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2부, 4장 ‘연암체’

건방진방랑자 2021. 7. 8.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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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암체

 

 

소문의 회오리

 

 

물론 고문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국왕이 나서서 치른 공공연한 대결의 장이었다 치더라도, 미시적 차원에서의 충돌 또한 그 못지 않았다. 처남 이재성이 쓴 연암의 제문에는 그런 정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病世爲文 痴矜自古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麤疏是襲 漓餲不吐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自附純質 乃極冗腐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公所醫俗 反招嗔怒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如人病胃, 色難濃旨, 如目羞明, 惡見斐亹]”았다고.

 

과연 그러했다. 환자들이 몸에 이로운 것을 꺼리듯이, 고문파들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문장들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속내를 들춰보면, 그건 이미 논리와 설득의 차원을 넘어서 이권과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을 띠게 된다. 연암에 대한 숱한 비방들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연암의 글이 단지 소품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연암 역시 소품에 능했고, 촌철살인ㆍ포복절도의 짧은 아포리즘(aphorizm)을 즐겨 구사했지만, 그렇다고 연암의 문체적 실험이 소품으로 수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소품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장에 생()의 약동하는 기운을 불어넣을 것인가였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어디다 쓰겠는가[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哉]?”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그의 글이 언제나 거센 회오리를 몰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1만 길이나 되는 빛이 뻗어나와 가슴을 툭 트이게 한다.” 이런 열렬한 예찬자가 있는가 하면, 격식에 사로잡힌 고문주의자들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다며 격렬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유한준(兪漢雋)과의 악연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유한준은 소싯적에 고문을 본뜬 글을 지어 선배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은, 한마디로 잘 나가는모범생이었다. 연임에게도 인정을 받고 싶었던지 한 번은 연암에게 자신의 글을 평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연암의 평은 가혹했다. “그대의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지만, 사물의 명칭이 빌려온 것이 많고 인용한 전기가 적절치 못하니 이 점이 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하여 아뢰는 바요. (……) 제왕의 도읍지를 다 장안이라 칭하고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이라 부른다면, 명칭과 실상이 혼동되면서 도리어 속되고 비루한 표현이 되고 마오[文章儘奇矣. 然名物多借, 引據未襯, 是爲圭瑕. 請爲老兄復之也. (……) 苟使皇居帝都, 皆稱長安, 歷代三公, 盡號丞相, 名實混淆, 還爲俚穢].” 비유하자면 얼굴 찌푸림을 흉내낸 가짜 서시의 꼴[效顰之西施]”이라는 것.

 

이 말은 유한준의 글에 대한 평이면서 동시에 고문에 길들여진 문장가들 일반에 대한 신릴한 냉소이기도 하다. 이런 쓰라린 평을 듣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문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글쓰는 이들에게 이런 혹평은 비수와 다를 바 없다. 과연 유한준은 깊은 한을 품었다. 그 이후 연암에 대한 비방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말년에는 연암 조부의 묘를 둘러싼 산송(山訟)까지 일으켜 연암과 그의 가족들을 질리게만들었다. 아들 박종채가 이 자는 우리 집안과 100대의 원수다[此吾家百世之讎也].”라고 했을 정도니, 이것만으로도 당시 연암이 고문주의자들과 겪었을 전투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연암의 절친한 친구 유언호는 연암을 대신하여 이 친구는 위선적인 유자(儒者)를 꾸짖으려고 특별히 풍자한 것뿐일세. 나는 자네들이 걸핏하면 힘을 내어 위선적인 유자를 대신해 분노를 터뜨리는 게 늘 이상하다네라며 비꼬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인물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그의 글은 늘 소문의 회오리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음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궁궐로 들어가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각, 문장짓는 일을 맡는 관청)에서 서로 돌려가며 읽혔다. 문체반정이 있기 전 정조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보고서,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함(備倭論)등의 글에 대해 모두 원만하고 좋구나[諸篇皆圓好]”, 그런데 연암의 문체를 본떴구나[此燕岩體也]”라고 했다 한다. 그만큼 연암의 문체는 그 나름의 특이성을 분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연암체’! 임금도 그 추이를 주목했을 정도니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을밖에.

