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1부,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연암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지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최근에야 한 젊은 연암연구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듣고 보니 참 신기했다. 아니, 그 사실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나를 포함하여)이 더 이상했다. 이런 대가한테 묘지명이 없다니. 권력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용한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명망에 질려 감히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원인이 뭐든 ‘묘지명의 부재 혹은 실종(?)’은 연암의 일대기 속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미스터리 목록에 추가될 항목임에 틀림없다.
주지하듯이, 연암은 묘지명의 달인이다. 그가 쓴 묘지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명문장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채로운 수사법과 느닷없는 비약은 가히 견줄 바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의 묘지명은 없다니. 생의 역설치곤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살아 있는 석치(정철조)라면, 만나서 곡을 할 수도 있고, 만나서 조문을 할 수도 있고, 만나서 꾸짖을 수도 있고, 만나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들이킬 수도 있어서, 벌거벗은 서로의 몸을 치고박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 하는 것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속이 뒤집어지고 어지러워, 거의 다 죽게 되어서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정말로 죽었구나! (중략)
生石癡, 可會哭可會吊, 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忘爾汝, 歐吐頭痛, 胃翻眩暈, 幾死乃已. 今石癡眞死矣.
석치 자네는 정말 죽었는가? 귓바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눈알도 이미 썩었는가?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술을 쳐서 제주(祭酒)로 드려도 정말 마시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구나.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
石癡眞死. 耳郭已爛, 眼珠已朽, 眞乃不聞不覩, 酌酒酹之, 眞乃不飮不醉.
석치 정철조에 대한 제문이다.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연암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정철조. 근데 뭐 이런 제문도 다 있나? 하긴, 또 한 대목에선 ‘세상에는 진실로 이 세상을 꿈으로 여기고 인간세상에서 유희하는 자가 있을 터이니,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진실로 한바탕 웃어젖히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여겨서,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고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갓끈이 끊어질 것이다[世固有夢幻此世, 遊戱人間, 聞石癡死, 固將大笑, 以爲歸眞,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라고 했으니, 한마디로 점입가경(혹은 설상가상?)이다. 삶과 죽음의 통념, 나아가 제문의 문법까지 뒤엎어버리는, 이 지독한 패러독스! 다른 한편 이 황당한 유머 혹은 넌센스를 통해 그의 ‘깊은 슬픔’이 사무치게 전해져온다. 제문이나 묘지명만큼 판에 박힌 것도 없다. 마치 주례사처럼 한 편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규격화된 것이 바로 이 장르이다. 그래서 연암의 문체적 전복이 가장 빛나는 영역이 이 장르라는 게 그저 우연의 소치만은 아니다.
삶이 덧없다고 했던가. 연행 이후 연암은 가까운 친지들의 연이은 죽음과 마주한다. 1781년에 정철조(鄭喆祚)가 병사했고, 이어 1783년 홍대용이 별세했다. 1787년에는 아내와 형님 박희원이, 1790년에는 연행의 기회를 주었던 삼종형 박명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들을 잃은 슬픔을 그저 형식적인 제문이나 묘지명에 담지 않았다. 생의 기쁨과 동경, 쓰라린 좌절 등이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그것들은 죽음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보고서이자, 죽음과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레퀴엠’이었다.
본격적인 ‘레퀴엠‘을 듣기 전에 가벼운 아리아 한 곡조..
我兄顔髮曾誰似 |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
每憶先君看我兄 |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 |
今日思兄何處見 |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
自將巾袂映溪行 | 두건 쓰고 옷 입고 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
연암협 시냇가에서 읊은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燕岩憶先兄]」라는 시다. 마치 동시인 듯, 민요인 듯 담백한 말투에 깊은 속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연암의 시를 읽고 두 번 울었다고 했다. 하나는 바로 이 시이고, 또 하나는 연암이 큰누이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이다.
去者丁寧留後期 | 떠나는 이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
猶令送者淚沾衣 | 보내는 이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
扁舟從此何時返 |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
送者徒然岸上歸 | 보내는 이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
이 시는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伯姉貞夫人朴氏墓誌銘]」에 실려 있다. 떠나는 이는 누이의 상여를 메고 가는 매형을, 보내는 이는 그 매형을 전송하는 연암 자신을 말한다. 연암산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潘南)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중미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孺人十六, 歸德水李宅模伯揆.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夫之先山曰‘鵶谷’, 將葬于庚坐之兆.
