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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수구의 대가(이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수구의 대가(이괄)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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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구의 대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고 왕국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100여 년 전의 중종반정(中宗反正)과 같은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수많은 공신들이 책봉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왕당파를 주도한 대북파의 보스들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처형되었고, 반정을 주도한 소장파 서인들을 비롯해서 50여 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새 정권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부터 삐걱거린다.

 

사실상 반란의 물리력을 담당하고서도 2등 공신으로 책봉된 데다 중앙 관직이 아닌 평안도로 배속된 이괄은 불만이 가득하다. 굳이 말하자면 새 정권의 의도는 북방의 정세가 워낙 화급한지라 국경 수비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괄로서는 오랜만에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일개 변방의 무신에게까지 좋은 보직을 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잖아도 건드리면 터질 듯한 이괄의 심기는 조정에서 자기 아들에게 역모의 혐의를 두자 폭발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반정 이듬해인 1624년에 조정에서 파견한 수사관을 잡아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기야 한 번 해봤으니 또 못할 이유도 없다(사실 조정에서는 역모의 혐의가 무고라는 것을 알았으나 서인 정권은 그것을 핑계로 일단 이괄을 잡아들이려 했다).

 

반정 때보다도 훨씬 대규모인 1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괄이 평안도에서 내려오자 더럭 겁이 난 인조(仁祖)사대부(士大夫)들은 잽싸게 충청도 공주로 피난한다외적의 침략도 아닌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관리들과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십 년 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선조(宣祖)가 버선발로 도망친 일은 있으나 그래도 그건 국가 비상사태의 경우니까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란으로 국왕이 꽁무니를 뺀 이번 사건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광해군(光海君)이 주도한 왕국화의 노선이 붕괴하면서 국왕의 체통도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뒤 국왕이 적 앞에서 무릎을 꿇는 광경까지 목격하게 된다. 쉽게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옛 경복궁 터에서 선조(宣祖)의 서자인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조선 역사상 반란군이 별도의 왕을 추대한 것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이 한양을 장악한 것도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이괄의 난에 동참하지 않은 북방의 수비 병력이 대거 남하하자 이괄은 무악재에서 한바탕 교전을 벌이는데, 대패하고 만다(흥안군은 인조와 함께 공주로 가던 중에 도망쳐서 이괄의 무리에 합류했는데, 반란이 실패하자 처형당했으니 결과적으로 판단 미스였다).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仁祖)는 다시 진무공신(振武功臣) 30여 명을 책봉한다. 치세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벌써 공신 인플레 현상이 심각할 지경이다.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다시 공신 세력이 훈구파를 이루고 나머지 세력이 반대파를 이루어 한 바탕 멋지게(?) 당쟁을 펼쳤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북방에서 더 끔찍한 사태가 터졌기 때문이다(이미 충분히 예고되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이 진압될 무렵 일부 반란자들은 후금으로 넘어가 조선의 사정을 알렸다. 비록 지금으로 치면 매국노이자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지만, 그들이 전란의 초대자인 것은 아니다. 또한 1626년 누르하치의 아들로 후금의 2대 황제로 즉위한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는 조선에 대한 강경 노선을 취했지만, 그도 역시 전란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조선 전역을 다시 또 전란의 회오리로 몰아넣은 진짜 원인 제공자는 바로 당시 조선의 집권자인 사대부(士大夫), 즉 서인 세력이다.

 

광해군(光海君)을 줄타기에서 떨어뜨린 그들은 아예 외교 자체를 포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해군의 곡예는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세상에 중화와 오랑캐를 두고 저울질을 하다니, 그런 망국적인 사고방식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문명 세계와 원시ㆍ야만의 세계를 비교한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인 사대의 자세로 회귀한다. 굳이 명명하자면 친명배금(親明排金), 즉 명에 사대하고 금을 배격한다는 게 되겠지만 실은 그런 이름조차 필요없다. 그냥 좋았던 옛날, 중화세계가 동북아 질서의 축이었던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그런 시대착오적인 정책 때문에 조선은 수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정규군의 필요성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설립된 총융청(摠戎廳)인데, 사실상 조선 최초의 정규군이라 할 수 있다. 수구적인 반정 세력이 각성한 것일까? 그보다는 전통적으로 군사권을 맡겨왔던 중국의 한족 왕조가 사라졌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뒤늦게 엉성한 군 조직을 꾸렸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전란은 아니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남풍 뒤의 북풍

곡예의 끝

수구의 대가

중화세계의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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