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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박지원 -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박지원 -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건방진방랑자 2021. 11. 1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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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로움만은 젊은 시절 못지 않네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박지원(朴趾源)

 

 

六月某日, 洛瑞夜訪不侫, 歸而有記. :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與廊曲賤隸相問答.” 所謂燕巖, 卽不侫金川峽居, 而人因以號之也. 不侫眷屬, 時在廣陵. 不侫素肥苦暑, 且患草樹蒸鬱, 夏夜蚊蠅, 水田蛙鳴, 晝夜不息以故, 每當夏月, 常避暑京舍. 京舍雖甚湫隘, 而無蚊蛙草樹之苦.

獨有一婢守舍, 忽病眼, 狂呼棄主去, 無供飯者. 遂寄食廊曲, 自然款狎, 彼亦不憚使役, 如奴婢.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人或讓其迂濶無當, 支離可厭, 而亦不知止也.

又有譏其在家爲客, 有妻如僧者, 益晏然, 方以無一事爲自得.

有雛鵲折一脚, 蹣跚可笑. 投飯粒益馴, 日來相親. 遂與之戱曰: “全無孟嘗君, 獨有平原客.” 東方俗謂錢爲文, 故稱孟嘗君.

睡餘看書, 看書又睡. 無人醒覺, 或熟睡盡日, 時或著書見意. 新學鐵絃小琴, 倦至爲弄數操.

或故人有餉酒者, 輒欣然命酌.旣醉乃自贊曰: “吾爲我似楊氏, 兼愛似墨氏, 屢空似顔氏, 尸居似老氏, 曠達似莊氏, 參禪似釋氏, 不恭似柳下惠, 飮酒似劉伶, 寄食似韓信, 善睡似陳搏,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 自比似孔明, 吾殆其聖矣乎? 長遜曹交, 廉讓於陵, 慚愧慚愧.” 因獨自大笑.

時余果不食三朝. 廊隸爲人蓋屋, 得雇直, 始夜炊. 小兒妬飯, 啼不肯食, 廊隸怒覆盂與狗, 惡言詈死. 時不侫纔飯, 旣困臥, 爲擧張乖崖守蜀時斬小兒事, 以譬曉之, 且曰: “不素敎反罵, 爲長益賊恩.” 而仰視天河垂屋, 飛星西流, 委白痕空. 語未卒, 洛瑞, 問丈人獨臥誰語也? 所謂與廊曲問答者此也.

洛瑞又記雪天燒餠時事. 時不侫舊居與洛瑞對門, 自其童子時見. 不侫賓客日盛, 有意當世. 而今年未四十, 已白頭, 頗爲道其感慨. 然不侫已病困, 氣魄衰落, 泊然無意, 不復向時也. 玆爲之記以酬. -燕巖集

 

 

 

 

 

 

해석

六月某日, 洛瑞夜訪不侫, 歸而有記.

6월 모일에 낙서 이서구는 밤에 나를 방문하고서 돌아가 기록을 남겼다.

 

: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거기에 써있다. “저는 연암 어르신장인(丈人): 부친뻘이나 선생뻘의 사람에게만 쓰는 말이다. 이를 통해 이서구가 연암을 선생으로 여기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이서구는 왜 자신이 쓴 글의 제목에서 굳이 이라는 말을 쓴 걸까? 여기에는 스승도 문생도 넓은 의미에선 서로 다 이라고 생각했던 연암 그룹의 사고방식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연암을 읽는다, 94을 방문했는데 어르신께선 이미 3일 아침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망건을 벗고 맨발로 방 선박에 다리를 올리고 누워서는

 

與廊曲賤隸相問答.”

행랑의 머슴들과 서로 문답을 하셨습니다.”

 

所謂燕巖, 卽不侫金川峽居,

소위 연암이라는 것은 곧 내가 금천 연암협에 살고 있어금천(金川): 황해도의 군() 이름이다. 이곳에 연암골이 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지명을 취한 것이다. 박지원은 1771년 문생뻘인 백동수(白東修, 1743~1816)와 함께 연암골을 답사한 뒤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 먹었으며, 이후 이곳에 산방(山房, 이른바 연암산방)을 마련하여 수시로 거처하였다. 그러다가 1778(정조 2)에 홍국영의 박해가 있자 아예 가족과 함께 이리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연암이 1778년 비로소 연암골에 거주한 것처럼 말해 온 기존의 설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연암을 읽는다, 94

 

而人因以號之也.

