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예의 끝
만주쪽에서 보기에는 중원보다 더 가까운 게 한반도이며, 중국보다 더 약한 게 조선이다. 누르하치는 물론 조선을 타깃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면 언제든 공격해 올 것이다. 일단 광해군은 대포를 새로 만들게 하고 북도의 군 지휘관들을 교체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새 지휘관들이 새 대포를 사용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새로운 정세를 맞아 외교에 주력한다. 그에게는 일찍이 조선의 어느 임금도 해본 적이 없고 할 필요도 없었던 국제 외교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알다시피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벌이는 외교란 줄타기처럼 섬세하고 위험한 곡예일 수밖에 없다. 어느 측으로 기울어져도 안 되고, 물론 줄에서 뛰어내려도 안 된다. 명나라는 서산에 지는 해이고, 후금은 동쪽 바다 위로 뜨는 해다. 하지만 명나라는 아직 후금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강대국이며, 전통적으로 조선의 상국이다. 그래서 줄타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전망은 광해군(光海君)이 줄 위에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조만간 늙은 공룡 명나라가 쓰러질 것은 뻔해 보이니까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1618년 후금이 중원 진출의 관문에 해당하는 랴오둥을 공략하자 광해군의 줄타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명나라는 황실이 문란해지면서 변방의 주둔군도 이미 녹슬었다. 그런데 명의 조정에서는 묘한 해법을 들고 나온다. 조선의 군대를 징발해서 후금을 막으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에게는 노선을 정하라는 압력이나 다름없다. 이제 광해군(光海君)의 줄타기는 끝난 걸까?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걸까? 그러나 여기서 광해군은 절묘한 타개책을 찾아낸다. 지원군을 보내되 싸우지는 않는다는 전략이다. 일단 그는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을 원수로 삼아 1만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이로써 명나라의 명령은 이행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측근들도 모르게 강홍립에게 후금군과 가급적 싸우지 말라는 비밀 지령을 내린다. 알아서 눈치껏 처신하라는 명령인데, 과연 강홍립은 명나라의 제독 유정(劉綎)의 군대와 랴오둥에서 합류한 뒤 싸우는 척하다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해 버린다. 그러고는 후금 진영에서 명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출병했다는 본심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치른 대가는 컸다. 왕의 본의를 알지 못한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의 식솔들을 잡아들였으며, 후금 측은 이듬해 병사들을 모두 풀어주면서도 그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계속 인질로 잡아둔 것이다(아마 그가 처벌된 데는 눈치를 챈 명나라 측의 항의가 있었을 텐데, 그것까지는 광해군(光海君)도 막아주지 못한 듯싶다).
어쨌든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멋지게 성공했다. 이제 그는 명나라가 명패를 완전히 내릴 때까지만 줄 위에서 버티면 된다. 그때가 되면 비록 조선은 중국의 새 주인인 후금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과제를 안게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사대관계와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후금은 중화세계의 일원이 아니었고, 이제 조선도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아닌 당당한 왕국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예기치 않은 데서 공격을 받아 줄에서 떨어지게 된다. 바깥의 문제에 신경을 쓴 나머지 안을 추스리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대북 세력을 왕당파로 육성한 것은 다른 사대부 세력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원래 그들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1617년 인목왕후를 대비 자리에서 폐위시켜야 한다는 대북인들의 주장을 광해군이 쉽게 허락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다【실은 대북 세력만이 아니라 광해군도 인목왕후에 대해서는 늘 꺼림칙하게 여겼다. 나이는 그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지만 어쨌든 자신의 계모일 뿐 아니라 광해군은 그녀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살해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왕실의 서자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경우는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광해군이 처음이었으니 그로서는 여러 가지로 대비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칠순의 존경받는 원로 정객인 이항복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대비의 폐위는 부당하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광해군(光海君)은 그들을 유배하는 조치로 맞섰다. 그러나 아무리 대외 정세에 몰두해 있더라도 그것은 지나친 처사일뿐더러 가뜩이나 코너에 몰린 반대파 사대부(士大夫)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였다.
