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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Ⅴ. 대대(待對)와 무대(無對) - 2. 대대 논리의 해체: 무대(無對), 나는 내 자신을 잃다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Ⅴ. 대대(待對)와 무대(無對) - 2. 대대 논리의 해체: 무대(無對), 나는 내 자신을 잃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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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내 자신을 잃다

 

 

대대의 논리에 의해 A-A가 동시에 소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라고 여기던 고착된 자의식이 스스로 자신을 피()라고 여겨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자피(自彼)라는 의식 속에서 시()와 피()는 겹치게 되면서, 대대의 논리는 해체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우리는 대대 논리의 해체를 무대(無待)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을 기호로 표시하면 ‘A = -A’라고 쓸 수 있다. 무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가장 먼저 나오는 남곽자기(南郭子綦)와 그 제자 안성자유(顔成子游)의 대화를 읽어보도록 하자.

 

 

남곽자기가 탁자에 의지하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보였다. 안성자유는 그 앞에 시중들면서 서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진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탁자에 기대고 앉은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고 앉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말했다. “현명하게 그것을 너는 질문하는구나, 자유야! 지금 나는 내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南郭子綦隱几而坐, 仰天而噓, 嗒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 :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几者, 非昔之隱几者也?” 子綦曰: “, 不亦善乎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안성자유에게 자신의 스승 남곽자기는 시든 나무, 꺼진 재와 같이 죽음의 이미지로 현상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남곽자기는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남곽자기는 지금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은 상태, 즉 삶= 음이라는 무대의 상태를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남곽자기는 살아있다고 규정하기도 어렵고 죽었다고도 규정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상태에 있다. 이 애매한 무대의 상태 속에서 남곽자기는 나는 내 자신을 잃었다[吾喪我]”고 술회한다. 여기서 아()는 인칭적 자아나 고착된 자의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상아(吾喪我)란 주체의 소멸이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칭성을 제거한 주체, 비인칭적인 주체를 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인칭적 자아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만약 남곽자기에게서 일체의 주체 형식이 소멸했다면,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오상아(吾喪我)라고도 술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삶 죽음을 나타내는 A=-A라는 무대(無侍)의 공식은 모순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형식논리에 따르면 어떤 것도 A라는 규정을 받는 동시에 -A라는 규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자가 제안하는 대대 관계의 해체, 즉 무대는 기존의 형식논리에 입각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의 공식으로서 A= -AA라는 규정과 -A라는 규정이 겹쳐지는 공간, 그래서 언어와 그것에 의해 작동하는 사유의 분별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형식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에게 이 공간은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선으로 보여서 결코 안주할 수 없다고 여겨지겠지만, 무대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넓고 편안해서 여유 있게 안주할 수 있는 삶의 공간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이 공간이 허()나 무위(無爲)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소통[]과 무불위(無不爲)의 공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공간은 허무주의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초월의 경지를 나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공간은 형이상학적인 사변이나 논리적인 사변의 세계가 소멸되고, 실천적인 삶의 세계가 열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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