사람들이 그것으로 호를 삼은 것이다.

 

不侫眷屬, 時在廣陵.

나의 가족들은 이때에 광릉에 있었다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를 말한다. 연암의 아들인 박종채(朴宗采, 1780~1835)는 연암 사후 연암의 전기인 과정록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 책은 현재 초고본, 1차 수정본, 완성본의 세 가지 필사본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1차 수정본에는, 연암이 1772년에서 1773년 사이 가족을 광주군 석마(石馬)의 처가로 보내고 늘 혼자 전의감동(典醫監洞)의 우사(寓舍)에서 지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실제 사실과 조금 다르다. 연암은 당시 연암산방에서 지내기도 했으며, 필요에 따라 연암산방과 전의감동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서울 집이란 곧 전의감동에 있던 집을 가리킨다. -연암을 읽는다, 94.

 

不侫素肥苦暑,

나는 평소에 살이 쪄 더위에 괴로워했고

 

且患草樹蒸鬱, 夏夜蚊蠅,

또 풀과 나무가 울창해져 여름밤 모기와 파리를 걱정해야 하며

 

水田蛙鳴, 晝夜不息以故,

논 개구리의 울음이 낮밤으로 쉬지 않는 까닭에

 

每當夏月, 常避暑京舍.

매년 여름이 되면 항상 서울에서 더위를 피했다.

 

京舍雖甚湫隘, 而無蚊蛙草樹之苦.

서울집은 비록 매우 습하고 좁지만 모기와 개구리와 풀과 나무로 인한 괴로움은 없었다.

 

獨有一婢守舍, 忽病眼,

홀로 한 계집머슴이 집을 지켰는데 갑자기 눈에 병이 걸려

 

狂呼棄主去, 無供飯者.

미쳐 소리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떠나 밥을 마련해주는 사람이 없게 됐다.

 

遂寄食廊曲, 自然款狎,

마침내 행랑채랑곡(廊曲): ‘행랑채행랑방이라고도 하는데, 대문의 양쪽이나 문간 옆에 있는 방으로, 이른바 아랫것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행랑에 사는 것을 행랑살이라고 일컬으며, 행랑살이하는 남자를 행랑아범, 여자를 행랑어멈이라고 부른다. 행랑 사람은 꼭 하인은 아니며, 신분이 평민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경우 집주인과 행랑 사람은 주종 관계는 아니며, 행랑을 빌려 사는 대가로 더러 주인집의 일을 돕거나 심부름을 해줄 따름이다. -연암을 읽는다, 94~95에 기숙하며 먹게 되니 자연히 친해졌고

 

彼亦不憚使役, 如奴婢.

저들 또한 부림 받는 걸 꺼리질 않으니 마치 노비인 듯했다.

 

靜居無一念在意.

고요하게 거처하며 한 생각도 뜻에 두지 않았다.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이따금 고향 편지를 받으면 다만 평안(平安)’이라는 글자만을 보았다.

 

益習疎懶, 廢絶慶弔.

더욱 익숙히 성가시고 나태해져 경조사조차 폐하여 하지 않게 됐다.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혹은 여러날 세면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이나 두건을 싸지도 않았다.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손님이 이르면 혹 잠잠히 가만히 앉기도 하고 혹은 땔나무나 참외를 파는 장사꾼이 지나가면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불러 효제충신효제충신(孝悌忠信): 공자의 말로서, ‘는 부모를 비롯한 수직적 관계 속에 있는 웃어름에 대한 공경을, ‘는 수평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우애를, ‘은 자기 내면의 성실함을, ‘은 남과의 신의를 뜻하는 말이다. -연암을 읽는다, 96과 예의염치를 함께 말하고 정성스럽게 여러 말을 말하기도 했다.

 

人或讓其迂濶無當, 支離可厭,

사람들이 간혹 나의 우활함을 감당하질 못하는 점과 지리멸렬하여 싫어할 만한 점을 꾸짖기도 하지만

 

而亦不知止也.

또한 멈출 것을 알지 못했다.

 

又有譏其在家爲客, 有妻如僧者,

또한 집에 있으면서도 손님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도 스님과 같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더라도

 

益晏然, 方以無一事爲自得.

더욱 편안해져 곧 한 가지 일도 없다는 것으로 자득함을 삼았다.

 

有雛鵲折一脚, 蹣跚可笑.