▲ 줄타기 외교 전통의 강국과 신흥 강국 사이에서 광해군(光海君)은 줄타기를 시작했다. 위험하지만 어차피 두 강국 중 하나는 멸망할 테니 잠시만 버티면 된다. 『만주실록』에 실린 이 그림은 누르하치와 강홍립이 만나는 장면이다. 왼편의 글씨에 강홍립의 이름을 ‘姜’이라 표기한 게 보이는데, 아마 발음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1622년 이이첨이 폐위된 인목왕후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반대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특히 정철(鄭澈)이 실각한 이래 오랫동안 권력 맛을 보지 못한 서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뭔가 일을 엮어내야 한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사대부들의 상당수가 왕당파로 변신해 있었으니 그대로 간다면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되돌릴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래도 늙은 관료들이었다면 노골적으로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그들의 주무기는 말만의 역모인데, 지금은 그게 통할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현 정권에 항거했다 관직을 박탈당한 김류(金瑬, 1571~1648), 최명길(崔鳴吉, 1586~1647), 김자점(金自點, 1588~1651), 그리고 성균관 ‘제적생’으로 역시 현 정권에 원한이 깊은 심기원(沈器遠, ?~1644) 등 소장파 서인들은 원로들이라면 꿈꾸지도 못할 과감한 음모를 꾸민다. 연산군(燕山君)을 타도한 중종반정(中宗反正) 이래 처음으로 ‘말만이 아닌 역모’가 계획된다(그들이 거사를 계획하고 칼을 갈아 씻은 곳이 오늘날 서울의 세검정 洗劍亭이다).
반란에 필요한 준비물은 우선 왕으로 내세울 후보이고, 그 다음은 물리력이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능양군(陽君)이라는 후보를 낙점한다. 신성군의 조카인 그는 1615년 친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살해된 원한에 사무쳐 있다. 양측은 쉽게 계약을 체결한다. 후보는 됐고,
그럼 물리력은 어떻게 할까? 원래 정규군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나마 조선의 군사력은 북방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북도에 집결해 있다. 그래서 거사에 필요한 물리력은 황해도 평산 군수인 이귀(李貴, 1557~1633)와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괄(李适, 15871624)이 담당한다(말하자면 전방 사단을 동원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격인데, 이런 경우는 1979년 12월 12일에 재현된다). 골조가 다 짜였으니 이제 모 아니면 도다.
1623년 3월 그들은 약 7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행길에 올랐다. 때맞춰 경기방어사인 이서(李曙, 1580~1637)가 고양에서 700명의 병력으로 합류하면서 반란군의 규모는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한양에 들어올 때까지도 광해군은 반란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궁중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보안 유지에서도 반란군은 한 수 위였던 셈이다. 손쉽게 궁궐을 장악한 반란군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왕후에게 옥새를 건넨 다음 그녀의 손으로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게 했다. 그가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49)이므로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불과 15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반란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 당시 조선의 형편을 말해준다. 물론 궁을 점령할 때는 각본에 따라 궁 안의 동조 세력이 내응하기는 했으나, 반란군이 그 정도 규모만으로 북도에서 한양까지 한달음에 내려올 수 있었다면 조선에는 치안 자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원래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으로는 경군(京軍)이라 불리는 조직이 있었고 또 별도의 왕실 근위대가 편제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군제가 사실 상 마비되어 있어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군 조직마저도 반란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 광해군(光海君) 치세에도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광해군의 낙관과는 달리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역사상 두번째로 반정이 성공했고, 광해군은 연산군(燕山君)에 이어 두번째로 왕의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컴백했다는 사실이다. 광해군(光海君)이 꾀한 왕국의 꿈이 실패하면서 조선은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수구적 체제로 돌아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광해군이 줄에서 떨어짐으로써 조선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 수구의 칼을 씻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들이 쿠데타의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이다.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광해군(光海君)의 중립 노선도 끝장나고 말았는데, 당시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가장 큰 죄목을 사대의 예를 다하지 않은 데서 찾았으니 이런 시대착오도 없다. 결국 그 대가는 ‘전란에의 초대’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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