으로 바로 그 땅,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뿌리를 내릴 수 있기에 충분한 바로 그 땅에 도착했던 씨앗일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씨앗은 날개 없이 날아서 그 땅에 도착했던 것이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노자의 철학에서 영원한 도가 존재하는 데 비해, 장자의 철학에서 노자식의 도란 애초에 존재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은 날개 없이 나는 것이라는 장자의 주장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2. 매개적 소통과 무매개적 소통
여기서 잠깐 장자가 날개 없이 나는 것이라고 비유했던 무매개적 소통이 전제하는 철학적 함축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자.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이 일체의 다른 외적인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무매개적 소통에 대한 주장은 소통의 결과로 매개가 그 흔적으로 출현하는 것이지, 결코 매개가 있어서 소통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무매개적 소통은 매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약을 가할 뿐이다. 무매개적 소통은 매개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깊은 반성을 토대로 제기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매개적 소통 일반은 존재론적으로 이 무매개적 소통 위에 자리잡고 있다.
특정한 매개의 출현은 특정한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무매개적 소통은 일체의 매개를 소통의 당사자인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으로부터 발생한 흔적이라고 본다. 소통이 무매개적이든지 아니면 매개적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주체 혹은 마음[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인간이 자신을 넘어서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실존적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개의 유무에 따라 마음은 다르게 현상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마음은, 매개적 소통의 경우에는 인칭적이고 고착된 마음으로 은폐되는 반면, 무매개적 소통의 경우에는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본래성을 드러내게 된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 과정에서 매개는 주체의 마음 안에서 표상(representation)의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 모든 난점들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매개적 소통에서 주체는 자신의 마음에 담겨진 매개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나아가 이 매개를 통해 세계를 혹은 타자를 분절해보기 때문이다. 결국 매개적 소통에서는 주체와 타자는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로 환원되고 매개로 규정된다. 주체와 타자가 매개로 규정되는 경우에 바로 주체화(subjectivation)와 객체화 (objectivation)가 관념적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의 비인칭적인 소통의 마음은 인칭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주체는 타자와의 소통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주체는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임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반면 무매개적 소통을 옹호하는 입장은 마음으로부터 표상적 매개를 지우려는 노력[虛ㆍ忘]을 한다. 여기서 표상적 매개를 지운다는 것은 자의식의 고착성의 근거, 즉 인칭성을 지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의 고착성을 비우고, 마음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비인칭적이고 따라서 유동적인 마음을 회복하려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랬을 때 주체와 타자는 매개로 환원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실질적 소통을 이루게 된다.
3. 두 가지 소통에서 중요한 것
무매개적 소통은 인간 주체의 반성 능력, 즉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 있는 매개를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는 역량을 긍정한다. 이 점에서 무매개적 소통은 동물적인 자극이나 반응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무매개적 소통의 경우 주체가 타자와의 무한한 소통을 통해 무한히 다양한 매개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과 반성의 역량으로 인해 마음은 타자에 민감해지게 되고, 주체는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반면 매개적 소통은 주체가 미리 형성된 매개를 독단적으로 모든 타자에 적용될 수 있는 본질이나 일반성으로 긍정함으로써 현실화된다.
결국 매개적 소통 아래에서 작동하는 주체는 스스로 직접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타자와 관계하는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주체는 항상 매개의 절대성과 타자의 고유성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매개적 소통의 입장이 ‘어떻게 주체가 미리 존재하는 매개를 파악할 것인가?’, ‘어떻게 주체가 매개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게 되어 있다면, 무매개적 소통의 입장은 ‘어떻게 매개가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왜곡하는가?’, ‘어떻게 하면 주체는 미리 설정된 매개를 제거하고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 들어간다. 결국 매개적 소통에서 중요한 것이 매개와 주체와의 관계라면, 무매개적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다.
표면적으로 매개적 소통의 입장과 무매개적 소통의 입장은 전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매개가 지닌 일반성에 대해 비판하고 회의할 때 드러나는 입장이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매개는 기본적으로 무매개적 소통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 두 입장은 내적인 논리로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장자의 입장은 매개를 그 자체로 부정하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절대화되고 실체화된 매개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인칭적이고 고착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권고하는 이상적인 마음은 비인칭적 유동성의 상태, 즉 주체화되기 이전의 비인칭성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장자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주체화 이전의 유동적 상태에만 머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장자가 주체화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자고 역설했던 이유는 새롭게 도래하는 타자에 맞게 임시적이고 단독적인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단독적인 주체는 다시 절대적 실체, 과거에 사로잡힌 의식으로 고착되고 형해화할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장자의 양행(兩行)의 논리는 바로 이런 고착화와 형해화를 막기 위해서 제안된 것이다. 즉 부단한 소통을 긍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비인칭적인 마음이 전제하는 잠재적 무한성과 무한한 타자들과 무매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현실적 무한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