 

 

 

 

연암체의 실체

 

 

그럼 과연 연암체란 어떤 것일까.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암의 문장에 대해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없는 리좀(rhizome)’ 같은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리좀은 덩이줄기라는 뜻으로, 수목(樹木)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이 수목이라면, 리좀은 뿌리라는 중심이 없을 뿐 아니라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는 특성을 지닌다. 연암의 문체적 특이성을 이 개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흔히 연암의 문장론에 대해 다음의 글을 주목한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로운 영물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지초(芝草)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초정집서(楚亭集序)

苟能法古而知變, 刱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博, 旨意各殊. 故飛潛走躍, 或未著名; 山川草木, 必有秘靈. 朽壤蒸芝, 腐草化螢.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조한다!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연암의 특이성은 변증법적 조화와 통일로 오인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과연 의 조화에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고문이든 아니든, 언어가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날마다 그 광휘가 새로운그래서 썩은 흙에서 기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하는삼라만상의 무상한 흐름을 등동적으로 절단, 채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그 핵심이 있다.

 

그가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자신의 조카 종선의 시를 평하면서, “한 가지 법도에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不纏一法, 百體俱該]” “성당의 시인가 하면 어느새 한위의 시가 되고 또 송명의 시가 된다[視爲盛唐, 則忽焉漢, 而忽焉宋明. 纔謂宋明]”고 극찬한 데서 보듯이,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이의 능력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논점을 변증법으로 영토화하는 순간 종횡무진하는 이 게릴라적인담론은 고상하고 평온한 질서로 평정되고 만다.

 

오히려 연암체의 진수는 대상과 소재에 따라 변화무쌍한 변이 능력에 있다.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 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중략)

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題目者, 敵國也; 掌故者, 戰場墟壘也. 束字爲句, 團句成章, 猶隊伍行陣也; 韻以聲之, 詞以耀之, 猶金皷旌旗也. 照應者, 烽埈也; 譬喩者, 遊騎也.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貴含蓄者, 不禽二毛也; 有餘音者, 振旅而凱旋也.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중략)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중략)

故善爲兵者, 無可棄之卒; 善爲文者, 無可擇之字. (중략) 故文之不工, 非字之罪也. 彼評字句之雅俗, 論篇章之高下者, 皆不識合變之機, 而制勝之權者也.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則所以合變之權, 其又在時而不在法也.

 

 

글쓰기를 전쟁의 수사학에 빗대고 있는 이 글이야말로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단연 독보적인 문장론이다. 소단적치인이란 제목도 흥미롭다. ‘소단(騷壇)’은 문단이란 의미고, ‘적치(赤織)’는 붉은 깃발이란 뜻이니, 우리 말로 옮기면 문단의 붉은 깃발을 논함정도가 된다. 병법에는 고정된 룰이 따로 없다. 병법을 달달 왼다고 전투에 승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러다 망한 케이스가 더 많다. 승패를 좌우하는 건 병법이 아니라, ‘()’를 파악하는 능력일 뿐이다. 글을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에 어떤 종류의 규범이나 초월적 체계가 있을 리 없다. ‘합하여 변하는 기미’, 곧 때에 맞는 용법이 있을 뿐이고,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 곧 효과와 울림이 있을 뿐이다.

 

연암체가 과연 그러하다. 그의 글은 소설과 소품, 고문과 변려문 등이 자유자재로 섞이는 한편, 천고의 흥망성쇠를 다룬 거대담론과 시정의 우스갯소리, 잡다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하나로 분류되는 순간, 그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곤 한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버리는 변검처럼, 그리고 그 변화무쌍한 얼굴들의 각축장이 바로 열하일기.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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