여기까지는 고인과 자신의 관계, 가족, 죽음, 장례에 대한 간략한 터치다. 보통 그 다음에 고인의 생애에 대한 상투적인 나열과 덕행의 예찬으로 이어지는데, 연암은 놀랍게도 상여가 떠나는 현장을 생방송처럼 중계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길이 막막하자, 어린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 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伯揆旣喪其賢室, 貧無以爲生, 挈其穉弱婢指十, 鼎鎗箱簏, 浮江入峽, 與喪俱發. 仲美曉送之斗浦舟中, 慟哭而返]’는 식으로.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그간 누이가 이 가난한 집안을 꾸리느라 겪었을 온갖 고생살이가 떠올라, 마음이 저으기 애달프다. ‘가장 아닌 가장’인 누이가 죽자 매형은 살림살이를 챙겨 산골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살림살이래야 단촐하기 이를 데 없다. 누이를 그토록 고생시킨 매형에 대한 원망이 없다면 거짓일 터, 행간 사이로 그 애환이 아련하게 전해져 온다.
그 다음, 통곡하는 연암의 얼굴에 28년 전 누이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버릇없이 드러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이 나서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嗟乎! 姊氏新嫁曉粧, 如昨日. 余時方八歲, 嬌臥馬𩥇, 效婿語口吃鄭重. 姊氏羞, 墮梳觸額, 余怒啼, 以墨和粉, 以唾漫鏡. 姊氏出玉鴨金蜂,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어린 남동생의 심술과 장난, 그것을 따스하게 받아주는 누이, 비통한 죽음 앞에서 이런 정경을 떠올리는 연암의 마음은 아직도 여덟 살 소년의 그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심술을 부리는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눈물과 웃음이 뒤엉켜 가슴이 더욱 미어진다.
그럼, 이 대목에서 하필 그 추억이 떠올랐을까? 연암의 해명은 이렇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立馬江上, 遙見丹旐翩然, 檣影逶迤, 至岸轉樹隱不可復見. 而江上遙山, 黛綠如鬟, 江光如鏡, 曉月如眉]’ 같았다고.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했노라고. 하긴 누이가 시집간 뒤에야 누이는 곤궁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느라, 동생인 연암은 연암대로 자기의 길을 가느라 분주했을 터이니, 남매가 오손도손 마주할 기회조차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의 길이 엇갈리던 ‘시집가는 날’의 추억이 가장 생생할밖에, 스물여덟 해 전의 추억을 마치 어제 일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도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죽음 앞에서 오롯이 드러내는 그 진솔함이야말로 이 글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든 비결일 것이다.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화음으로 구성된 서정적 비가(悲歌)에 속한다면, 평생의 지기 홍대용(洪大容)의 묘지명은 굵직한 터치, 낮은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홍덕보묘지명」은 여러 방식의 언표 배치가 중첩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덕보(홍대용)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사신 행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으니, 이름은 손유의(孫有義)이고 호는 용주(蓉洲)이다[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연암이 바로 전해 북경에 들어갔을 때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인물이다. 연암은 중국 가는 사람 편에 홍대용의 중국인 친구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금년 10월 23일 유시에 갑자기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 원은 통곡 중이라 정신이 혼미하여 대신 자신이 글을 올리니 부디 절강(浙江)에 두루 알려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 한이 없게 해달라고.
왜 절강인가? 이미 밝혔듯이 거기는 바로 홍대용(洪大容)의 세 친구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연암에 앞서 숙부를 따라 중국기행을 다녀왔다. 그때 유리창(琉璃廠)에서 육비, 엄성, 반정균 등을 만나 수 만 마디의 필담을 나누면서 깊은 정을 쌓았다. 짧은 만남 뒤의 긴 이별! 단 한 번의 만남이었음에도 이들의 정은 말할 수 없이 돈독하여 그간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10여 권에 달하였다.