새끼 까치가 한 다리가 골절이 되어 절뚝거리니 웃음이 나왔다.

 

投飯粒益馴, 日來相親.

밥알을 던져 더욱 길들이니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遂與之戱曰: “全無孟嘗君, 獨有平原客.”

마침내 까치에게 완전히 맹상군맹상군(孟嘗君):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의 왕족으로, 성은 전(), 이름은 문()이다. 천하의 인재를 모아 후하게 대접하여 휘하에 식객 수천 명을 거느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서는 맹상군의 이름이 인 데 착안하여 돈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pun)’, 즉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익살에 해당한다. -연암을 읽는다, 96~97은 없고 홀로 평원군의 식객평원군(平原君): 전국시대 조() 나라의 왕족으로, 맹상군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맹상군처럼 그 휘하에 식객 수천 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평원군의 식객이란 다리 부러진 까치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사기』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의 다음 고사와 관련된다. 평원군 집 앞 민가에 다리를 저는 이가 있었는데, 평원군의 첩 하나가 그 걷는 모습을 보고 큰소리로 웃었다. 이튿날 다리 저는 이는 평원군을 찾아와 자신을 비웃은 첩의 머리를 베어 사()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 달라고 했다. 평원군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 후 그 사람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평원군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1년 만에 식객 수가 절반으로 싹 줄어들었다. 잘못을 깨달은 평원군은 첩의 목을 베어 다리 저는 이에게 주며 직접 사과한 뒤에야 떠났던 식객들이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까치를 평원군의 고사에 나오는 다리 저는 사람에 견준 것이다. “평원군의 식객만 있군이라는 말은 연암이 까치 새끼를 자신의 식객으로 간주한 말인바, 익살스러움이 느껴진다. -연암을 읽는다, 97만 있구나.”라고 농담을 했는데

 

東方俗謂錢爲文, 故稱孟嘗君.

우리나라에선 세속에서 돈을 ()’이라 하기 때문에 맹상군을 말하게 된 것이다.

 

睡餘看書, 看書又睡.

잠자다가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잠들었다.

 

無人醒覺, 或熟睡盡日,

깨워주는 사람이 없으니 간혹은 진종일 자기도 했고

 

時或著書見意.

이따금 혹 글을 써서 뜻을 드러내기도 했다.

 

新學鐵絃小琴, 倦至爲弄數操.

새로 철로 만든 현을 쓴 작은 가야금철현소금(鐵絃小琴): 구라파의 쇠줄로 된 금()이라는 뜻인데, 양금(洋琴)을 말한다. 본래 이슬람 음악에 쓰이다가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조선 영조(英祖) 때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직사각형 판면의 양쪽 끝에 긴 괘(, 현을 괴는 기둥)를 하나씩 세우고 그 위에 네 줄의 철현(鐵絃)을 한 벌로 하여 1456선을 걸친 모양이다. 대나무 채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낸다. 연암은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에서, 1772618일 오후 6시경 담헌 홍대용의 집에서 담헌이 처음 양금 연주에 성공하던 장면을 자기가 목격했다고 적고 있다. 한편 과정록, 연암이 담헌의 집에서 담헌과 함께 가야금으로 음을 조율하여 처음으로 양금을 연주했다고 서술해 놓고 있는 바, 연암 자신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연암 자신의 기록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과정록에는 또 연암과 담헌이 당시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김억(金檍) 등과 어울려 양금과 생황의 합주를 즐겼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무튼 연암이 이 글을 쓰기 얼마 전에 양금 연주하는 법을 알게 됐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연암을 읽는다, 105을 배워 싫증날 때가 되면 여러 곡조를 켜기도 했다.

 

或故人有餉酒者, 輒欣然命酌.

간혹 친구가 술을 보내주면 갑자기 좋아하면서 술 따르라 명하기도 했다.

 

旣醉乃自贊曰:

이윽고 고주망태가 되면 곧 스스로 찬미하며 말했다.

