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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Ⅷ. 수양과 삶의 통일 - 3. 양행(兩行)의 의미, 양행(兩行)을 통해 유지해야 할 것들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Ⅷ. 수양과 삶의 통일 - 3. 양행(兩行)의 의미, 양행(兩行)을 통해 유지해야 할 것들

건방진방랑자 2021. 7. 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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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행(兩行)을 통해 유지해야 할 것들

 

 

이 점에서 발제 원문에 등장하는 양행(兩行)이라는 논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성인(聖人)은 옳고 그름[是非]으로 사태를 조화롭게 하지만 자신은 천균(天鈞)에 머문다[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釣].” 이어서 장자는 이런 상태를 바로 양행(兩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성인이 사용하는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인칭적인 주체 형식에 입각해서 수행되는 판단, 즉 위시가 아니다. 이것은 인식을 통해 정립된 판단[爲是]이 아니라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판단, 즉 인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천균(天釣)이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자연스러운 균형, 앞에서 살펴본 도추(道樞)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무대(無待)의 마음 혹은 비인칭적인 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양행은 두 가지 방향에서의 작용 혹은 두 가지 측면에 대한 동시적 실천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한 방향에서는 인시라는 유동적인 판단을 수행하고, 다른 한 방향에서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인시를 말했던 장자가 여기서 갑자기 양행을 도입하면서 다시 비인칭적인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시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데, 여기서 다시 비인칭적 주체 형식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여기에는 장자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장자는 지금 인시만을 추구하게 되면 맹목이고, 비인칭성만을 추구하게 되면 공허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좀더 살펴보면 장자의 우려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타자에 입각해서 수행되는 판단인 인시는 분명 임시적 주체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렇게 구성된 임시적 주체 형식이 쉽게 고착된 주체 형식으로 변질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데 있다. ‘길은 누군가가 걸어갔었기 때문에 형성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 길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번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들에 맞게 자신의 임시적 주체 형식을 구성할 수 있기 위해서 비인칭적인 주체형식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양행을 통해서 삶과 수양의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제 삶의 공간은 바로 수양의 공간이고, 수양의 공간은 바로 삶의 공간이게 된 것이다.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두 가지 주체 형식을 구분하고 있고, 이 중 하나의 주체 형식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그가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 제거하려고 했던 나는 나라고 집착하는 인칭적이고 고착된 주체 형식이다. 둘째는 인간이 사회에서 산다는 불가피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임시적인 주체 형식이다. 임시적인 주체는 구체적인 사태마다 주체의 자기조정의 역량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착된 주체 형식이 모든 사태들에 대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장자가 권고하는 임시적 주체 형식은 새로운 타자가 도래할 때마다 그 타자와 소통하면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착된 주체 형식이 타자의 타자성을 배척하는 경향으로 작동한다면, 임시적 주체 형식은 타자의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경향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임시적 주체 형식의 이런 임시성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유동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기본적으로 우리가 다양한 타자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성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임시적 주체 형식의 임시성이 앞에서도 살펴본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이 갖고 있는 유동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이 구체적인 타자와 조우해서 현실화된 것이 바로 임시적 주체 형식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장자가 양행으로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양행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비인칭적 주체의 유동성과 임시적 주체의 임시성이라는 두 계기를 동시에 유지해야만 한다. 삶의 세계는 타자와의 조우와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장자의 양행은 수양과 삶의 통일을 역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유동성이 수양을 통해서 존립되어 타자를 예비하는 것이라면, 주체의 임시성은 그런 수양된 주체가 삶의 공간에서 구체적인 타자를 만나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장자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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