담담하게 친구의 죽음을 전하던 연암의 필치는 이들과의 교유를 다루면서 더 한층 웅숭깊어진다. 특히 클라이맥스가 홍대용과 엄성의 기이한 인연에 대한 것이다. 홍대용은 세 선비 가운데 특히 엄성과 의기투합하여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엄성은 복건(福建)에서 병이 위독하게 되자, 홍대용이 준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절강의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다투어서 시문을 찬술했다 한다. 반정균이 그 부고를 홍대용에게 알렸고, 홍대용은 이에 제문과 향을 부쳤는데, 그것이 도착한 날이 마침 엄성이 죽은 지 3년째 되는 대상(大祥)날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면서 ‘명감(冥感)이 닿은 결과’라고 하였다. 지극히 사랑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이렇듯 연암은 그의 삶을 이 세 친구들과의 국경을 넘는 우정으로 압축한 것이다. 족보니, 관직이니, 덕행이니 하는 따위는 그저 껍데기요. 지리한 나열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일까. 어떻든 이 묘지명 또한 연암산문의 정수이자 18세기가 낳은 명문이다.
그러나 연암의 묘지명들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시대의 통념과 충돌했다. 연암의 처남이자 벗이었던 이재성(李在誠)은 연암의 큰누이 묘지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법식이 있으라! 이 작품은 옛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나,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비밀로 간직할진저[緣情爲至禮, 寫境爲眞文. 文何甞有定法哉? 此篇以古人之文讀之, 則當無異辭, 而以今人之文讀之, 故不能無疑, 願秘之巾衍].’
이건 또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참된 문장이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니! 요컨대 연암의 묘지명들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불온한’ 것이었다.
잠깐 덧붙일 사항 하나. 연암처럼 태생적으로 밝고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송곡’을 썼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나는 명랑성과 깊은 애상은 상통하는 법, 니체의 아포리즘(aphorizm)을 빌리면 산정과 심연은 하나다.
과연 그렇다. 앞서도 음미했듯이, 그의 묘지명들은 슬픔을 과장하지도 생경하게 토로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그리는 그의 목소리는 때론 경쾌하고 때론 느긋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그 여운은 깊은 울림으로 삶과 사유를 변환시킨다. 그런 역설이야말로 그의 원초적 명랑성이 지닌 저력이다. 다시 니체 식으로 말하면, ‘심해(深海)를 항해하고 돌아온 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강철 같은 명랑함’, 바로 그것이 아닐지.
높고 쓸쓸하게
연암은 쉰을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 감역,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낸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그럴 리가! 사실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더욱 쓸쓸하다. 체질에 맞지도 않는 직장생활(?)을 하고, 그 좋아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다고 그의 만년이 궁상맞은 건 결코 아니다. 가난이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비록 외부자로 떠돌았지만 마음가는 대로 살았으니 가슴속에 새삼 울울함이나 회한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쓸쓸하면서도 여유롭다. 그 시절의 주요장면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안의현감 시절 낮잠을 자다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과일, 포를 갖추어 성대한 술자리를 차리도록 하라[命於竹裏幽靜處掃地設席, 具一大壺酒魚肉菓脯, 盛備爲酒所]!”고 분부를 내린다. 평복 차림으로 몸소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올린 후 한참 앉아 있다가 서글픈 기색으로 음식을 아전과 하인들에게 나눠주었다. 한참 뒤 아들이 그 연유를 묻자, 연암은 이렇게 답한다. “접때 꿈에 한양성 서쪽의 옛친구들 몇이 날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 산수 좋은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왜 술자리를 벌여 우리를 대접하지 않는가’라고 하더구나. 꿈에서 깨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마음이 퍽 서글프더구나. 그래서 상을 차려 술을 한잔 올렸다. 그러나 이는 예법에 없는 일이고 다만 그러고 싶어서 했을 뿐이니, 어디다 할 말은 아니다[吾疇昔夢見城西舊遊幾人, 來語余曰: ‘君作宰好山水, 盍設酒飮吾輩?’ 覺而檢之, 皆已死者也. 甚愴然, 遂有一酹之擧. 然此, 無於禮, 特意設耳, 不必說].”