 

吾爲我似楊氏, 兼愛似墨氏,

내가 나를 위하는 것으로는 양주만 같고 겸애하는 것으로는 묵적만 같으며

 

屢空似顔氏, 尸居似老氏,

자주 쌀독이 빈 것으론 안연만 같고 죽은 듯 살기론 노자와 같으며,

 

曠達似莊氏, 參禪似釋氏,

광달하기로는 장자와 같고 참선하기로는 석가와 같으며

 

不恭似柳下惠, 飮酒似劉伶,

공손하지 않기로는 유하혜와 같고 술을 마시기로는 유령과 같으며

 

寄食似韓信, 善睡似陳搏,

밥을 빌어먹기로는 한신과 같고 잠을 좋아하기로는 진박진박(陳搏): 오대(五代) 말 북송(北宋) 초의 인물로, 도가(道家) 사상가이다. 호북성(湖北省)의 무당산(武當山)에서 선술(仙術)을 닦았는데, 한 번 잠을 자면 100일을 내리 잤다고 한다. -연암을 읽는다, 106과 같으며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

거문고를 타기로는 자상호와 같고 책을 저술하기로는 양웅과 같으며,

 

自比似孔明, 吾殆其聖矣乎?

스스로 비교하는 것은 제갈공명과 같으니 나는 거의 성인이로구나.

 

長遜曹交, 廉讓於陵,

다만 키는 조교보다 작고 청렴은 오릉중자보다 덜하니

 

慚愧慚愧.”

부끄럽고도 부끄럽구나.”

 

因獨自大笑.

이 글 때문에 홀로 스스로 폭소했다.

 

時余果不食三朝.

이때에 나는 과연 삼일동안 먹질 못했다.

 

廊隸爲人蓋屋, 得雇直, 始夜炊.

행랑의 머슴은 남을 위해 지붕을 엮어주고 품삯을 얻어 비로소 밤에 밥할 불을 켰다

 

小兒妬飯, 啼不肯食,

어린아이가 밥투정으로 울며 기꺼이 먹으려 않자

 

廊隸怒覆盂與狗, 惡言詈死.

행랑 머슴은 화내면 밥그릇을 엎어 개에게 주며 악다구리를 했고 죽으라고 욕을 했다.

 

時不侫纔飯, 旣困臥,

이때 나는 겨우 밥을 먹고 이미 곤하게 누워

 

爲擧張乖崖守蜀時斬小兒事, 以譬曉之,

장괴애가 촉나라 지킬 때 어린아이를 참수한 일북송 초의 문신인 장영(張詠)을 말한다. 호가 괴애(乖崖). 익주 자사(益州刺史)와 이부상서를 지냈다. 장영이 촉(, 지금의 사천성泗川省)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다. 한 늙은 병사가 어린 자식을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으로 아비의 볼을 때렸다. 장연은 이를 보고 노하여 아무리 아이라 해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그 애를 죽인 일이 있다. -연암을 읽는다, 111을 들어 비유함으로 그를 깨우쳐줬고

 

且曰: “不素敎反罵, 爲長益賊恩.”

평소에 가르치질 않고 도리어 욕만 하면 커서 더욱 은혜를 저버리네.”라고 말해줬다.

 

而仰視天河垂屋, 飛星西流,

우러러 보니 하늘의 은하수가 집에 닿아 있고 흐르던 별빛이 서쪽으로 흘러

 

委白痕空.

끝의 흰 것이 허공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語未卒, 洛瑞,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낙서가 도착하여

 

問丈人獨臥誰語也?

어르신은 홀로 누워 누구와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다.

 

所謂與廊曲問答者此也.

말했던 행랑 머슴과 문답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洛瑞又記雪天燒餠時事.

낙서는 또한 눈 내리던 날에 떡을 구워먹던 때의 일을 기록했다.

 

時不侫舊居與洛瑞對門, 自其童子時見.

그 당시에 나는 옛 거처는 낙서와 문을 접하고 있어 아이 때부터 보아왔다.

 

不侫賓客日盛, 有意當世.

나의 경우는 손님이 날로 많아 당대에 대한 뜻이 있었다.

 

而今年未四十, 已白頭,

지금 나이 마흔이 채 못 됐지만 이미 흰 머리가 났기에

 

頗爲道其感慨.

매우 감개함을 말한 것이다.

 

然不侫已病困, 氣魄衰落,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곤궁해 기백이 쇠락하여

 

泊然無意, 不復向時也.

담백하게 뜻조차 없어져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玆爲之記以酬. -燕巖集

이에 그를 위해 기문을 써서 수창한다.

 

 

  '백탑시파'는 백탑 서쪽이 이들의 주무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석치 등이 이 모임을 주도하며 '북학사상'을 폈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夏夜訪燕巖丈人記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 /

1. 연암협에 살던 연암이 서울로 온 이유

2. 연암의 호기로움

3. 기백이 시들어 뜻마저 재처럼 식다

4.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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