『과정록(過庭錄)』 4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다. 이렇듯 연암의 ‘친구 사랑’은 늘그막에도 그칠 줄 모른다. 관아 한 곳에 2층으로 된 창고를 헐어서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어 즐기면서 술친구와 글친구를 불러들여 모임을 갖곤 했다. 정조가 이 말을 듣고 당시 검서관이었던 박제가(朴齊家)에게 “박지원이 다스리는 고을에 문인들이 많이 가서 노닌다고 하는데, 너만 공무에 매여 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자 탄식하고 있었을 게다. 휴가를 내어 너도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朴某之邑, 文人多往遊, 而汝獨縻公不能往, 宜有向隅之歎. 乞暇一往, 可也]”고 했다는 말이 『과정록(過庭錄)』 2권에 나온다. 국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이 모임이 유명했던 걸까? 아니면 소소한 일까지 국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그의 행적은 늘 주목의 대상이었던 걸까?
면천군수 시절, 마침내 천주교의 불똥이 그에게까지 미친다. 당시 서학이 8도에 번졌는데, 면천군도 마찬가지였다. 연암도 처음엔 신자들을 곤장으로 다스렸지만, 형벌로 다스리면 예수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고 더더욱 뜻이 견고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작전’을 바꾼다. 그는 천주교 신자를 관아의 종으로 붙들어두고 매일 밤 업무를 파한 후 한두 명을 불러다 반복해서 깨우치고, 후회하는 것을 본 다음에야 풀어줬다고 한다. 재미삼아 말하자면, 신자들 입장에선 매맞는 것보다 더 심한 벌이 아니었을까. 날마다 똑같은 설교를, 그것도 연암처럼 기가 센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신앙으로 뜨거워진 가슴을 ‘썰렁한’ 논변으로 식혀 버리는 방편을 쓴 것이다. 어찌됐든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면천군은 피바람이 불지 않았다고 하니, 나름대로 이 작전이 주효하긴 했던가 보다. 『과정록(過庭錄)』 3권에 나온다.
당시에는 고을 원님이 하는 가장 주요한 일이 가뭄이나 기근 때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이웃 고을 관리로 있던 한 친구가 빈민구제로 고통을 호소하자, 이렇게 위문편지를 쓴다. “우리들이 하해(河海)와 같은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갑자기 부자가 되어 뜰에다 수십 개의 큰 가마솥을 늘어놓고 얼굴이 누렇게 뜬 곤궁한 동포 1천 4백여 명을 불러다가 매달 세 번씩 함께 즐기니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거외다. 세상에 이만한 즐거움이 대체 어디 있겠소? 뭣 때문에 신세를 한탄하며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이오[吾輩厚蒙天恩, 忽作富家翁, 庭列數十大鼎, 招倈一千四百餘口顑頷顚連之同胞, 月三與之湛樂, 樂莫樂兮, 何樂如之, 如之何其歎到身命, 自作苦况哉]?”라고, 짜증나는 업무를 축제의 장으로 바꿔버리는 능력! 여기서도 그의 빛나는 명랑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과정록(過庭錄)』 3권에 나온다.
고을을 다스리는 그의 통치철학은 지극히 단순명료하다. 첫째,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1백년 동안 있으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둘째, 그러나 뜻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헌신짝 버리듯 흔쾌히 그만두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머무름과 떠남에 집착과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안의현감을 그만두고 몇 년 뒤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하자, “그런 일을 하는 건 나의 본뜻을 몰라서다. 더군다나 그건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의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셔서 땅에 묻어버린 다음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고 했다. 연암다운 기질이 한껏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무튼 연암의 만년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높고 쓸쓸하게. 『과정록(過庭錄)』 2권에 나온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영조, 정조가 이끌었던 18세기는 조선사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새로운 기운이 만개했었다. 그것이 두 왕의 영도력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할 터이지만, 어쨌든 18세기는 천재들이 각축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장이었다.
19세기는 그와 달라서 모순과 갈등은 폭발하였지만 한없이 메마르고 노쇠한 징후가 두드러진다. 안동김씨 세력이 세도를 잡으면서 시파(時派)에 대한 벽파(僻派)의 공격이 시작되고,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이 벌어지면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18세기를 특이한 연대로 만드는 데 있어 연암은 독보적 위상을 점한다. 연암이 없는 18세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19세기가 되면서 연암도 생의 종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순조 즉위 후 강원도 양양부사로 승진했지만, 신흥사 중들과의 갈등 뒤에 노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그후 서울 북촌 가회방 재동의 ‘계산초당(桂山草堂)’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던 연암은 풍비(중풍)가 위중해지자, 약을 물리치고 친구들을 불러 조촐한 술상을 차려 서로 담소하게 한 다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임종을 준비한다. 연암은 1805년 69세의 나이로 마침내 생을 마감한다. 유언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것뿐.
처남 이재성이 쓴 제문이 『과정록(過庭錄)』 3권에 실려 있는데 그 제문에는 “아아, 우리 공은 / 명성은 어찌 그리 성대하며 / 비방은 어찌 그리 많이 받으셨나요? / 공의 명성을 떠받들던 자라 해서 / 공의 속을 안 건 아니며 / 공을 비방하던 자들이 / 공의 ‘겉’을 제대로 본 건 아니지요[嗚呼我公! 名一何盛, 謗一何競? 噪名者, 未必得其情; 吠謗者, 未必見其形]”라고 했다. 그렇다. 누가 그를 제대로 알았으랴. 언젠가 연암은 크게 취해 자신을 찬미하여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수소완정하야방우기, 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과 같고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와 같고,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참선하는 것은 석가와 같고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령과 같고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搏)과 같고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吾爲我似楊氏, 兼愛似墨氏, 屢空似顔氏, 尸居似老氏, 曠達似莊氏, 參禪似釋氏, 不恭似柳下惠, 飮酒似劉伶, 寄食似韓信, 善睡似陳搏,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 自比似孔明, 吾殆其聖矣乎? 但長遜曹交, 廉讓於陵, 慚愧慚愧.
약간은 장난기어린 이 취중언사는 연암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고, 가난하고, 고요히 머무르고, 술을 마시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면서, 양주도 되었다가, 안연도 되었다가 유령도 되었다가 양웅도 되었다. 그 무엇도 될 수 있었지만, 그 무엇도 아닌 존재.
연암의 바로 뒷세대 문장가인 홍길주(洪吉周)는 「독연암집(讀燕巖集)」에서 『연암집』을 읽은 소감을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수십 년 전에 한 사람이 있어, 기운은 족히 육합(六合)을 가로지를 만하고, 재주는 천고를 능가할 만하며, 글은 온갖 부류를 거꾸러뜨릴 만하였다.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내가 이미 인사를 통하였으나 미처 만나보지는 못하였고, 미처 더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내가 한스럽게 생각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중략)
數十歲之前有人焉, 氣足以橫六合, 才足以駕千古, 文足以顚倒萬類. 其在世也, 余已通人事, 然而未及見也, 然而未及與之言也. 然而吾不爲恨, 何也? (中略)
이제 내가 거울을 꺼내 지금의 나를 살펴보다가 책을 들춰 그 사람의 글을 읽으니, 그의 글은 바로 지금의 나였다. 이튿날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펼쳐 읽어보니, 그 글은 다름아닌 이튿날의 나였다. 내 얼굴은 늙어가면서 자꾸 변해가고 변하여도 그 까닭을 잊었건만, 그 글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기이하니, 내 얼굴을 따라 닮았을 뿐이다.
今余取鏡而觀今之吾, 披卷而讀其人之文, 其人之文, 卽今之吾也. 明日又取鏡而觀之, 披卷而讀之, 其文卽明日之吾也; 明年又取鏡而觀之, 披卷而讀之, 其文卽明年之吾也. 吾之容老而益變, 變而忘其故, 其文則不變. 然亦愈讀而愈異, 隨吾之容而肖焉已矣.
연암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연암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말해주는 글이다. 육합을 가로지를 만한 기운, 천고를 능가할 만한 재주, 온갖 부류를 거꾸러뜨릴 만한 글. 그에게 연암은 거대한 봉우리였을 터,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자신과 닮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는 만큼 따라서 변해가고 닮아가는 텍스트,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바로 연암이다. 연암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으리라.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열하일기』 「곡정필담(鵠汀筆談)」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